23화.  크라잉 게임

조회수 7 15세 이상 이용가 등록 2026.09.03
고양이 여인숙

23화. 크라잉 게임


저녁이 되자 다시 숨어있던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천막 위에 쌓였던 눈들이 얼어붙으
면서 바람에 삐그덕거리는 요상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이내 전조등들마저도 그 진동에 옅
게 흔들리고 있었다.
천막 내의 사람들은 어느새 지쳐가고 있었다. 신혜의 머리 주위를 요란한 문어발처럼 가
득 뒤얽혀 있던 전선줄로부터 전해져오는 신호란 짜증나는 노이즈뿐이었다. 오후 내내 모
니터를 들여다보던 캐서린은 눈이 아픈지 몇 번이나 안약을 자신의 눈 속으로 떨어뜨려
넣기에 바빴다.
일정한 잔상의 입자들만이 가득한 모니터를 동상처럼 굳은 표정으로 들여다보던 스티븐은
마침내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저녁이라도 먹고 하자던 촬영감독에게 샌
드위치는 둿다 뭣해 쳐먹을 거냐고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이미 12,000자를 넘어선 필름
은 쓰레기통 속으로 쳐박혀 갔고 남은 필름의 부족때문에 카메라는 벌써부터 멈추어져 있
었다.
[여기가 맞는 거야? 미스 신.]
초조한 나머지 연신 자신의 두 손을 조물락거리며 막사 안을 왔다갔다 하던 혜수가 스티
븐을 휙 바라본다.
[신혜와 제가 발견된 곳이 이곳이라니까 분명히 맞을 거예요! 저분, 이건석씨에게 물어
보세요 . 저분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니까요 .]
스티븐이 날 휙 바라봤고 난 순간 뜨끔한 기분에 최목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처연
한 분위기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다 어처구니 없는 상상들입니다 . 공간 전이 이동같은 것 애당초 있을 수도 없는 일이
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건 휴거따위완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이건 웃기는 짓들이란
말입니다.]
스티븐이 날 노려보며 천천히 다가온다. 그리고 그가 바로 내 앞에서 핏기가 어린 눈을
하고 날 노려본다.
[당신은 알고 있어 .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어딘지 당신은 알고 있어 . 마음껏 비웃으
라구 . 난 찾아내고야 말테니까 .]
놈이 입술을 질근 깨물며 돌아서고 군인 두 사람이 박스 속에 든 통조림과 샌드위치를 나
누어주고 있었다. 삐죽이 삐쳐나온 샌드위치 속의 치즈 조각을 손으로 잘라낼 때까지도
난 속으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으리라. 스티븐 저
놈은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지옥이 아니라 단두대 아래라도 목을 끼어넣을
놈이기 때문이었다. 이 연구를 관망하던 물리학 교수는 밤이 되자 서울에 일이 있다면서
캠프장을 떠나갔다. 납골당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미친놈들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싸
느라한 조소가 가득히 씌여있었다.
이틀간 잠을 설친 탓에 자정이 되기도 전에 잠이 마구 쏟아져 왔다. 캠프장 구석에 쭈그
리고 앉아 눈을 좀 붙여야 했다. 최목사가 자기가 입고 있던 오리털 외투를 벗어서 나를
덮어주고 있었다. 그의 친절을 거절할 힘조차도 없었다. 그냥 잠이 마구 몰려오고 있었
다.
불현듯 눈을 감자 잠을 자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날 엄습했다. 언뜻 눈을 떴다. 그러나 이
미 한 발 늦었다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이 천막 안은 어느새 고양이 여인숙으로 변해 있
었다.
