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청풍(靑風) 2

조회수 13 15세 이상 이용가 등록 2026.08.19
2화. 청풍(靑風) 2


일 년이 지났다.
화산의 절경에 황적색 바람이 지고, 흘러가는 세월은 사부의 얼굴에 잔주름을 늘려 놓았다.
“하산할 일이 생겼다. 이번에는 좀 길어질 듯 하구나.”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 해 주시지 않았다.
다만 어두웠던 사부의 표정이 불길한 예감만을 가져다주었을 뿐.
“다녀오세요.”
“심법 수련은 게을리 하지 말아라. 그 동안 정리했던 구결이다. 난삽하지만, 도움이 될 게다.”
선현진인은 자하진기의 연공서(硏攻書)까지 넘겨주었다. 이미 다 외워 머리 속에 들어있는 구결들이다. 거기에 더해 빽빽한 주해가 복잡하지만 정성스럽게 적혀있는 비급이었다.
구배지례를 올리는 청풍이다.
“그럼.”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마지막 구배지례가 될 것이라고는.
그리고, 다시는 그 아버지와 같은 뒷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고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을 때.
아평은 운대관을 통과하며 선검수로 올라가 버렸고, 여전히 보무제자로 남아 있으면서 자하진기를 익히는 데에만 골몰하던 청풍은 결국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고 만다.
“선현의 제자, 청풍 맞는가.”
“예.”
“비보를 전해야 되겠다. 네 사부, 선현진인. 전대 고수와의 비무에서 패배하여.......등선의 길에 들고 말았다.”
도인의 등선이란 곧, 죽음을 뜻한다.
십 삼세.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나이임에도,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혈육이나 다름없는 선현진인이다. 사부, 아버지의 죽음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청풍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네 처지가 딱하다. 돌아갈 고향도 피붙이도 없다고 하더구나. 묻겠다. 다른 직전 사부를 모시겠느냐?”
‘다른 사부?’
청풍은 비형권을 가르쳤었던 정원진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사부는 선현진인이다. 다시 뵐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부님, 그 얼굴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찌 다른 이를 사부라 부를 수 있겠는가.
“아, 아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멍한 얼굴로 대답하는 청풍을 보며, 정원진인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스승을 모시는 것이 좋을 텐데.......다시 생각해 보거라.”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청풍.
청풍은 모른다.
직전으로 사부에게 사사하는 제자와 그렇지 않는 제자의 차이를.
착실하게 가르치는 바를 배우는 이라면 운대관을 통과하여 선검수가 되는 것까지는 혼자서도 어떻게든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평검수와 매화검수는 다르다.
오용 사현을 시험하는 천화관과 소요관은 희대의 천재가 아님에야, 직전 사부의 도움 없이는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
권법을 연마하여 올라가는 정무제자와 매화권사도 마찬가지다. 차근차근 시험들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만큼 상승의 무예를 배울 기회가 없어지고, 종국에는 끝끝내 보무제자로 지내다가 강호로 나가서 표국에 들어가거나 속가의 분타들에 몸담을 수밖에 없었다.
경쟁과 도태다.
보무제자의 숫자만 해도 속가제자들까지 합하면 오백여명을 넘어서는 상태인 바.
장로를 직전 사부로 둔다는 것은 적어도 평검수까지는 보장받은 일이라 할 수 있었지만, 청풍은 그와 같은 첨예한 현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가 없는 것이다. 아니, 알고 있었더라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사부님은 유일(唯一)이다.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아버지다.
당연히 안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청풍에게는 선택의 기회 자체가 무의미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마음이 달라지면, 언제든 찾아 오거라.”
그와 같은 비보를 전하는 중에도, 정원진인의 목소리엔 절제와 절도가 깃들어 있다.
마치 통보와도 같은 그 어투, 청풍에게는 낯설었다.
선현진인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정이 많았고 자상했다. 사부의 존재가 더 이상 없게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임과 동시에, 청풍에게는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어찌하여.......’
몸을 돌려 돌아가는 정원진인에게 사부님의 마지막을 물으려다 그만 두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찌 돌아가셨는지 이야기를 들으면,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사라져버릴 듯 싶었다.
다시 볼 수 없는 사부님.
취운암(翠云菴), 이제 제자 홀로의 거처가 된 그곳에서 청풍은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부님. 사부님........’
찾아오는 이 거의 없는 외딴 곳임에도 소리 죽여 오열하는 청풍이다.
며칠을 울고 며칠을 슬퍼했던지.
‘사부님......’
청풍에게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을지언정, 갑작스런 사부의 죽음이 이 곳에 가져다 준 변화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모든 것.
언제나와 똑같이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 낮의 밝은 태양은 화산의 절경에 아름다운 빛을 내리 쬐면, 저녁 무렵에는 고운 석양이 하늘에 주홍색 운무를 펼쳐 놓는다.
다른 것도 있다면 한 사람의 부재.
