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풍(靑風)
화산질풍검(華山疾風劍)
1화. 청풍(靑風).
화산파(華山派). 초절정고수(超絶頂高手).
선현진인(善賢眞人) 자하신공(紫霞神功) 사사(師事).
동방(東方) 이족(異族) 출신(出身) 추측, 확인불가.
독특(獨特)한 독문무공(獨門武功) 소유(所有).
백호검사(白虎劍士). 청홍무적검(靑紅無敵劍). 화산질풍검(華山疾風劍).
제천회(制天會) 일익(一翼).
대(對) 철기맹전(鐵騎盟戰) 참전(參戰).
대(對) 성혈교전(聖血敎戰) 참전(參戰)......중략(中略).......
한백무림서(韓白武林書) 인물편 제 삼장
화산파(華山派) 청풍(靑風) 중에서
화산의 산세는 웅장함을 자랑한다.
서악(西岳).
중원천하 오악 중, 가장 험한 산으로 정평이 난 대산이다. 온 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니, 강인한 기상이 산 전체에 충만하다.
찌르듯 솟아 올린 기암괴석.
깎아지른 듯 뻗어 내린 절벽들.
마치 신비로운 갑주를 지닌 신장(神將)과도 같다.
협곡을 감싸 도는 구름 사이, 다시없는 절경으로 스스로의 무용을 드높이는 산이었다.
고래로부터 도교의 성지(聖地)였던 화산이다.
격하고 화려한 위용을 드러내는 암벽들은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지기(地氣)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다.
예로부터 화산에 이르려면 오직 그 길은 하나뿐이라 전해진다.
사람이 오르기엔 가파른 산세여서 그렇다. 옥천원 지나 석문에서 시작되는 돌계단은 험하고도 또 험하여 감히 오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범인(凡人)의 접근을 불허하는 산.
화산의 품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마음을 정결히 가지고 구도(求道)하는 심정으로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신비로운 기(氣)가 만산(滿山) 기암(奇巖)들에 가득하여 호기를 절로 일으키는 곳.
도문(道門)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옥녀봉, 연화봉, 운대봉, 낙안봉, 조양봉, 오봉(五峰)들이 그 강건한 기운을 앞 다투어 발산하고 있으니, 도문이 자리 잡지 않았더라면 큰 군벌이나 도적들이 흥성했을 땅이었다.
화산의 도사들은 그와 같은 강건한 기상을 닮았다.
법도가 뚜렷하여 배움의 엄격함을 강조한다.
도사들이란 자고로 수양에 온 힘을 다해야 하는 법. 그러나 화산의 산 기운은 도사들의 수양을 정신의 수도로만 가두어 두지 않았다.
험악한 산세, 그 산을 닮은 빼어난 기상으로 검(劍)에 뜻을 둔 도인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화산검파는 그렇게 산의 강요로 탄생했다.
조용히 구도(求道)에 전념하는 도인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특질을 지닌 도사들.
넓디 넓은 서악(西嶽)의 셀 수 없는 도량들 중에서, 다 같은 화산의 도문들이되 연화봉 측사면 도관들을 따라, 검파로서 자리 잡은 문파가 바로 화산검파, 화산파다.
무(武)를 추구하는 도인들이 어떤 산중의 도관들보다도 많았던 곳.
각양각색의 무예가 비전으로 전해지는 가운데, 특히 검도(劍道)를 중시했던 것도 화산의 산세가 마치 찌르는 검(劍)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이었을지.
절도와 극기를 먼저 생각하는 검문, 화산파다.
무당파와 함께 구파의 수위를 넘본다는 강력함은 그와 같이 굳건한 화산의 성정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었다.
연화봉 산 중턱의 한 도관, 취운암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황적색 바위들 사이 사시사철 드리워진 청송은 그 뾰족한 푸른 잎들마저도 바위 색깔처럼 주홍빛일 것만 같다.
깎아지른 절경 아래, 일노 일소, 두 사람은 이제 화산문인으로서 첫 운기토납을 가르치는 한 사람의 사부와 제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 더 깊이 들이마시고, 그래, 그렇게.”
어리고도 어린 아이.
느릿느릿 들이마시는 숨과 조심스럽게 뱉어내는 날숨이 귀엽기만 했다.