내가 터뜨린 그 엄청난 파괴와 함께 허물어져 내린 정방형의 여인숙이 어둠 속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뻥 뚫린 여인숙 마당 위로 눈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금까지만 해도 신혜의 몰골이 차지하고 있던 여인숙의 중앙으
로 걸어간다. 눈이 따스하게 내 뺨 위로 내리고 있었다. 하늘의 중앙에 떠있는 둥근 달로
부터 한줄기 빛이 내 앞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 달빛 아래에서 은주가 춤을 추고 있었다. 눈은 그녀의 살갖에 닿는 순간 어느새 말갛
게 녹아서 이슬처럼 맺히곤 했다. 너무도 황홀했다. 이 짧은 순간들이 천국처럼 느껴졌
다. 언제나 강함의 상징으로 동경하던 그 빨간 스커트를 몸에 착 껴입은 은주가 춤을 추
고 있었다. 그녀에게로 다가간 내가 손을 내어민다. 은주가 나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아
주 느린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는 달밤에 은주와 내가 춤을 춘다. 반젤리스의 영원한 대곡, 프로그레시브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누추하고 클래식이라고 하기에도 오히려 모자란 천국과 지옥의 1악장이
미친 듯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내눈에 눈물 한 방울이 뚝하고 떨어지고 은주가 그 눈물을 혀로 조용히 핥아내고 있었다
. 그리고 은주가 속삭이고 있었다.
[내 인생에 지금보다 더한 지옥이 몰려와도 날 지켜준다고 약속해 줘요 .]
[약 약속할께 .]
은주가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그 처연한 눈빛 속에서 내가 녹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귀
에 대고 속삭인다.
[그럼 제게로 오세요.]
눈을 번쩍 떴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으로 기울고 막사 내의 사람들은 어느새 허물어진 벽
에 기대어 잠이 들어가고 있었다. 간간히 들리는 터미날의 교신음들만이 싶어가는 새벽
을 지킬 뿐이었다.
혜수는 신혜의 팔을 잡고 잠이 들어 있었다. 신혜는 여전히 눈을 뜬 채 허공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곁으로 간이 의자에 스티븐이 정승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내가 천천히 일어나서 그의 뒤로 다가갔다. 그는 허물어진 납골당의 벽화
조각을 두 손에 들고는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각난 파편 위로 여전히 붉은 원색조
로 그려진 반인반수의 고양이 인간의 눈빛이 간담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쉰듯한 그의 목소리가 카랑하게 그의 입을 통해서 갈라져 나왔다 . 그는 계속해서 그 고
양이의 조각을 보며 중얼거린다.
[일주일동안 치뤄졌던 파오타이산(抱台山) 전투에서 우린 결국 패배했고 후퇴 명령을 받
은 동료들은 서로 헬기에 올라타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더군 . 몰려오는 쥐새끼 같은 베
트콩 놈들을 향해서 난 조용히 서있었지 . 결국 헬기는 15명의 패잔병을 남겨두고 하늘로
떠올랐지 .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자넨 상상도 못할 거야 . 자네가 한참 엄
마 젖을 빨 동안 난 매일 밤, 동료들의 뜯겨져 나가는 살점의 덩어리를 탐욕이 가득한 눈
으로 바라보아야 했지 . 우린 미뿌수에이탕(Mai Po Reservior)이란 늪지대에 갖혔는데
그 늪지대 아래론 "즘바딴 플래비마너스 라는 붉은 빛을 띄는 도마뱀들이 우글거리고 있
었지 . 어떤 놈은 크기가 악어만한 놈들도 있었고 어떤 놈들은 쥐새끼만한 놈들도 있었
지 . 놈들이 얼마나 영악한가 하면 사각의 대나무 창살에 갖힌 우리를 무슨 비축해둔 식
량 정도로 아는 거야 . 우린 공포를 잊기 위해 아무 말이든 해야 했어 . 어느새 사타구니
아래로 다가온 놈들이 혀를 날름대며 입맛을 다실 때도 우린 이 지루한 전쟁이 끝나고
돌아갈 고향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어야 했지 . 앨버트란 신참 녀석은 켄터키 주에서 왔
다는데 정말 넉살이 좋더군 . 사이먼과 가펑클 실황공연 때 하필이면 군중들 맨 가운데
끼였다나 . 오줌을 갈기고 싶은데 도저히 나갈 수가 있어야지 . 그래서 앞에서 발광을
하는 여자의 엉덩이에다가 실례를 했다더군 .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를 따라부르며 말
야 . 그랬더니 여자가 휙 돌아서보며 이렇게 말했다더군 . 정말 잘부르시는군요 . 우하하
하하 .]
