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제3장 - 강호출도(江湖出道) 2
독로무한
7화. 제3장 - 강호출도(江湖出道) 2
아침에 일찍 출발한 덕에 오후 무렵, 몽뇌산은 며칠 전 몸을 내렸던 나루터에 다시 발을 딛고 있었다.
남쪽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북쪽으로 올라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추울 텐데……’
생각만으로도 피부에 소름이 쫙 돋았다.
사 년 동안 따뜻하다 못해 어떤 날은 더워서 죽을 것 같은 곳에서 살다가 이 무슨 비극적인 경우인가?
애꿎은 길가의 돌만 툭툭 차던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나루터에 배가 도착하고 있었다.
짐을 내리고 그 다음에 몸을 내리는 사람, 몸 먼저 내리고 짐을 끌어내리는 사람, 몸과 짐을 동시에 내리는 사람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로 인해 나루터는 삽시간에 장터로 변했다.
몽뇌산은 최대한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뚫고 배로 다가갔.
“빨리 타시오. 곧 떠납니다.”
사공이 외치는 소리가 뒤늦게 나루터에 도착한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했다.
뒷사람이 밀치고 지나는 바람에 휘청하고 옆으로 밀린 몽뇌산은 마주오던 사람과 어깨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아얏!”
부딪친 어깨가 시큰하게 아파 오는 것은 몽뇌산에게만 한정된 일인지 비명은 그의 입에서만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몽뇌산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어느새 휘청이는 신형을 빠르게 안정시킨 상대편을 쳐다보았다.
검은 방갓을 깊숙이 내려쓰고 현의(玄衣)를 입은 그 인물은 송곳 같은 눈빛으로 몽뇌산을 쏘아보고 있었다.
음산한 눈빛!
상당히 기분 나쁜 자였다.
검은 방갓에서 풍겨 나오는 스산한 기운도 그랬고 방갓 아래로 보이는 창백한 아래턱도 비정 냉혹한 느낌을 강하게 심어 주고 있었다.
‘이자는 뭔가 느낌이 다르다. 피 냄새가 나는 자로군!’
몽뇌산은 현의인을 깊숙한 눈빛으로 빠르게 훑었다.
순간, 현의인의 눈빛이 유리알처럼 번뜩였다.
현의인의 전신에서 밤안개처럼 음습(陰濕)한 기운이 소리없이 뻗어 나와 몽뇌산을 휘감았다.
몽뇌산은 온몸에 축축이 와 닿는 현의인의 살기를 느끼자 암중(暗中)으로 공력을 일으켰다.
일촉즉발(一促卽發)의 순간,
“시간이 없다.”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현의인의 차가운 한마디가 팽팽하게 조여진 긴장의 끈을 탁 끊어 놓았다.
현의인은 살기를 갈무리한 눈으로 몽뇌산을 다시 한 번 쏘아보더니 빠르게 나루터를 벗어났다.
몽뇌산은 쌍둥이처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현의인들 일곱이 저만치 사라지는 걸 한참 동안 지켜보고 서 있었다.
왠지 기분이 찜찜했다.
막 떠나려는 배를 붙잡아 올라타면서도 그러한 기분은 떨쳐지지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휘말린 건가?’
몽뇌산은 마음을 가볍게 하려고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를 태운 배는 바람을 타고 쭉쭉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몽뇌산의 마음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 * *
감진택은 적막감(寂寞感)만이 가득 찬 집에 다시 홀로 남게 되었다.
그는 문득 방 한 귀퉁이에 놓여진 궤짝을 끌어당겼다. 몽뇌산에게 들려 보낸 옥합이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문주 자리를 물려받은 이래 지난 이십이 년간 자리조차 움직여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동백나무로 짠 궤짝 곳곳의 쇠로 된 이음새들은 붉게 녹이 슬어 있었다.
감진택은 낡은 책들이 쌓여 있는 궤짝의 밑바닥을 들쳐 양피지로 된 한 치 두께의 책자를 하나 꺼냈다.
책자에는 서명(書名)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세월의 무게를 말해 주듯 닳아 빠진 책자의 네 귀퉁이만이 사람의 손을 여러 번 탔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결코 평범한 세월을 지내 온 것 같지 않은, 사연이 있음 직한 책자였다.
감진택은 감회 어린 눈으로 책자를 펼쳤다.
얼른 보아서는 그냥 이름없는 무공비급인가 했는데 의외로 그 책자의 내용은 마치 누군가의 일기(日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십이월(十二月) 이십팔일(二十八日).
끈적거리는 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십이월이라는 말을 적으려니 문득 의미없는 웃음이 떠오른다.
이곳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묘족(苗族)인 것 같았는데 더듬거리긴 했지만 한어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
이곳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자 헤어날 수 없는 절망만이 깊어졌다.
이 지긋지긋한 밀림을 빠져 나갈 길을 묻는 나에게 검게 그을린 얼굴 가득 주름과 검버섯이 뒤덮인 그 묘족노인은 그냥
고개만 저었다.
늙어서 흐릿해진 두 눈동자에는 젊은 이방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만을 가득 담고서!
우기(雨期)에는 누구도 밀림을 빙 둘러싼 늪을 빠져 나갈 수 없단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은 원시림 사이로 조각조각 보이는 하늘이 너무나 파랗다. 저러다가
금세 먹물처럼 어두워지고 회색빛 비를 쏟아 부으리라.