“혀는 입천장에 붙이고. 여기 정수리와 연결 된다고 생각하거라. 머리 꼭대기 말이다.”
초로의 도인이 어린 제자의 백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속눈썹 긴 커다란 눈을 굴리며 사부의 동작, 사부의 말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아이의 얼굴엔 순수함만이 가득했다.
“세상 모든 것들은 기(氣)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유형만물의 비롯됨은 기(氣)에 있으니, 스스로의 안에 있는 기(氣)를 느끼는 것이 첫째요, 다른 사물 안에 있는 기(氣)를 느끼는 것이 두 번째다. 천지간에 충만한 기(氣)를 끌어 쓰며 음과 양, 만재(萬在)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곧 운기(運氣)다.”
선현진인.
달리 무검진인이라 불리는 이.
화산파는 고래로 검(劍)을 숭상하는 검문으로 이름 높은 바, 그러나 그와 같은 전통을 거부하며, 병기를 불신하고 오직 순수한 내력과 육신의 힘만을 고집하던 장로가 그였다.
“운기를 내력으로 담아내어, 온 몸에 조화의 기운을 불어 일으킬 수 있다면, 맨손으로도 능히 도검을 상대할 수 있으며,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다. 만사(萬事)에 물러섬이 없음이라.......”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앞에 어린 제자의 맑은 눈빛이 박혀 들었다.
“청풍아. 이 사부의 말이 어려우냐.”
“네에......”
조그맣게 대답하는 어린 제자, 청풍.
이제 겨우 다섯 살. 또릿또릿한 이목구비에 계집아이의 그것처럼 도톰한 입술을 지닌 아이다. 선현진인의 만면에는 보기 좋은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러니까, 이 사부가 시키는 대로 숨쉬기를 계속하다보면 나쁜 도적들도 때려잡을 수 있고, 산속 무서운 맹수들도 물리칠 수 있다는 이야기란다. 천천히 천천히........그렇지. 그렇게 차분하게 하는 것이야.”
선현진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제자를 받은 이상,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남겨주면 되는 것이다.
검(劍)을 버리고 얻은 기(氣)다.
지금이야 정무제자도, 매화권사도 생겨나, 검법 이외의 길도 제법 정착되고 있다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선현진인이 배우던 그 시절, 화산검문에서 검을 쥐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특이한 사실.
무검진인이란 칭호조차도, 사실은 그 안에 다른 장로들의 조롱기가 묻어있지 않았던가.
은연 중 있었던 멸시와 천대를 기억하고 있는 선현진인에게 자하진기(紫霞眞氣)를 전수할 제자가 생겼다는 것은 그야말로 일생 일대의 천명을 부여받은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사부님, 숨이 차요.”
“어허! 운기하는 와중에 입을 열다니! 처음부터 다시 하자. 구결이 어떻게 된다고?”
“양중음생(陽中蔭生) 조화교원(造化郊原) 흡기단전(吸氣丹田) 진원백회(眞元百會)요.”
“그래. 그래도 한 번 이야기 해 준 것은 잃어버리지 않는구나. 하지만......무슨 뜻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
“네. 사부.”
“이제 차차 알아가자꾸나. 숨쉬는 것은 본래 스스로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쉬어야 올바른 숨쉬기라 할 수 있단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진기를 이끄는 구결이 저절로 일어날
수 있도록 마음을 다 해보자. 알았지?”
“네.”
선현진인을 올려보는 어린 청풍의 두 눈에는 사심 없는 신뢰만이 가득했다. 함박웃음 지어내는 청풍의 입가에 선현진인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담겨든다.
내공(內攻)과 기(氣), 그 궁극을 향한 자하신공의 길.
올라선 두 노소의 첫 발걸음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 *
계절 따라 부는 화산의 황적색 바람은 아이를 소년으로 만들고, 사부의 얼굴에 자그마한 세월의 고랑을 새겨 놓았다.
화산파 제자의 초입, 보무제자가 된 청풍은 처음으로 친구들을 사귀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무공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팡! 파팡!
“이크!”
비형권에 이은 이형권.
보무제자에게는 기본공을 가르친다.
같은 보무제자인 아평은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소년, 십 이세 어린 나이에도 초식 이해가 탄탄한 편이었다.
파악!