“풍아야. 저 하늘의 별들을 보아라. 저들에겐 모두다 제가 발하는 기운이 있단다. 꼭 우리 하나 하나의 모습 같지? 어두운 밤, 구름이 별들의 모습을 가리더라도, 거기에 별이 없어진 것은 아니란다. 한 순간 가려졌을 뿐, 그 별들은 항상 거기에 있는 법이지.”
깊은 밤 수천, 수만 개의 별들이 암천을 수놓을 때, 두런두런 말을 건내 주던 사부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 하다. 예전과는 다른 것, 사부님은 이제 없었다.
‘가려진 곳. 사부님은 거기에 계신 건가요?’
사부님의 말씀은 틀렸다.
구름에 가려졌다고 한다면, 언젠가 그 모습을 드러낼 테지만, 사부님은 다시 볼 수 없다.
구름이 지나가는 새, 멀리 멀리 떨어져버린 별똥별이 되신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널찍한 바위 위에 누운 청풍, 손을 뻗으면 화산파답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지니셨던 사부의 어깨가 닿을 것만 같았다.
뻗어내던 손을 멈춰, 다시 가슴에 얹었다.
묵직한 무게.
가슴 앞섬 안에는 사부님이 남겨주셨던 자하진기의 구결이 있다.
뜻하지 않았던 유품이다. 제자를 위해 한필, 한필 써 내려가던 글씨에서, 그 빛바랜 종이 안에서 가슴을 울리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사부님. 제가 할게요.’
청풍은 가슴에 손을 올린 그대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부님이 원했던 것은 자하진기의 완성이다. 청풍은 가슴 깊이 다짐했다. 꼭 사부님의 바램을 이루겠다고.
자하진기.
그 하나와 함께, 청풍의 시간은 열세 살 그곳에서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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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무제자들의 수련 장소인 장운대(藏雲垈) 공터다.
일과가 끝난 저녁, 산바람에 땀을 식히며 휴식을 취할 때였다.
“야야, 이번에 사부님께 무당파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야. 거기 제자들은 복장도 수련시간도 제 멋대로래.”
“그래? 우, 그거 부럽네.”
“게다가 크기도 엄청 작다고 그러시더라고. 보무제자나 선검수, 평검수같은 구분도 없이, 몇 십 명 제자가 전부라서 정말 볼품이 없대. 제대로 무공을 배우는 제자들을 진무각 제자라 하는데, 그것도 열명인가밖에 없다고 하시더라.”
“그 이야기는 나도 듣긴 했다, 무당에는 여제자도 없다며?”
“정말? 그것은 또 몰랐네. 별로잖아.”
십 오세 부근의 아이들, 얼마든지 가질만한 관심사다.
종남의 이번 대에 굉장히 어여쁜 제자가 들어왔다느니, 어느 파의 후기지수가 얼마나 강하다느니 하는 잡담들, 어느 문파의 문규가 어떻고, 거기에 비해서 화산파가 어떤지 항상 투정을 부리는 아이들이었다.
화산파는 소림사와 함께, 구파 중 가장 엄격한 규율을 자랑한다.
꽉 눌러 놓으니, 더욱 더 그런 것일까.
작게는 도복을 입는 복장 상태에서부터, 크게는 화산파 십이 계율까지, 온갖 사소한 것들을 엄중하게 지키도록 하는 화산파였으니, 다른 문파와 비교해서 여러 가지를 궁금해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수십 명 단위의 연공을 감독하는 수련 사부들의 눈을 피해, 혹은 쉬는 시간을 통해서 삼삼오오 모여든 제자들이다. 무에 그리도 할 말이 많은지, 도무지 이야기가 끊길 줄을 몰랐다.
“야, 그거 아냐? 이번에 하운 사형이 소요관에 응시한대.”
“뭐?”
“추영 사질이 그랬어. 합격 가능성도 상당하다고 해.”
“그래? 빠르네. 역시 하운 사형이다.”
하운. 십 칠세.
떠들고 있는 그들보다는 고작 세 살 위다.
십 삼세에 선검수로 올라선 후, 일년 만에 평검수로. 이제는
보무제자에 머물러 있는 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였다.
“그런데.......추영 사질, 너 추영 사질이라 했지?
“응.”
“너, 너......추영 사질이랑.......이야기 해 봤어?”
“응. 꽤 친한데? 추영 사질 거처인 흡로암(吸露庵)이 우리 노부암(路扶菴) 바로 근처잖아.”
“무, 무엇이! 이 녀석! 진작 이야기를 했어야지!”
“뭐, 뭐라는 거냐. 왜 그러는데?”
“아아, 추영 사질. 그 봉목이며, 자태하며.......아아.......”
“아서라. 아서. 바보 같은 녀석아. 추영 사질도 다음 번 소요관에 도전하겠단다. 우리가 넘볼 사람들이 아냐.”
“그래도.......”
장로들을 직전 사부로 두지 못한 제자들이다. 보무제자들은 일년에 몇 십 명씩, 한정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마련인 바.
이에, 한 장로가 받아들이는 제자에는 한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름난 무가의 자제라든지, 막대한 재력가의 자제들이라든지 하는 배경이 없고서는 장로의 직전 제자가 되는 혜택을 누리기가 힘들었다.