언제부터인지 내 손바닥을 물들이는 색깔을 보는 것 같아 파란 저 하늘은 쳐다보기조차 끔찍하다.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고향 생각에 더욱 참담한 마음이 든
태호(太湖) 가에서 가을 햇살에 투명히 부서지는 물빛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시를 읊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오늘따라 가슴에 사무친다.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감진택은 책에서 얼굴을 들었다.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절절히 묻어 나오는 외로움과 절망
감진택은 고향을 그리며 참담한 마음으로 묘강 땅의 파란 하늘을 애써 외면했을 유진상 대사조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아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원치 않는 길에 접어든 젊은 유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의 절망과 분노가 얼마나 깊었을까?
한편으론 친우(親友)들과 더불어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문(文)을 사랑했던 젊은 유생!
다른 한편으론 독중지성에 근접하여 강호의 무수한 인물들이 그를 추종, 결국에는 천독문이라는 방파까지 그에게 만들어 바쳤던 경외의 대상!
끝끝내 천독문을 외면했던 절대독유 유진상 대사조의 마음속에 담겨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죽는 날까지 자신을 독의 길에 들게 한 하늘을 원망했을
“휴우우`─`”
감진택은 까닭 모를 서글픔에 긴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드는 그의 뇌리에 문득 투덜대면서 길을 가고 있을 몽뇌산의 모습이 떠올랐다.
감진택은 심란해진 마음을 가다듬으며 손 안에 들린 책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묘강에서 약간의 성과라도 얻는다면 언젠가 몽뇌산도 이 책자를 들고 묘강 땅을 밟아야 하리라.
감진택은 책의 겉장을 주름진 손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졌
막 책을 다시 궤짝에 넣으려던 감진택의 눈에서 불현듯 뇌전(雷電)과 같은 안광이 번뜩였다.
밖에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단순한 동물의 기척이 아니었다.
방안으로 쏟아지는 일몰(日沒)의 불그스레한 양광(陽光) 속에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기운이 섞여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 중에서도 무림인만이 낼 수 있는 기운!
그것은 바로 살기였다.
“밖에 누구냐?”
냉랭한 외침보다 먼저 그의 손이 방문을 열어제치는 순간, 정면과 좌우, 세 곳에서 폭풍 같은 도세(刀勢)가 밀어닥쳤다.
미리 예상했다는 듯이 감진택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몸을 뒤로 눕힘과 동시에 품에서 환혼침(還魂針) 세 개를 꺼내 상대에게 뿌렸다.
끝이 녹색으로 번들거리는 세침이 허공을 빛살처럼 날아 상대의 미간으로 성큼 다가섰다.
쑤아아`─`!
감진택의 요혈(要血)을 노리던 세 자루의 도가 급격히 선회(旋回)하며 환혼침을 막아 갔다.
따땅!
암기 정도로는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던지 세침들은 적의 도에 부딪혀 분분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사이에 감진택은 바닥에 닿을 듯이 젖혔던 몸을 용수철처럼 튕기며 허공으로 도약해서 이미 마당에 내려서고 있었다.
“네놈들은 누구……?”
도에서 탁한 묵기(墨氣)를 뽑아 올리며 그를 향해 몸을 날리는 흑립(黑笠)의 현의인들에게 싸늘히
소리치던 감진택의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여기도 있다.”
감진택은 뒷목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벼락같이 몸을 돌렸
돌아선 그의 쌍장에서 푸르스름한 물빛 기운이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더니 질풍 같은 기세로 허공을 꿰뚫었다.
“독장(毒掌)! 정면으로 부딪치지 마라!”
뒤에서 공격해 오던 현의인들 중 누군가가 그 푸르스름한 장영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대경해서 외쳤다.
도를 들고 짖쳐 오던 네 명의 현의인들이 도기를 일으켜 감진택의 독장으로부터 전신을 보호함과 동시에 좌우로 빗살처럼 갈라섰다.
감진택은 예사롭지 않은 그들의 몸놀림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늙었는가!’
눈앞의 적을 신경 쓰느라 뒤에 있는 적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데서 오는 씁쓸함이 가슴을 물들였다.
하긴, 남과 싸워 본 지가 언제인지도 까마득하니……
“너희 둘은 방을 뒤지고 나머지는 그를 사로잡아라.”
소매 한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황금뱀 한 마리가 수놓아진 현의를 입고 있던 자가 나직하게 외쳤다.
수뇌로 보이는 현의인의 입에서 일말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다른 현의인 둘이
재빨리 방으로 몸을 날렸고 나머지는 아까보다 더한 기세로
감진택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방에 들어갔던 자들이 나와 고개를 흔들더니 곧 다시 싸움에 합류했다.
감진택은 의도적으로 사혈(死穴)을 피해 가는 현의인들의 공격에 분노가 치밀었다. 차갑게 메말라 있던 가슴속에서 뜨거운 전의(戰意)가 불타 올랐다.
감진택은 가장 먼저 쇄도한 정면의 두 도의 검은 도신을 사왕권으로 쳐내며 좌측으로
몸을 돌려 만청독수의 제삼수(第三手) 독화비천(毒花飛天)과
제사수(第四手) 화우진천(花雨震天)을 연거푸 뿌렸다.
“물러나라!”