아평이 펼친 이형권 슬각초에 다리를 걸려버린 청풍이다. 주저앉은 그의 얼굴, 순진해 보이는 웃음이 피어났다.
“또 졌네. 아평은 정말 강하구나.”
패배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평보다 한 뼘은 더 큰 키에 긴 속눈썹, 수려한 눈매를 지녀 그 누구보다도 돋보이는 외모였음에도 실력과 심성은 나약하다 느껴질 만큼 내세울 것이 없었다.
“칫, 넌 진 것이 분하지도 않냐!”
청풍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면서, 얼굴 찡그린 아평이 핀잔을 던져 왔다.
“분할 것이 뭐가 있어? 실력이 모자라 진 것인데.”
“에고. 무슨 말을 하겠냐.”
청풍.
둥글둥글하여 승부욕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절도와 무예를 강조하는 화산파의 제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성정이라, 도무지 눈에 뜰 바가 없었다. 아니, 비무만 하면 매번 지고 있으니, 도리어 주목받을 정도라 할까.
“오늘 수련도 다 끝났으니, 가 볼게.”
“또 그 심범 익히러 가는 거야?”
“응.”
“우리 사부님이 그러시는데, 무공 수련은 그렇게 내공에만 치우쳐서는 안 된대.”
“응.”
“무슨 대답이 그러냐? 우리 사부님께선 내공이랑 초식이 항상 같이 해야 되는 것이라 하셨어.”
“난 잘 몰라.”
“거 봐. 앞으로는 연습을 좀 해. 맨날 이기는 것도 미안하단 말야.”
얼굴에는 은근한 자부심. 그만한 나이에 어울리는 감정이었다.
“그래도, 난 사부님께서 시키는 대로 할 거야.”
“그러다가 끝까지 나 못 이길걸?”
어린 아이다운 도발이다. 그러나 청풍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괜찮아. 무공은 누구한테 이기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셨어. 사부님은.”
제법 자신 있는 얼굴로 대답한다.
의지가 굳은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함에서였는지.
아마도 후자일 듯 하다. 청풍은 아평의 말이 도발인지조차 알지 못할 만큼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갈게!”
아평과 다른 제자들이 사부들을 찾아, 또는 그 자리에 남아 수련하는 것을 뒤로 한 채, 청풍은 연화봉 아래쪽을 향해 걸음을 빨리 했다.
팍! 파팍!
가파르기 짝이 없는 산길이었지만, 내달리기 시작한 청풍은 움직이는데 거침이 없다. 비무 수련 때의 어설펐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지족조원(地足造源), 공신교통(空身交通).’
한발 나아갈 때, 착지할 때, 다시 몸을 날릴 때.
청풍은 오직 스스로의 호흡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호흡과 축기. 발산과 수렴.
자하진기.
내공수련이다.
초식은 배재한다. 비형권과 이형권을 배우며 비형보, 이형보를 익혔지만, 그 보법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내력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긴다. 첫 심법 수련 때부터 사부님께 누누이 들었던 말, 생활 자체가 자연스럽게 내공 수련으로 녹아 들어가야 한다는 것.
청풍에게 보무제자로서 받는 수련은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이 하는 부수적인 훈련에 지나지 않았다.
오직 내공만을 고집하며 비형권과 이형권은 그닥 열심히 연마하지 않으니, 다른 제자들과는 차이가 날 수 밖에.
내공만큼은 꾸준히 연련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쓸 수 있는 형(形)을 갖추지 않았으니, 비무 수련에서 이길 수 없었던 것도 기실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사부!”
“왔느냐.”
화산파 장로들의 거처 중 가장 초라한 자하암, 선현진인은 온화한 미소로 청풍을 반겼다.
“이형권은 어땠냐? 오히려 비형권보다는 쉽지?”
“음.......예. 다른 제자들은 이형권이 더 어렵다고 하던데요.”
그럼 그렇다는 듯 선현진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공의 차이야. 이형권의 권형. 이해는 잘 가지만, 손은 잘 안 따를 거야. 그렇지?”
“예, 맞아요. 그것이 좀 이상해요.”
“이상할 것이 무에 있느냐. 연습을 못 하게 했으니 손에 익지를 않은 것뿐인데. 그럼, 대련도 또 졌겠구나. 상대는 누구였지?”