난 스티븐이 정상이 아니란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피안의 음습한 늪지대를 따
라서 자신의 악몽 한 쪽에 남겨두었던 진짜 모습을 찾아서 완벽하게 조립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순간 난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 가뭄의 논바닥처럼 갈라진 피폐한 영혼을 한
저 신혜와 혜수라는 여자들마저도 언제나 도피를 꿈꾸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부모와 언제나 자신들을 둘러싼 신이라는 무거운 명제로부터 . 저 캐서린이란 여자는
저토록 아름다운 미모를 하고서도 섹스와 사랑은 학문이 주는 욕망 앞에서는 비스켓 부스
러기 정도라고 여겼던 저 여자는 이제서야 잃어버린 자신의 청춘의 낭만을 동경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목사는 ? 그리고 나는 ?
[한참을 웃는데 한참을 웃는데 붉은 물감같은 페인트 통이 늪 위로 불쑥 떠오르더군 .
뭔가했는데 바로 우리와 같이 웃고 떠들던 앨버트의 잘려져나간 허리통이었어 반쯤 잘
린 앨버트가 털썩 늪 위로 쓰러지더군 .]
[닥쳐!!]
난 미칠 것만 같았다. 스티븐이 들려준 얘기때문이 아니라 나 역시도 이 끔찍한 세계에
빠진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구토가 목구멍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 스티븐
은 계속해서 벌건 눈을 하고서는 날 야금야금 그 지독한 늪 속으로 빨아당기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결국 세 명만이 남게 되었을 때 놈들이 먹다 만 동료들의 살점들
이 대나무 창살 사이로 걸린 채 둥둥 떠다니는 거야 . 손이 묶인 채로 우리는 짐승의 눈
을 하고선 그 살점들을 노려봤지 . 어느 때는 그 살점이 조용히 미끄러져 내려와서는
내 눈 바로 앞에 멈추더군 . 그래 저건 고기야 아무 것도 아닌 고기야 . 한낱 파충류
가 먹다가 버린 고기덩어리에 불과한 거야라고 낫게 속삭이며 . 마침내 난 그것을 삼키고
있었어 .]
[집어 치워!!]
난 스티븐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스티븐이 날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조명등에
의해 그의 얼굴이 악마의 거대한 형상 그 자체로 날 압도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이었다
. 놈이 조용히 그 길다란 혀를 쭉 빼내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에 침을
적시며 내게 속삭인다.
[너도 원하는 거잖아 . 저 비욘드 월드를 . 도피하려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
는 .]
순간 저녁에 먹었던 샌드위치가 위액에 녹아 목구멍을 통과하고 있었다. 막사 밖으로 뛰
어나갔다.
눈 속에서 그대로 녹아버리고 싶었다. 인간이라는 사실이 힘겹고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
는 절망감이 뼈 속 깊이 찾아올 때면 난 신을 찾아 헤맸었다 . 지금 막사 속에서 잠들어
있는 저 최목사가 찾았다는 신이 내게는 결국은 미완의 형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최목사는 무슨 부랑의 족적을 찾아서 이곳까지 휩쓸리어 왔을까?
10여년 전 이땅에 정제되지 않은 해방신학의 물결이 군사정권의 잔재와 맞물려 노도와도
같이 밀려올 때 그는 신학과 현실참여라는 실로 무거운 회색의 십자가를 피해서 도피처럼
떠나갔던 이 조국이 언제나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이 납골당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병사들이 한결같이 도피를 꿈꾸던 올리
브유가 흐르는 낭만적인 지중해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세기말이라는 전쟁의 광분
속에 남겨진 패잔병들이고 나 역시도 시간의 열쇠를 쥔 절대의 신을 피해 언제나 도피를
꿈꾸며 비뚤어진 자아를 쏟아 붇던 슬픈 글쟁이었음을 스티븐을 바라보며 인정해야만 했
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역사 속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나 닮은 이들의 <신 찾기>에 관해서도
추스려본다. 내게 있어서 신 찾기의 궁극적인 종착역은 어린애가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기묘한 끈끈이 풀이라는 어설픈 고백들에게서 끝나고 마는 특이한 아성이었고
.