수뇌의 외침과 동시에 현의인들이 분분히 호흡을 멈추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 중 뒤늦게 물러서던 현의인 한 명이 칠공으로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다른
한 명은 감진택의 장력을 막아 내다 도신을
타고 흐른 독기에 침범당했는지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전권(戰圈)에서 물러난 그 현의인의 도가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 가는가 싶더니 그대로 오른팔을 쳐갔다.
순식간에 그의 우수가 날아갔다. 노을보다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끊어진 팔이 땅바닥에서 꿈틀거리는데도 현의인은 신음 소리 하나 없이 신속하게 지혈(止血)을 하고 곧바로 장내에 뛰어들었다.
정말 섬뜩할 정도의 독심(毒心)이었다.
감진택은 소리없이 치를 떨었다.
지독한 자들이었다.
저 정도의 판단력과 실행력을 보이려면 웬만한 훈련으론 어림도 없었다.
군명, 그 친구가 그처럼 신경을 쓰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비록 현의인들에게 직접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저들이 무슨 일로 자기를 찾아왔는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감진택은 이번 일에 몽뇌산을 보내기로 한 결정에 새삼 안도를 느꼈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선뜻 이길 확신이 서지 않는 싸움에 감진택의 마음은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 하건만 상황은 그에게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감진택은 쉴새없이 쌍수를 휘둘렀다. 적들은 독기를 피해 교묘히 물러났다가 돌아가며 산발적인 공격을 해왔다.
육 대 일의 싸움은 서서히 감진택에게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 동안 실전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도 감진택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감진택은 만청독수를 서너 차례 뿌린 후 정면에서 다가드는 현의인의 음사한 묵빛 도기를 맞아 갔다.
적들의 수뇌로 보이는 그의 실력은 과연 다른 현의인들과는 명확하게 차이가 나서 일 대 일로 겨루어도 족히 오백 초는 지나야 승부가 날 것 같았다.
무려 다섯 자나 뻗어 나오는 검은 도기를 보며 감진택은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입술을 비집고 절로 흘러나오는 가쁜 숨소리를 억지로 참으며 감진택은 노을빛을 받아 검붉은 피 색깔처럼 보이는 현의인의 묵도를 전력을 기울인 사왕권으로 힘껏 내갈겼다.
터어엉`─`!
도신이 휘청이며 좌측으로 눕더니 이내 방향을 틀어 다시 감진택의 허벅지께를 베어 왔다.
우로 일보 내딛음과 동시에 감진택은 만청독수의 제육수 독성멸천(毒星滅天)을 적의 가슴팍에 내질렀다.
그의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유성(流星)과 같은 기운이 하나로 모이더니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현의인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아니, 작렬하기 직전, 재빨리 회수된 현의인의 도가 무수한 도영(刀影)을 만들며 감진택의 일수와 충돌했다.
퍼어엉`─`!
기와 기의 충돌은 굉장했다.
투명한 청빛과 탁한 묵빛이 한데 어우러져 미친 듯이 대기(大氣)를 말아 올렸다.
마당의 마른 잡초와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한 줄기 묵직한 신음성과 함께 지면이 들썩거렸다.
“으음`─`!”
쿠당탕!
가라앉은 먼지 사이로 옆구리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감진택과 저만치로 나가떨어지는 외팔이 현의인의 모습이 보였다.
쓰러진 그 외팔이 현의인 주변의 땅이 금세 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붉은 피가 좌측 옆구리를 움켜쥔 감진택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본래 우두머리 현의인과 충돌한 직후 곧바로 다시 일격을 날리려던 감진택은 그의 독장에 맞아 팔을 자른 현의인의 기습적인 일도에 맞고 말았다.
다른 적들보다 그에 대해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 실수였다.
비록 우두머리 현의인에게 뿌리려던 만청독수를 내치며 재빨리 물러나 상처가 그렇게까지 깊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 운신(運身)이 불편해진 것은 지금 상황에선 치명타에 가까웠
지혈을 할 새도 없이 현의인들의 공격이 밀어닥쳤다.
감진택은 쌍수를 들어올리다 말고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을 움찔했다.
쑤아아`─`!
그 순간을 노렸음인가?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매서운 도세가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일순간의 머뭇거림으로 공격의 기회를 놓친 감진택이 정신없이 물러서는 순간……
장원의 담장을 넘어 해일(海溢) 같은 기세로 밀어닥치는 일단의 인물들이 있었다.
“물러서라`─`!”
일제히 적의(赤衣)를 차려입고 붉은 수실이 매달린 검을 손에 든 그들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 *
사막을 휩쓸고 가는 모래폭풍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닥친 적의복면인들의 실력은 정말 놀라웠다.
그를 습격한 현의인들 무리도 강호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무위를 지닌 고수들이었는데
적의인들의 능력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개개인이 겨룬다면 막상막하(莫上莫下)의 실력이겠으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적의인들의 수가 두 배 가까이 많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각 수뇌의 무공도 감진택이 보기엔 적의인들 쪽이 한두 초 정도 우위에 있는 것 같았다.
말이 한두 초지 실제로 고수 간의 싸움에선 불과 반 초식 차이로 승패가 결정나는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그러니 지금과 같이 본신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기 힘든 다수의 싸움에선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감진택의 생각대로, 금사(金蛇)가 새겨진 현의를 입은 인물이 기이한 휘파람 소리와
함께 살아남은 두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천독문의 담장을 넘어 사라지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감진택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지혈을 하고 나서 몸을 똑바로 세운 그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저들의 정체야 대강 짐작하는 바가 있었지만 무림의 일이란 모름지기 확실히 해둘수록 장수(長壽)에
지장이 없게 마련이었다.