“예. 사부, 아평한테요. 아평은요, 정말로 무공에 재질이 있나봐요.”
“허헛. 그것은 재질 때문이 아니라, 연습의 차이라니까. 네가 밤낮으로 이형권, 비형권을 연마했으면, 못 이겼을 것 같으냐?”
“음........그러니까.......”
“왜 대답을 못해? 질 것 같아?”
“하지만 아평은 정말 강해요. 벌써부터 선검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걸요.”
선검수는 육력을 시험하는 운대관을 거친 보무제자가 얻는 칭호이다. 선검수가 된 후, 천화관을 넘으면 평검수에 이를 수 있고, 소요관, 오용(五勇) 사현(四賢)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하게 되면, 비로소 모든 제자들의 목표인 화산 매화검수가 될 수 있다.
매화검수.
욕심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청풍에게조차도, 그것은 무척이나 설레는 칭호일 수 밖에 없었다.
“선검수?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자하진기나 꾸준히 수련하거라. 네 내공은 누구 못지 않아. 벌써 자하진기 일단공에 이르렀으니, 이 사부보다 이십년은 빠른 셈이니까.”
“그래도........”
머뭇거리는 청풍의 모습. 선현진인이 얼굴을 가까이 하며 제자의 뒷 말을 재촉했다.
“자꾸.......지니까.......”
“자꾸 지니까, 기분이 나쁘다?”
“조, 조금이요.”
화들짝 놀란 듯, 즉각 덧붙이는 청풍이다.
그 얼굴에 선현진인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허. 이제 조금은 나이를 먹는 모양이로구나!”
호승심.
당연히 생길 수 있는 감정이다. 마냥 어린 아이일 것으로만, 아니, 아직까지도 어리기 짝이 없는 제자도, 슬슬 무인으로서의 자각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풍아야, 잘 들어라. 아직은 연단과 축기다. 조급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발경은 아직 일러. 네 몸에 쌓인 진기는 약하지 않다. 조절도 못하면서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큰일이 난다. 비형권이나 이형권의 발경만으로도 위험해. 이제 겨우 태을기나 구소공을 배우고 있는 아이들과는 다르다. 이 사부가 초식 수련을 안 시키는 이유는 그래서야. 알겠지?”
“예.”
무검(無劍) 진인, 사부의 이름을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청풍이다. 소년에게 있어 무검의 내공론(內攻論)은 그것을 펼치는 사부와 함께 탐구하는 신앙과도 같았다.
“자, 다시 시작하자꾸나. 누누이 말하는 것이지만 내공과 진기는 강한 믿음에서 나오는 법이다. 기(氣)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가능하다고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게다.”
“예, 사부.”
소망하고 구하는 만큼의 길이다.
굳이 제자, 청풍을 뛰어난 고수로 만들려고 하거나, 모두에게 인정받게 만들려는 생각은 특별하게 해 본 적이 없다.
무검진인, 선현진인 자신의 삶이 그래 왔기 때문이다.
내공에서 이룩한 바를 제대로 평가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것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氣)를 쫓아 자신을 완성하는 길.
사심 없는 무한지로일진데, 다른 이들이 무엇이라 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다만, 화산 도문의 양생술이었던 자하공(紫霞功)에서 영감을 받아, 온 생애의 깨달음을 담아낸 심법이 어린 제자의 몸을 통하여 온전한 모습을 갖추길 바랄 뿐이었다.
“후우우우우.”
서 있는 상태, 입공(立功)의 자세로 호(呼)와 흡(吸)을 반복하는 청풍을 보며 선현진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공의 전수보다 더 중요한 일. 아들 같은 제자의 심성이다.
제자는 그의 바램대로 너무나도 착하게, 너무나도 올곧게 커 주었다. 아직 한참이나 어리지만 지금까지를 볼 때, 청풍의 선한 품성은 세월이 지난다고 변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뿐인가.
자하진기의 성취도 기대 이상이다. 욕심도 없는 녀석이 그만큼 성장해 주는 것을 보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자 복은 있었지.’
이제 슬슬 스스로의 무인 기질에 눈떠가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성취에 큰 도움이 되리라.