예외가 있다면, 처음부터 특출난 재능을 보인 경우이다. 또 하나, 장로가 강호행을 하던 도중, 직접 직전 제자를 찾아 왔을 수도 있다. 하운이 전자로서 인현진인의 문하에 들어갔다면 청풍은 선현진인이 저 머나 먼 동쪽 땅에서 데려온 후자의 경우라 할 수 있었다.
한편. 장로의 직전제자가 되지 못한 보무제자들은 열명 씩 또는 이십 명 씩, 정진묘(精進廟)와 노부암(路扶菴)을 둘러싼 전각군들에서 단체로 생활하며, 그날 그날 가르치는 무공들과 학문들을 배우게 된다.
열심으로 습득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 언젠가 화산파를 떠날지 모르는 제자들이었으니, 상승으로 통하는 요결들과 정수들은 보여주지 않았던 까닭이다.
게다가 그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러한 것들을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화산 검문, 보무제자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소정의 금전을 내놓아야만 하며, 제자가 된 후에는 두 달에 한 번씩, 내력과 경공 수련을 명목으로 약초의 채집과 값나가는 부옥(浮玉), 경석(磬石)의 수집에 동원된다.
장로들의 직전들은 이 모든 제약으로부터 비껴나 있다.
다른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사부의 세심한 관리 하에 다른 보무제자들이 배우지 못하는 진수들을 배우면서 정심함을 갖추어 나간다.
공평하지 못하다?
그래서 비인부전이다.
화산파의 제자는 많고도 많아 그 문이 무척 넓어보였지만, 실상 그 문을 뚫고 들어가기는 도리어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너 저번에 운대관 시험에 나갔었지?”
“응. 넌 그 전번에 나갔던가?”
“그랬지. 난 말이야,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전술이랑 지략을 잘 못하겠어. 너무 어려워”
“난 오히려 무공이 걸리던데.”
“그러고 보면, 무가 출신 녀석들은 좋겠단 말야. 잘도 통과하잖아.”
“하긴 그래. 일찍 시작하니까.”
육력.
무공, 지략, 도학, 의협, 전술, 지식. 여섯 가지 덕목을 시험하는 운대관이다. 서검수의 숫자는 이백 명, 그곳까지만 올라가도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 배우는 무공도 달라지며, 비로소 목검이 아닌, 진검을 쥐게 된다. 그 뿐이 아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지금의 정진묘 숙소. 그보다 한결 나은 옥천각 숙소로 옮겨갈 수 있었다.
“아, 그 녀석 이야기 들었냐? 아평, 작년에 운대관 통과한 녀석말야.”
“응. 안 되었더라고. 천화관 시험에 도전했다가 사고로 크게 다쳤다며?”
“무공을 더 익히지 못할지도 모른대.”
“그 정도였어?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말야, 조금만 더 일찍 장로님들 눈에 들었었다면........”
“맞아. 직전 제자만 되었어도 그런 일은 안 당했을걸.”
“쉿. 목소리를 낮춰. 함부로 할 말이 아냐. 그리고, 저기 저 녀석도 온다. 아평이랑 친했던 녀석.”
청풍이다.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걸어온 소년 청풍, 휘적휘적 지나쳐 버린다. 주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저 녀석도 안 되었어. 착한 녀석인데. 그 전부터 그랬잖아. 장로님들 직전 제자답지 않게 순해 빠져가지고.......”
“그러게. 뭐, 아직도 순하긴 매한가지래. 잘 생기긴 또 기가 막히게 생겼잖아. 얼굴값은 못하지만. 멍하게 있다가 상원장로님께 혼나기가 일수고 말이지.”
몇 달 째.
청풍은 수백의 또래 제자들 사이에서도 마치 없는 사람처럼 존재감을 죽인 채, 흘러가듯 살아가고 있었다. 모두의 관심사인 운대관이나 천화관, 소요관 시험에 대한 대화에도 끼어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최근 들어 가르치는 육합검과 화형권의 수련에도 있는 듯 없는 듯,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 녀석......다른 장로님들께서 거두어 주시겠다고 했는데도 따르지 않았대. 다른 이들이라면 꿈에도 바라는 기회일 텐데......”
“하지만, 그럴 만도 하잖아. 선현 장로님이 다른 장로님들에 비하여 실력은 그저 그랬다고는 하지만, 장로님들 중에서는 가장 자상하고 정 많던 분이셨으니까.”
“여튼, 불쌍하게 되었어. 누가 그러는데, 취운암인가.......저 녀석 거처 있지? 저 녀석 혼자 살고 있지만, 곧 그곳에서도 나와야 될지 모른다고 하더라고. 선현장로님 거처로 쓰이던 곳인데, 이제 더 이상 장로님 직전 제자가 아니잖아.”
“그것도 못할 짓이구나. 차라리 우리가 더 속이 편하겠어.”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풀이 죽는 제자들이다.
청운의 밝은 꿈을 꾸는 십대지만, 화산파가 품고 있는 치열함은 결코 달콤하지 않았다.
비정강호의 축소판.
극복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현실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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