겉으로 보아 언뜻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알 수 없는 감진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가슴팍에 검은
호랑이를 수놓은 적의복면인이 무게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태산이 밀려오는 듯 호흡을 가쁘게 하는 기도가 적의인의 족인(足印)을 따라왔다.
감진택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상당히 패도적인 기운을 풍겨 내는 인물이로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자유로운 오른손에 서서히 공력을 끌어모으며 감진택은 냉정한 눈빛으로 적의인을 주시했다.
“감 문주, 감진택 문주이십니까?”
적의인이 가슴팍의 흑호(黑虎) 못지않은 호안(虎眼)을 서늘하게 빛내며 굵직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만약 아니라면 그에 합당한 조치를 금방이라도 취하겠다는 듯 그의 전신도 팽팽한 긴장 상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감진택은 뱃속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적의인을 가만히 쏘아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노부가 바로 감진택이오.”
“이 몸이 듣기로 감 문주께선 독공의 대가(大家)라 하시던데……”
말인즉슨 네 신분을 증명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감진택은 우수를 들어올려 팔(八) 장(丈) 가량 떨어진 담벼락을 향해 인사하듯 손을 흔들었다.
퍼억`─`!
흙더미 눌리는 소리와 함께 돌로 만든 담벼락에 세 치 정도의 장인이 움푹 찍혔다.
복면 밖으로 드러난 적의인의 눈동자에 미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언뜻 푸르스름한 기운이 눈앞에 희끄무레하게 번뜩인다 싶었는데 저러한 위력을 보일 줄이야!
적의복면인이 그제서야 정중하게 허리를 접었다.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군요. 어쨌거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제 신분은 주군
휘하의 적전단주(赤戰團主)입니다.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감
문주께서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다면 저희에게 감 문주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적들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빨라, 방금도 보셨겠지만 이미 이곳은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저들이 일시적으로 물러갔다 하나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언제 적들의 지원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므로 대강 중요한 물건만 챙겨 저희와 함께 떠나시지요. 물론 저희 주군께서 맡기신
그 물건은 잘 지니고 계시겠지요?”
적의복면인, 적전단주가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는 눈빛으로 감진택을 빤히 쳐다보았다.
감진택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놀란 적전단주의 입이 달싹거리려는 찰나, 감진택은 차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 물건은 내 제자를 시켜서 이미 개봉으로 보냈소.”
감진택의 전음(傳音)에 적전단주의 눈동자가 곧 긴장에서 해방되었다.
“제자 분의 무공은……? 물론 주군께서 안배하신 호법(護法)들이 있는만큼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전음으로 조심스레 물어 오는 적전단주의 눈빛엔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감진택은 덤덤하게 입을 열어 답했다.
“제 한 몸은 충분히 돌볼 수 있으니 걱정 마시오. 안에서 몇 가지 챙겨가지고 나올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소?”
“그러지요.”
적전단주는 수하들에게 주위를 경계하란 신호를 보내고는 안으로 들어선 감진택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감진택은 궤짝에서 진천독경과 천독술해를 꺼내 챙기고 나서 대사조의 일기가 적힌 책자를 마저 품에 넣었다.
천독문에서 만든 중요한 독들은 모두 그와 몽뇌산만이 아는 안전한 장소에 들어 있으니 그대로 두고 가도 될 것 같았다.
“이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레 사문을 비우시게 되어 마음이 어지러우실 것이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방문 앞에 선 적전단주의 묵직한 음성을 감진택은 짧은 고갯짓으로 가로막았다.
“다되었소. 아, 잠시만 더 기다려 주겠소?”
막 방을 나서려던 감진택이 발길을 멈췄다.
“무슨 일이신지…… 그자들의 추격을 피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적전단주가 나지막하게 상황을 일깨웠다.
“알고 있소. 그러나 그대의 주군이 있는 곳에 가면 당분간 외부와 연락을 끊게 될 것 같기에 제자에게
간단한 서찰이라도 남겨 놓았으면 하오.”
“그건 좀…… 적에게 행적을 노출시킬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적전단주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과 나만 아는 비밀장소에 남겨도 안 되겠소?”
“정히 그러시다면 장소는 언급하지 마시고 짧게 쓰십시오.”
감진택은 고맙다는 눈빛으로 적전단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서둘러서 붓을 들어 한마디 적으려다 말고 감진택은 별안간 그냥 몸을 일으켰다.
“아니, 안 적으실 겁니까?”
적전단주의 눈동자에 의아스러운 기색이 매달렸다.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도 같구려. 다 큰 녀석이니 알아서 처신하겠지. 자, 출발합시다.”
감진택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더니 앞장서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소사곡으로 내려가기 전, 떨리는 눈빛으로 아주 잠시 천독문이라고 쓰인 현판을 올려다본 감진택은 이내
걸음을 빨리 하여 곡 아래로 비호(飛虎)처럼 내려갔다.
그의 뒤를 적전단주 이하 적의인들이 민첩하게 호위하며 썰물처럼 곡을 벗어났다.
옆에 나란히 선 적전단주의 옷자락 날리는 소리를 흘려 들으며 감진택은 무수한 상념에 잠긴 채 점점 천독문과 멀어지고 있었다.