그래서 도피하고 싶었다. 사랑도, 내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여자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
는다고 단언해버리며 그렇게 감히 일찍부터 절망 속에 나를 남겨두었는데.
그런 내게 은주가 도피처였다 . 이유가 필요없는 . 은주는 나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
도피처가 사라진 지금 난 아마도 져니의 주인처럼 영원한 도피처를 향해 한 발자국씩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였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불꽅이 튀어올랐다. 막사 옆의 임시로 세워둔 발
전기용 전신주가 합선을 일으키며 폭풍에 쓰러지고 있었다. 그 순간 막사 안은 정전이
되면서 일순간에 비명 소리가 울러퍼지고 있었다. 스티븐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튀어올
랐다.
[촬영감독!! 촬영감독!! 빨리 카메라 준비해!!]
이윽고 촬영감독이란 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옘병할!! 필름통 가져와!! 이 병신아!!]
분명히 막사 안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비상 싸이렌 소리가 울리
고 병사들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임시 복구조들은 무너진 전신주로 뛰어가
고 있었다.
내가 막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바람에 펄럭이던 막사전체로 갑자기 옅은 연
두빛이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유연하고 부드러운 빛의 연출이었다
.
그리고 재빨리 휘익하는 소리를 내며 그 연두빛들은 막사 위로 솓구치고 있었다. 막사로
다가가던 병사들도 그 자리에 멈추어서서 모두 천막 위로 떠오르는 빛의 율동들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것은 연두빛의 기형적인 고양이 모습이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의 고양이 형
체들이 무너진 납골당 안을 휘젓고 있었다.
안에서는 일순간 침묵을 지키며 그들을 지켜보는 듯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막 막사 안
으로 뛰어들어갈 때였다. 갑자기 다시 전기가 일제히 들어왔다. 수리가 끝난 게 분명했
다. 막사 내의 사람들이 그제서야 황홀경에서 깨어나는 듯이 분주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찍었어?!!]
촬영감독의 얼굴에 핏기가 다 사라진 듯했다.
[아 아뇨 그만 필름이 .]
[개자식 돈 받아 쳐먹고 놀려구 왔어?]
스티븐이 날 휙하고 바라본다. 그리고 뚜벅뚜벅 내게로 다가온다.
[말해봐!! 자넨 알 거야!! 방금 그것들이 뭐야?!! 그게 고양이 인간들이란 거야?!! 그런
거야?!! 말해봐?!! 왜 우린 그들이 사는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거야?!! 말해봐!!]
[이제 봤으니 만족했을 거 아뇨?!! 더 이상 뭘 바라는 거요?!!]
스티븐이 발광을 한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냐!!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하는 거라구!!]
스티븐이 얼굴 근육을 씰룩거리며 막사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최목사를 바라보자
최목사도 공포에 떠는 얼굴이었다.
절규하는 인간들의 게임은 일주일이 다 가도록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날 밤 이후로는 더
이상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 본부에서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캐서린으로부터 슬쩍 전해들었다. 천만 다
행이었다. 그 일주일의 시간이 내게는 천년의 무게와 지독한 갈증으로 남아 있었고 난 몇
번이고 고양이 인간들이 사는 세계로 가는 문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이빨을 악물고 참아
내야 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스티븐의 변태적인 추억 듣기였다. 그는 지독한 새디스트였
다. 자신의 악몽들을 공유할 대상을 찾아내고는 그짓으로 은밀한 쾌감을 얻는 게 분명했
다.