자하진기는 도가(道家) 심공의 진수로, 상, 중, 하 단전을 고루 발달시키니, 감정이 격해지는 십대의 나이일지라도, 심마(心魔)에 휩쓸릴 일은 없을 터. 길 저편에 완성을 쫓아가는 제자의 모습을 상상하려면, 그야말로 즐거운 생각이 절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 * *
일 년이 지났다.
화산의 절경에 황적색 바람이 지고, 흘러가는 세월은 사부의 얼굴에 잔주름을 늘려 놓았다.
“하산할 일이 생겼다. 이번에는 좀 길어질 듯 하구나.”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 해 주시지 않았다.
다만 어두웠던 사부의 표정이 불길한 예감만을 가져다주었을 뿐.
“다녀오세요.”
“심법 수련은 게을리 하지 말아라. 그 동안 정리했던 구결이다. 난삽하지만, 도움이 될 게다.”
선현진인은 자하진기의 연공서(硏攻書)까지 넘겨주었다. 이미 다 외워 머리 속에 들어있는 구결들이다. 거기에 더해 빽빽한 주해가 복잡하지만 정성스럽게 적혀있는 비급이었다.
구배지례를 올리는 청풍이다.
“그럼.”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마지막 구배지례가 될 것이라고는.
그리고, 다시는 그 아버지와 같은 뒷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고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을 때.
아평은 운대관을 통과하며 선검수로 올라가 버렸고, 여전히 보무제자로 남아 있으면서 자하진기를 익히는 데에만 골몰하던 청풍은 결국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고 만다.
“선현의 제자, 청풍 맞는가.”
“예.”
“비보를 전해야 되겠다. 네 사부, 선현진인. 전대 고수와의 비무에서 패배하여.......등선의 길에 들고 말았다.”
도인의 등선이란 곧, 죽음을 뜻한다.
십 삼세.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나이임에도,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혈육이나 다름없는 선현진인이다. 사부, 아버지의 죽음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청풍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네 처지가 딱하다. 돌아갈 고향도 피붙이도 없다고 하더구나. 묻겠다. 다른 직전 사부를 모시겠느냐?”
‘다른 사부?’
청풍은 비형권을 가르쳤었던 정원진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사부는 선현진인이다. 다시 뵐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부님, 그 얼굴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찌 다른 이를 사부라 부를 수 있겠는가.
“아, 아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멍한 얼굴로 대답하는 청풍을 보며, 정원진인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스승을 모시는 것이 좋을 텐데.......다시 생각해 보거라.”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청풍.
청풍은 모른다.
직전으로 사부에게 사사하는 제자와 그렇지 않는 제자의 차이를.
착실하게 가르치는 바를 배우는 이라면 운대관을 통과하여 선검수가 되는 것까지는 혼자서도 어떻게든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평검수와 매화검수는 다르다.
오용 사현을 시험하는 천화관과 소요관은 희대의 천재가 아님에야, 직전 사부의 도움 없이는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
권법을 연마하여 올라가는 정무제자와 매화권사도 마찬가지다. 차근차근 시험들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만큼 상승의 무예를 배울 기회가 없어지고, 종국에는 끝끝내 보무제자로 지내다가 강호로 나가서 표국에 들어가거나 속가의 분타들에 몸담을 수밖에 없었다.
경쟁과 도태다.
보무제자의 숫자만 해도 속가제자들까지 합하면 오백여명을 넘어서는 상태인 바.
장로를 직전 사부로 둔다는 것은 적어도 평검수까지는 보장받은 일이라 할 수 있었지만, 청풍은 그와 같은 첨예한 현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가 없는 것이다. 아니, 알고 있었더라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사부님은 유일(唯一)이다.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아버지다.
당연히 안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청풍에게는 선택의 기회 자체가 무의미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마음이 달라지면, 언제든 찾아 오거라.”
그와 같은 비보를 전하는 중에도, 정원진인의 목소리엔 절제와 절도가 깃들어 있다.
마치 통보와도 같은 그 어투, 청풍에게는 낯설었다.
선현진인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정이 많았고 자상했다. 사부의 존재가 더 이상 없게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임과 동시에, 청풍에게는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어찌하여.......’
몸을 돌려 돌아가는 정원진인에게 사부님의 마지막을 물으려다 그만 두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찌 돌아가셨는지 이야기를 들으면,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사라져버릴 듯 싶었다.