7화. 제3장 - 강호출도(江湖出道) 2
아침에 일찍 출발한 덕에 오후 무렵, 몽뇌산은 며칠 전 몸을 내렸던 나루터에 다시 발을 딛고 있었다.
남쪽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북쪽으로 올라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추울 텐데……’
생각만으로도 피부에 소름이 쫙 돋았다.
사 년 동안 따뜻하다 못해 어떤 날은 더워서 죽을 것 같은 곳에서 살다가 이 무슨 비극적인 경우인가?
애꿎은 길가의 돌만 툭툭 차던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나루터에 배가 도착하고 있었다.
짐을 내리고 그 다음에 몸을 내리는 사람, 몸 먼저 내리고 짐을 끌어내리는 사람, 몸과 짐을 동시에 내리는 사람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로 인해 나루터는 삽시간에 장터로 변했다.
몽뇌산은 최대한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뚫고 배로 다가갔.
“빨리 타시오. 곧 떠납니다.”
사공이 외치는 소리가 뒤늦게 나루터에 도착한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했다.
뒷사람이 밀치고 지나는 바람에 휘청하고 옆으로 밀린 몽뇌산은 마주오던 사람과 어깨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아얏!”
부딪친 어깨가 시큰하게 아파 오는 것은 몽뇌산에게만 한정된 일인지 비명은 그의 입에서만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몽뇌산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어느새 휘청이는 신형을 빠르게 안정시킨 상대편을 쳐다보았다.
검은 방갓을 깊숙이 내려쓰고 현의(玄衣)를 입은 그 인물은 송곳 같은 눈빛으로 몽뇌산을 쏘아보고 있었다.
음산한 눈빛!
상당히 기분 나쁜 자였다.
검은 방갓에서 풍겨 나오는 스산한 기운도 그랬고 방갓 아래로 보이는 창백한 아래턱도 비정 냉혹한 느낌을 강하게 심어 주고 있었다.
‘이자는 뭔가 느낌이 다르다. 피 냄새가 나는 자로군!’
몽뇌산은 현의인을 깊숙한 눈빛으로 빠르게 훑었다.
순간, 현의인의 눈빛이 유리알처럼 번뜩였다.
현의인의 전신에서 밤안개처럼 음습(陰濕)한 기운이 소리없이 뻗어 나와 몽뇌산을 휘감았다.
몽뇌산은 온몸에 축축이 와 닿는 현의인의 살기를 느끼자 암중(暗中)으로 공력을 일으켰다.
일촉즉발(一促卽發)의 순간,
“시간이 없다.”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현의인의 차가운 한마디가 팽팽하게 조여진 긴장의 끈을 탁 끊어 놓았다.
현의인은 살기를 갈무리한 눈으로 몽뇌산을 다시 한 번 쏘아보더니 빠르게 나루터를 벗어났다.
몽뇌산은 쌍둥이처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현의인들 일곱이 저만치 사라지는 걸 한참 동안 지켜보고 서 있었다.
왠지 기분이 찜찜했다.
막 떠나려는 배를 붙잡아 올라타면서도 그러한 기분은 떨쳐지지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휘말린 건가?’
몽뇌산은 마음을 가볍게 하려고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를 태운 배는 바람을 타고 쭉쭉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몽뇌산의 마음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 * *
감진택은 적막감(寂寞感)만이 가득 찬 집에 다시 홀로 남게 되었다.
그는 문득 방 한 귀퉁이에 놓여진 궤짝을 끌어당겼다. 몽뇌산에게 들려 보낸 옥합이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문주 자리를 물려받은 이래 지난 이십이 년간 자리조차 움직여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동백나무로 짠 궤짝 곳곳의 쇠로 된 이음새들은 붉게 녹이 슬어 있었다.
감진택은 낡은 책들이 쌓여 있는 궤짝의 밑바닥을 들쳐 양피지로 된 한 치 두께의 책자를 하나 꺼냈다.
책자에는 서명(書名)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세월의 무게를 말해 주듯 닳아 빠진 책자의 네 귀퉁이만이 사람의 손을 여러 번 탔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결코 평범한 세월을 지내 온 것 같지 않은, 사연이 있음 직한 책자였다.
감진택은 감회 어린 눈으로 책자를 펼쳤다.
얼른 보아서는 그냥 이름없는 무공비급인가 했는데 의외로 그 책자의 내용은 마치 누군가의 일기(日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십이월(十二月) 이십팔일(二十八日).
끈적거리는 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십이월이라는 말을 적으려니 문득 의미없는 웃음이 떠오른다.
이곳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묘족(苗族)인 것 같았는데 더듬거리긴 했지만 한어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
이곳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자 헤어날 수 없는 절망만이 깊어졌다.
이 지긋지긋한 밀림을 빠져 나갈 길을 묻는 나에게 검게 그을린 얼굴 가득 주름과 검버섯이 뒤덮인 그 묘족노인은 그냥
고개만 저었다.
늙어서 흐릿해진 두 눈동자에는 젊은 이방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만을 가득 담고서!
우기(雨期)에는 누구도 밀림을 빙 둘러싼 늪을 빠져 나갈 수 없단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은 원시림 사이로 조각조각 보이는 하늘이 너무나 파랗다. 저러다가
금세 먹물처럼 어두워지고 회색빛 비를 쏟아 부으리라.