93년 2월 7일 PM 12 : 20
어느 누구도 철수 명령에 반감을 품는 자는 없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미쳐가고 있다
는 걸 피부로 느낀 연구팀들과 병사들은 한시바삐 이 지겨운 지옥을 빠져나가는 게 소원
인 듯했다. 막사를 철거하는 그들의 손길이 무척이나 분주하게 보이고 가끔씩 농담을 주
고 받는 병사들도 눈에 띄였다. 스티븐은 거의 미쳐 있다고 보는 게 좋을 듯했다. 여전히
납골당의 중앙에 쭈그리고 앉아 반쯤 잘려져 나간 고양이 인간의 벽화를 들여다보며 청
승을 떨고 있었다.
다시 앰브란스에 실려나가는 신혜의 모습을 망연한 자세로 보고있는 혜수에게로 내가 다
가갔다. 그리고 가늘게 떠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혜수 이제 그만 친구를 병원으로 데려가 .]
혜수가 여전히 물기 어린 눈으로 날 휙 바라본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던 그녀가 금새
입을 다물고 만다. 나 역시도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다가 그냥 힘없이 돌아선다
. 그리고 최목사에게 인사나 하고 떠나기 위해 최목사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혜
수가 마구 뛰어오고 있었다. 내 앞에 멈추어 선 혜수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
이 쪽지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볼펜을 찾다가 내게 볼펜 있어요라고 묻는다. 내가 혜수
에게 볼펜을 전해주자 혜수가 급히 뭐라고 적어나간다. 그리고 다 적은 종이쪽지를 나를
향해 내어민다.
[저와 신혜가 사는 이곳의 주소예요!! 읍내는 방값이 비싸고 해서 저쪽 산 아래 빈 집을
세얻었거든요. 꼭, 꼭 들려주셔야 해요!!]
내가 혜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본다.
[선생님은 반드시 이곳을 다시 찾아 올 거예요!! 전 알아요!! 그땐 이런 지치고 힘없는
모습이 아닐 거예요!! 그땐 그땐 절 다시 찾아준다고 약속해주세요 !! 약속해주세요!
!]
[혜수 대체 .]
[약속해주세요!! 제발!!]
난 그녀의 애타는 애원 앞에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 기약없는 고
개 떨굼을 마치 영원을 기약하는 언약처럼 받아들이며 힘없이 돌아서는 혜수를 보며 이
다지도 비굴한 자신에 대해서 환멸이 치밀어 올라왔다.
BMW 안은 차가운 냉기가 가득했다. 자신의 참혹한 패배와 후퇴라는 쓰디쓴 미덕을 인정
할
줄 모르는 스티븐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소리로 차창에 서리가 끼이는 듯했다. 특히 스
티븐 놈이 가끔씩 백미러로 나를 노려보는 눈빛은 이제껏 보아 온 인간의 어떠한 눈빛 보
다도 더 사악하고 탐욕스러웠다. 그 섬뜩함을 눈치챈 최목사가 연신 내게 말을 붙여왔
다.
[언제 달라스에 오시면 연락주십시요. 이건 제 명함입니다.]
[목사님은 언제쯤 한국으로 오실 .]
[당분간은 힘들 것 같습니다. 할 목사님 밑에서 배워야 할 게 .]
[그분이 실망이 크겠군요.]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분은 이미 이런 결과를 예측했다고 .]
거기까지 말하던 최목사가 힐끗 스티븐의 눈치를 살핀다. 그러다가 자신이 지금 한국말
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소 안심하는 눈치였다.
평택으로 접어들어 죽전 휴게소에서 차들은 잠시 멈추어섰다. 우동이란 걸 처음으로 먹어
보는 미군들이 뭐라고 떠들며 키들대고 있었다. 최목사와 내 곁에서 우동국물을 훌쩍이
던 캐서린이 자신의 기행소감도 잊지 않고 곁들인다.
[신기하지 않아요? 지난 일 주일간 뭣땜에 그렇게 긴장했었는지, 아무 것도 아니었잖아
요 . 근데 마치 다른 세상에서 살다가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지 않아요?]
[한국이 다 이런 것만은 아닙니다.]