다시 볼 수 없는 사부님.
취운암(翠云菴), 이제 제자 홀로의 거처가 된 그곳에서 청풍은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부님. 사부님........’
찾아오는 이 거의 없는 외딴 곳임에도 소리 죽여 오열하는 청풍이다.
며칠을 울고 며칠을 슬퍼했던지.
‘사부님......’
청풍에게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을지언정, 갑작스런 사부의 죽음이 이 곳에 가져다 준 변화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모든 것.
언제나와 똑같이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 낮의 밝은 태양은 화산의 절경에 아름다운 빛을 내리 쬐면, 저녁 무렵에는 고운 석양이 하늘에 주홍색 운무를 펼쳐 놓는다.
다른 것도 있다면 한 사람의 부재.
“풍아야. 저 하늘의 별들을 보아라. 저들에겐 모두다 제가 발하는 기운이 있단다. 꼭 우리 하나 하나의 모습 같지? 어두운 밤, 구름이 별들의 모습을 가리더라도, 거기에 별이 없어진 것은 아니란다. 한 순간 가려졌을 뿐, 그 별들은 항상 거기에 있는 법이지.”
깊은 밤 수천, 수만 개의 별들이 암천을 수놓을 때, 두런두런 말을 건내 주던 사부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 하다. 예전과는 다른 것, 사부님은 이제 없었다.
‘가려진 곳. 사부님은 거기에 계신 건가요?’
사부님의 말씀은 틀렸다.
구름에 가려졌다고 한다면, 언젠가 그 모습을 드러낼 테지만, 사부님은 다시 볼 수 없다.
구름이 지나가는 새, 멀리 멀리 떨어져버린 별똥별이 되신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널찍한 바위 위에 누운 청풍, 손을 뻗으면 화산파답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지니셨던 사부의 어깨가 닿을 것만 같았다.
뻗어내던 손을 멈춰, 다시 가슴에 얹었다.
묵직한 무게.
가슴 앞섬 안에는 사부님이 남겨주셨던 자하진기의 구결이 있다.
뜻하지 않았던 유품이다. 제자를 위해 한필, 한필 써 내려가던 글씨에서, 그 빛바랜 종이 안에서 가슴을 울리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사부님. 제가 할게요.’
청풍은 가슴에 손을 올린 그대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부님이 원했던 것은 자하진기의 완성이다. 청풍은 가슴 깊이 다짐했다. 꼭 사부님의 바램을 이루겠다고.
자하진기.
그 하나와 함께, 청풍의 시간은 열세 살 그곳에서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 * *
보무제자들의 수련 장소인 장운대(藏雲垈) 공터다.
일과가 끝난 저녁, 산바람에 땀을 식히며 휴식을 취할 때였다.
“야야, 이번에 사부님께 무당파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야. 거기 제자들은 복장도 수련시간도 제 멋대로래.”
“그래? 우, 그거 부럽네.”
“게다가 크기도 엄청 작다고 그러시더라고. 보무제자나 선검수, 평검수같은 구분도 없이, 몇 십 명 제자가 전부라서 정말 볼품이 없대. 제대로 무공을 배우는 제자들을 진무각 제자라 하는데, 그것도 열명인가밖에 없다고 하시더라.”
“그 이야기는 나도 듣긴 했다, 무당에는 여제자도 없다며?”
“정말? 그것은 또 몰랐네. 별로잖아.”
십 오세 부근의 아이들, 얼마든지 가질만한 관심사다.
종남의 이번 대에 굉장히 어여쁜 제자가 들어왔다느니, 어느 파의 후기지수가 얼마나 강하다느니 하는 잡담들, 어느 문파의 문규가 어떻고, 거기에 비해서 화산파가 어떤지 항상 투정을 부리는 아이들이었다.
화산파는 소림사와 함께, 구파 중 가장 엄격한 규율을 자랑한다.
꽉 눌러 놓으니, 더욱 더 그런 것일까.
작게는 도복을 입는 복장 상태에서부터, 크게는 화산파 십이 계율까지, 온갖 사소한 것들을 엄중하게 지키도록 하는 화산파였으니, 다른 문파와 비교해서 여러 가지를 궁금해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수십 명 단위의 연공을 감독하는 수련 사부들의 눈을 피해, 혹은 쉬는 시간을 통해서 삼삼오오 모여든 제자들이다. 무에 그리도 할 말이 많은지, 도무지 이야기가 끊길 줄을 몰랐다.