언제부터인지 내 손바닥을 물들이는 색깔을 보는 것 같아 파란 저 하늘은 쳐다보기조차 끔찍하다.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고향 생각에 더욱 참담한 마음이 든
태호(太湖) 가에서 가을 햇살에 투명히 부서지는 물빛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시를 읊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오늘따라 가슴에 사무친다.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감진택은 책에서 얼굴을 들었다.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절절히 묻어 나오는 외로움과 절망
감진택은 고향을 그리며 참담한 마음으로 묘강 땅의 파란 하늘을 애써 외면했을 유진상 대사조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아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원치 않는 길에 접어든 젊은 유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의 절망과 분노가 얼마나 깊었을까?
한편으론 친우(親友)들과 더불어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문(文)을 사랑했던 젊은 유생!
다른 한편으론 독중지성에 근접하여 강호의 무수한 인물들이 그를 추종, 결국에는 천독문이라는 방파까지 그에게 만들어 바쳤던 경외의 대상!
끝끝내 천독문을 외면했던 절대독유 유진상 대사조의 마음속에 담겨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죽는 날까지 자신을 독의 길에 들게 한 하늘을 원망했을
“휴우우`─`”
감진택은 까닭 모를 서글픔에 긴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드는 그의 뇌리에 문득 투덜대면서 길을 가고 있을 몽뇌산의 모습이 떠올랐다.
감진택은 심란해진 마음을 가다듬으며 손 안에 들린 책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묘강에서 약간의 성과라도 얻는다면 언젠가 몽뇌산도 이 책자를 들고 묘강 땅을 밟아야 하리라.
감진택은 책의 겉장을 주름진 손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졌
막 책을 다시 궤짝에 넣으려던 감진택의 눈에서 불현듯 뇌전(雷電)과 같은 안광이 번뜩였다.
밖에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단순한 동물의 기척이 아니었다.
방안으로 쏟아지는 일몰(日沒)의 불그스레한 양광(陽光) 속에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기운이 섞여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 중에서도 무림인만이 낼 수 있는 기운!
그것은 바로 살기였다.
“밖에 누구냐?”
냉랭한 외침보다 먼저 그의 손이 방문을 열어제치는 순간, 정면과 좌우, 세 곳에서 폭풍 같은 도세(刀勢)가 밀어닥쳤다.
미리 예상했다는 듯이 감진택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몸을 뒤로 눕힘과 동시에 품에서 환혼침(還魂針) 세 개를 꺼내 상대에게 뿌렸다.
끝이 녹색으로 번들거리는 세침이 허공을 빛살처럼 날아 상대의 미간으로 성큼 다가섰다.
쑤아아`─`!
감진택의 요혈(要血)을 노리던 세 자루의 도가 급격히 선회(旋回)하며 환혼침을 막아 갔다.
따땅!
암기 정도로는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던지 세침들은 적의 도에 부딪혀 분분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사이에 감진택은 바닥에 닿을 듯이 젖혔던 몸을 용수철처럼 튕기며 허공으로 도약해서 이미 마당에 내려서고 있었다.
“네놈들은 누구……?”
도에서 탁한 묵기(墨氣)를 뽑아 올리며 그를 향해 몸을 날리는 흑립(黑笠)의 현의인들에게 싸늘히
소리치던 감진택의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여기도 있다.”
감진택은 뒷목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벼락같이 몸을 돌렸
돌아선 그의 쌍장에서 푸르스름한 물빛 기운이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더니 질풍 같은 기세로 허공을 꿰뚫었다.
“독장(毒掌)! 정면으로 부딪치지 마라!”
뒤에서 공격해 오던 현의인들 중 누군가가 그 푸르스름한 장영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대경해서 외쳤다.
도를 들고 짖쳐 오던 네 명의 현의인들이 도기를 일으켜 감진택의 독장으로부터 전신을 보호함과 동시에 좌우로 빗살처럼 갈라섰다.
감진택은 예사롭지 않은 그들의 몸놀림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늙었는가!’
눈앞의 적을 신경 쓰느라 뒤에 있는 적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데서 오는 씁쓸함이 가슴을 물들였다.
하긴, 남과 싸워 본 지가 언제인지도 까마득하니……
“너희 둘은 방을 뒤지고 나머지는 그를 사로잡아라.”
소매 한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황금뱀 한 마리가 수놓아진 현의를 입고 있던 자가 나직하게 외쳤다.
수뇌로 보이는 현의인의 입에서 일말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다른 현의인 둘이
재빨리 방으로 몸을 날렸고 나머지는 아까보다 더한 기세로
감진택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방에 들어갔던 자들이 나와 고개를 흔들더니 곧 다시 싸움에 합류했다.
감진택은 의도적으로 사혈(死穴)을 피해 가는 현의인들의 공격에 분노가 치밀었다. 차갑게 메말라 있던 가슴속에서 뜨거운 전의(戰意)가 불타 올랐다.
감진택은 가장 먼저 쇄도한 정면의 두 도의 검은 도신을 사왕권으로 쳐내며 좌측으로
몸을 돌려 만청독수의 제삼수(第三手) 독화비천(毒花飛天)과
제사수(第四手) 화우진천(花雨震天)을 연거푸 뿌렸다.
“물러나라!”