최목사가 어설픈 애국심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꽤 매력적인 나라인 것 만은 틀림없어요 . 다음엔 개인적으로 방문할거예요 . 이런 껄끄
러운 문제 말고 .]
[스티븐이 어디로 갔죠?]
아까부터 휴게실 밖 군용 트럭 속에 파묻힌 BMW 안에서 이쪽을 향해 하이에나같은 번쩍
이
는 눈빛을 쏘아대던 스티븐이 차와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적어도 내게 만은 불길한 생각
이 엄습하고 있었다. 캐서린이 폴리에스테르 우동 그릇을 휴지통 속에다 던져 넣으며 운
전병에게로 다가간다.
[미스터 박, 차 어디다 파킹했죠?]
[저쪽 .]
파킹장을 돌아다보던 미스터 박이라는 한국인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일어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캐서린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우리 쪽으로
걸어온다.
[화가 많이 났었잖아요. 제 성에 못이겨 객기를 부리는 거겠죠.]
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사태라고 모두들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최목사도 기우인 쪽으
로 몰아가려고 했다.
[길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로 갔을라구요.]
캐서린이 잽싸게 말한다.
[분명히 두군데 중에 한 곳엘 갔을 거예요 . 용산 기지나 우리가 갔었던 백사장 마을 .]
최목사와 내가 캐서린을 바라본다.
[스티븐은 한 번 갔던 길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아요 . 그곳이 지구 어느 곳이라고 해
도 .]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고 있었다.
[30분쯤 기다렸다가 그래도 나타나지 않으면 두 파트로 나누어서 찾아보자구요 .]
그러나 30분이 아니라 1시간이 지나도 예상대로 스티븐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병사들은 한결같이 다시 납골당으로 가기를 꺼려하는 눈치였고 이구동성으로 스티븐이
서울로 돌아갔을 거란 편한 단정을 내리기에 바빴다. 마침내 병사들은 나와 최목사, 그리
고 캐서린과 탑차의 운전병만 남겨둔 채 서울을 향해서 떠나고 저녁이 되어도 서울로부터
오는 소식은 스티븐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들이었다. 캐서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와 최목사를 바라본다.
[우리도 그만 돌아가자구요 .]
[스티븐은요?]
내가 천천히 묻는다.
[뭐, 설마 죽기까지 하겠어요?]
캐서린이 휴게실 밖으로 나가고 그녀를 바라보던 우리 두 사람도 그녀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어두워진 겨울 초저녁 바람이 폐부 깊숙히에 와서 박힌다. 내가 다가가서 캐서
린의 팔을 잡는다.
[가봅시다. 이대로 돌아간다고 맘 편안한 것도 아니구 .]
캐서린이 또렷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최목사도 나를 거든다.
[그래요, 우리 가봅시다.]
차는 다시 어둠 속을 달리며 삽교호 방조제를 지나고 있었다. 탑 차 안은 6대의 모니터
를 통해서 브리티쉬 재즈 락의 끈끈한 진수를 들려주는 <피와 땀과 눈물>의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당신을 사랑해>가 라이브 공연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보칼리스트가 내뿜는 파워풀한 목소리와 간만에 들어보는 현란
한 재즈 오르간의 애드립은 기계들로만 가득 채워진 탑차 안을 그나마 따스한 목소리로
웅성거리며 기어다니고 있었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 일행은 다시 그놈의 지겨운 납골당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신
기하게도 마을은 쥐죽은듯 조용했고 모두들 문을 잠그고 일찍부터 잠자리에 든 게 분명
했다. 차가운 겨울 바람만이 적막한 마을을 휩쓸고 있었다.
검붉은 성황당 나무 위에 내린 하얀 눈송이들이 바람에 우르르 몸을 떨면서 하얀 눈가루들
을 일으킨다. 우리가 납골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밟히는 눈소리와 함께 이가
시린 듯한 공포가 무릎으로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납골당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스티븐이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납골당의 뻥 뚫린 중앙에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스티븐
의 괴물같은 절규가 밤하늘로 마구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절규를 향해서 천천히 다가가던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엄청나게 큰 기하학적
인 도형의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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