“야, 그거 아냐? 이번에 하운 사형이 소요관에 응시한대.”
“뭐?”
“추영 사질이 그랬어. 합격 가능성도 상당하다고 해.”
“그래? 빠르네. 역시 하운 사형이다.”
하운. 십 칠세.
떠들고 있는 그들보다는 고작 세 살 위다.
십 삼세에 선검수로 올라선 후, 일년 만에 평검수로. 이제는
보무제자에 머물러 있는 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였다.
“그런데.......추영 사질, 너 추영 사질이라 했지?
“응.”
“너, 너......추영 사질이랑.......이야기 해 봤어?”
“응. 꽤 친한데? 추영 사질 거처인 흡로암(吸露庵)이 우리 노부암(路扶菴) 바로 근처잖아.”
“무, 무엇이! 이 녀석! 진작 이야기를 했어야지!”
“뭐, 뭐라는 거냐. 왜 그러는데?”
“아아, 추영 사질. 그 봉목이며, 자태하며.......아아.......”
“아서라. 아서. 바보 같은 녀석아. 추영 사질도 다음 번 소요관에 도전하겠단다. 우리가 넘볼 사람들이 아냐.”
“그래도.......”
장로들을 직전 사부로 두지 못한 제자들이다. 보무제자들은 일년에 몇 십 명씩, 한정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마련인 바.
이에, 한 장로가 받아들이는 제자에는 한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름난 무가의 자제라든지, 막대한 재력가의 자제들이라든지 하는 배경이 없고서는 장로의 직전 제자가 되는 혜택을 누리기가 힘들었다.
예외가 있다면, 처음부터 특출난 재능을 보인 경우이다. 또 하나, 장로가 강호행을 하던 도중, 직접 직전 제자를 찾아 왔을 수도 있다. 하운이 전자로서 인현진인의 문하에 들어갔다면 청풍은 선현진인이 저 머나 먼 동쪽 땅에서 데려온 후자의 경우라 할 수 있었다.
한편. 장로의 직전제자가 되지 못한 보무제자들은 열명 씩 또는 이십 명 씩, 정진묘(精進廟)와 노부암(路扶菴)을 둘러싼 전각군들에서 단체로 생활하며, 그날 그날 가르치는 무공들과 학문들을 배우게 된다.
열심으로 습득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 언젠가 화산파를 떠날지 모르는 제자들이었으니, 상승으로 통하는 요결들과 정수들은 보여주지 않았던 까닭이다.
게다가 그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러한 것들을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화산 검문, 보무제자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소정의 금전을 내놓아야만 하며, 제자가 된 후에는 두 달에 한 번씩, 내력과 경공 수련을 명목으로 약초의 채집과 값나가는 부옥(浮玉), 경석(磬石)의 수집에 동원된다.
장로들의 직전들은 이 모든 제약으로부터 비껴나 있다.
다른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사부의 세심한 관리 하에 다른 보무제자들이 배우지 못하는 진수들을 배우면서 정심함을 갖추어 나간다.
공평하지 못하다?
그래서 비인부전이다.
화산파의 제자는 많고도 많아 그 문이 무척 넓어보였지만, 실상 그 문을 뚫고 들어가기는 도리어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너 저번에 운대관 시험에 나갔었지?”
“응. 넌 그 전번에 나갔던가?”
“그랬지. 난 말이야,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전술이랑 지략을 잘 못하겠어. 너무 어려워”
“난 오히려 무공이 걸리던데.”
“그러고 보면, 무가 출신 녀석들은 좋겠단 말야. 잘도 통과하잖아.”
“하긴 그래. 일찍 시작하니까.”
육력.
무공, 지략, 도학, 의협, 전술, 지식. 여섯 가지 덕목을 시험하는 운대관이다. 서검수의 숫자는 이백 명, 그곳까지만 올라가도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 배우는 무공도 달라지며, 비로소 목검이 아닌, 진검을 쥐게 된다. 그 뿐이 아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지금의 정진묘 숙소. 그보다 한결 나은 옥천각 숙소로 옮겨갈 수 있었다.