수뇌의 외침과 동시에 현의인들이 분분히 호흡을 멈추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 중 뒤늦게 물러서던 현의인 한 명이 칠공으로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다른
한 명은 감진택의 장력을 막아 내다 도신을
타고 흐른 독기에 침범당했는지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전권(戰圈)에서 물러난 그 현의인의 도가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 가는가 싶더니 그대로 오른팔을 쳐갔다.
순식간에 그의 우수가 날아갔다. 노을보다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끊어진 팔이 땅바닥에서 꿈틀거리는데도 현의인은 신음 소리 하나 없이 신속하게 지혈(止血)을 하고 곧바로 장내에 뛰어들었다.
정말 섬뜩할 정도의 독심(毒心)이었다.
감진택은 소리없이 치를 떨었다.
지독한 자들이었다.
저 정도의 판단력과 실행력을 보이려면 웬만한 훈련으론 어림도 없었다.
군명, 그 친구가 그처럼 신경을 쓰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비록 현의인들에게 직접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저들이 무슨 일로 자기를 찾아왔는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감진택은 이번 일에 몽뇌산을 보내기로 한 결정에 새삼 안도를 느꼈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선뜻 이길 확신이 서지 않는 싸움에 감진택의 마음은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 하건만 상황은 그에게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감진택은 쉴새없이 쌍수를 휘둘렀다. 적들은 독기를 피해 교묘히 물러났다가 돌아가며 산발적인 공격을 해왔다.
육 대 일의 싸움은 서서히 감진택에게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 동안 실전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도 감진택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감진택은 만청독수를 서너 차례 뿌린 후 정면에서 다가드는 현의인의 음사한 묵빛 도기를 맞아 갔다.
적들의 수뇌로 보이는 그의 실력은 과연 다른 현의인들과는 명확하게 차이가 나서 일 대 일로 겨루어도 족히 오백 초는 지나야 승부가 날 것 같았다.
무려 다섯 자나 뻗어 나오는 검은 도기를 보며 감진택은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입술을 비집고 절로 흘러나오는 가쁜 숨소리를 억지로 참으며 감진택은 노을빛을 받아 검붉은 피 색깔처럼 보이는 현의인의 묵도를 전력을 기울인 사왕권으로 힘껏 내갈겼다.
터어엉`─`!
도신이 휘청이며 좌측으로 눕더니 이내 방향을 틀어 다시 감진택의 허벅지께를 베어 왔다.
우로 일보 내딛음과 동시에 감진택은 만청독수의 제육수 독성멸천(毒星滅天)을 적의 가슴팍에 내질렀다.
그의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유성(流星)과 같은 기운이 하나로 모이더니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현의인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아니, 작렬하기 직전, 재빨리 회수된 현의인의 도가 무수한 도영(刀影)을 만들며 감진택의 일수와 충돌했다.
퍼어엉`─`!
기와 기의 충돌은 굉장했다.
투명한 청빛과 탁한 묵빛이 한데 어우러져 미친 듯이 대기(大氣)를 말아 올렸다.
마당의 마른 잡초와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한 줄기 묵직한 신음성과 함께 지면이 들썩거렸다.
“으음`─`!”
쿠당탕!
가라앉은 먼지 사이로 옆구리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감진택과 저만치로 나가떨어지는 외팔이 현의인의 모습이 보였다.
쓰러진 그 외팔이 현의인 주변의 땅이 금세 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붉은 피가 좌측 옆구리를 움켜쥔 감진택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본래 우두머리 현의인과 충돌한 직후 곧바로 다시 일격을 날리려던 감진택은 그의 독장에 맞아 팔을 자른 현의인의 기습적인 일도에 맞고 말았다.
다른 적들보다 그에 대해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 실수였다.
비록 우두머리 현의인에게 뿌리려던 만청독수를 내치며 재빨리 물러나 상처가 그렇게까지 깊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 운신(運身)이 불편해진 것은 지금 상황에선 치명타에 가까웠
지혈을 할 새도 없이 현의인들의 공격이 밀어닥쳤다.
감진택은 쌍수를 들어올리다 말고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을 움찔했다.
쑤아아`─`!
그 순간을 노렸음인가?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매서운 도세가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일순간의 머뭇거림으로 공격의 기회를 놓친 감진택이 정신없이 물러서는 순간……
장원의 담장을 넘어 해일(海溢) 같은 기세로 밀어닥치는 일단의 인물들이 있었다.
“물러서라`─`!”
일제히 적의(赤衣)를 차려입고 붉은 수실이 매달린 검을 손에 든 그들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 *
사막을 휩쓸고 가는 모래폭풍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닥친 적의복면인들의 실력은 정말 놀라웠다.
그를 습격한 현의인들 무리도 강호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무위를 지닌 고수들이었는데
적의인들의 능력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개개인이 겨룬다면 막상막하(莫上莫下)의 실력이겠으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적의인들의 수가 두 배 가까이 많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각 수뇌의 무공도 감진택이 보기엔 적의인들 쪽이 한두 초 정도 우위에 있는 것 같았다.
말이 한두 초지 실제로 고수 간의 싸움에선 불과 반 초식 차이로 승패가 결정나는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그러니 지금과 같이 본신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기 힘든 다수의 싸움에선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감진택의 생각대로, 금사(金蛇)가 새겨진 현의를 입은 인물이 기이한 휘파람 소리와
함께 살아남은 두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천독문의 담장을 넘어 사라지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감진택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지혈을 하고 나서 몸을 똑바로 세운 그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저들의 정체야 대강 짐작하는 바가 있었지만 무림의 일이란 모름지기 확실히 해둘수록 장수(長壽)에
지장이 없게 마련이었다.
겉으로 보아 언뜻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알 수 없는 감진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가슴팍에 검은
호랑이를 수놓은 적의복면인이 무게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태산이 밀려오는 듯 호흡을 가쁘게 하는 기도가 적의인의 족인(足印)을 따라왔다.
감진택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상당히 패도적인 기운을 풍겨 내는 인물이로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자유로운 오른손에 서서히 공력을 끌어모으며 감진택은 냉정한 눈빛으로 적의인을 주시했다.
“감 문주, 감진택 문주이십니까?”
적의인이 가슴팍의 흑호(黑虎) 못지않은 호안(虎眼)을 서늘하게 빛내며 굵직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만약 아니라면 그에 합당한 조치를 금방이라도 취하겠다는 듯 그의 전신도 팽팽한 긴장 상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감진택은 뱃속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적의인을 가만히 쏘아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노부가 바로 감진택이오.”
“이 몸이 듣기로 감 문주께선 독공의 대가(大家)라 하시던데……”
말인즉슨 네 신분을 증명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감진택은 우수를 들어올려 팔(八) 장(丈) 가량 떨어진 담벼락을 향해 인사하듯 손을 흔들었다.
퍼억`─`!
흙더미 눌리는 소리와 함께 돌로 만든 담벼락에 세 치 정도의 장인이 움푹 찍혔다.
복면 밖으로 드러난 적의인의 눈동자에 미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언뜻 푸르스름한 기운이 눈앞에 희끄무레하게 번뜩인다 싶었는데 저러한 위력을 보일 줄이야!
적의복면인이 그제서야 정중하게 허리를 접었다.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군요. 어쨌거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제 신분은 주군
휘하의 적전단주(赤戰團主)입니다.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감
문주께서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다면 저희에게 감 문주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적들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빨라, 방금도 보셨겠지만 이미 이곳은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저들이 일시적으로 물러갔다 하나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언제 적들의 지원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므로 대강 중요한 물건만 챙겨 저희와 함께 떠나시지요. 물론 저희 주군께서 맡기신
그 물건은 잘 지니고 계시겠지요?”
적의복면인, 적전단주가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는 눈빛으로 감진택을 빤히 쳐다보았다.
감진택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놀란 적전단주의 입이 달싹거리려는 찰나, 감진택은 차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 물건은 내 제자를 시켜서 이미 개봉으로 보냈소.”
감진택의 전음(傳音)에 적전단주의 눈동자가 곧 긴장에서 해방되었다.
“제자 분의 무공은……? 물론 주군께서 안배하신 호법(護法)들이 있는만큼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전음으로 조심스레 물어 오는 적전단주의 눈빛엔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감진택은 덤덤하게 입을 열어 답했다.
“제 한 몸은 충분히 돌볼 수 있으니 걱정 마시오. 안에서 몇 가지 챙겨가지고 나올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소?”
“그러지요.”
적전단주는 수하들에게 주위를 경계하란 신호를 보내고는 안으로 들어선 감진택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감진택은 궤짝에서 진천독경과 천독술해를 꺼내 챙기고 나서 대사조의 일기가 적힌 책자를 마저 품에 넣었다.
천독문에서 만든 중요한 독들은 모두 그와 몽뇌산만이 아는 안전한 장소에 들어 있으니 그대로 두고 가도 될 것 같았다.
“이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레 사문을 비우시게 되어 마음이 어지러우실 것이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방문 앞에 선 적전단주의 묵직한 음성을 감진택은 짧은 고갯짓으로 가로막았다.
“다되었소. 아, 잠시만 더 기다려 주겠소?”
막 방을 나서려던 감진택이 발길을 멈췄다.
“무슨 일이신지…… 그자들의 추격을 피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적전단주가 나지막하게 상황을 일깨웠다.
“알고 있소. 그러나 그대의 주군이 있는 곳에 가면 당분간 외부와 연락을 끊게 될 것 같기에 제자에게
간단한 서찰이라도 남겨 놓았으면 하오.”
“그건 좀…… 적에게 행적을 노출시킬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적전단주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과 나만 아는 비밀장소에 남겨도 안 되겠소?”
“정히 그러시다면 장소는 언급하지 마시고 짧게 쓰십시오.”
감진택은 고맙다는 눈빛으로 적전단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서둘러서 붓을 들어 한마디 적으려다 말고 감진택은 별안간 그냥 몸을 일으켰다.
“아니, 안 적으실 겁니까?”
적전단주의 눈동자에 의아스러운 기색이 매달렸다.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도 같구려. 다 큰 녀석이니 알아서 처신하겠지. 자, 출발합시다.”
감진택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더니 앞장서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소사곡으로 내려가기 전, 떨리는 눈빛으로 아주 잠시 천독문이라고 쓰인 현판을 올려다본 감진택은 이내
걸음을 빨리 하여 곡 아래로 비호(飛虎)처럼 내려갔다.
그의 뒤를 적전단주 이하 적의인들이 민첩하게 호위하며 썰물처럼 곡을 벗어났다.
옆에 나란히 선 적전단주의 옷자락 날리는 소리를 흘려 들으며 감진택은 무수한 상념에 잠긴 채 점점 천독문과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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