“아, 그 녀석 이야기 들었냐? 아평, 작년에 운대관 통과한 녀석말야.”
“응. 안 되었더라고. 천화관 시험에 도전했다가 사고로 크게 다쳤다며?”
“무공을 더 익히지 못할지도 모른대.”
“그 정도였어?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말야, 조금만 더 일찍 장로님들 눈에 들었었다면........”
“맞아. 직전 제자만 되었어도 그런 일은 안 당했을걸.”
“쉿. 목소리를 낮춰. 함부로 할 말이 아냐. 그리고, 저기 저 녀석도 온다. 아평이랑 친했던 녀석.”
청풍이다.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걸어온 소년 청풍, 휘적휘적 지나쳐 버린다. 주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저 녀석도 안 되었어. 착한 녀석인데. 그 전부터 그랬잖아. 장로님들 직전 제자답지 않게 순해 빠져가지고.......”
“그러게. 뭐, 아직도 순하긴 매한가지래. 잘 생기긴 또 기가 막히게 생겼잖아. 얼굴값은 못하지만. 멍하게 있다가 상원장로님께 혼나기가 일수고 말이지.”
몇 달 째.
청풍은 수백의 또래 제자들 사이에서도 마치 없는 사람처럼 존재감을 죽인 채, 흘러가듯 살아가고 있었다. 모두의 관심사인 운대관이나 천화관, 소요관 시험에 대한 대화에도 끼어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최근 들어 가르치는 육합검과 화형권의 수련에도 있는 듯 없는 듯,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 녀석......다른 장로님들께서 거두어 주시겠다고 했는데도 따르지 않았대. 다른 이들이라면 꿈에도 바라는 기회일 텐데......”
“하지만, 그럴 만도 하잖아. 선현 장로님이 다른 장로님들에 비하여 실력은 그저 그랬다고는 하지만, 장로님들 중에서는 가장 자상하고 정 많던 분이셨으니까.”
“여튼, 불쌍하게 되었어. 누가 그러는데, 취운암인가.......저 녀석 거처 있지? 저 녀석 혼자 살고 있지만, 곧 그곳에서도 나와야 될지 모른다고 하더라고. 선현장로님 거처로 쓰이던 곳인데, 이제 더 이상 장로님 직전 제자가 아니잖아.”
“그것도 못할 짓이구나. 차라리 우리가 더 속이 편하겠어.”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풀이 죽는 제자들이다.
청운의 밝은 꿈을 꾸는 십대지만, 화산파가 품고 있는 치열함은 결코 달콤하지 않았다.
비정강호의 축소판.
극복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현실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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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으로 풍부하게 기를 내 보낸다. 세맥까지 어루만지고, 자연스럽게 내 쉰다.’
가부좌를 틀 필요조차 없다.
모든 움직임이 곧, 내공 수련이다.
복잡한 구결보다, 자연기(自然氣)의 포용에 역점을 둔다.
‘그렇지. 그렇게.’
자하진기 이단공에 접어들면서 가장 먼저 생긴 변화는 기억력의 증대였다.
스쳐지나가듯 들었던 사부님의 가르침들이 환청처럼 들려와 그의 운기(運氣)를 도와주고 있다.
‘아니지. 조금 더 천천히. 그래, 거기에서 풀어주는 것이야.’
사부님.
어쩔 때는 정말로 곁에서 그를 이끌어 주고 계시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구소공은 육합이야. 오행기는 말 그대로 오행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이지. 자하진기는 육합도, 오행도, 사상도 아니란다. 자하진기는 음양이야. 음과 양의 이치를 따르면서도 둘을 따로 생각하지 않지. 자하(紫霞)는 곧 노을의 색깔이고, 새벽의 색깔이니까.......음과 양이 교차되는 순간이라 만유의 기운을 모두 품고 있어. 지금까지 있었던 화산파의 심법과는 틀리지. 때문에 이 사부를 좋아하지 않는 장로들도 많단다. 하지만 이 사부는 믿는다. 자하진기는 최고야. 큰 일을 이룰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사부님, 저도 믿어요.’
살아생전 사부님의 앞에서도 그랬듯이, 마음으로 대답하는 청풍이다. 일심으로 연련을 계속하는 그에게는 지속되는 발전과 힘의 축적이 함께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 중, 하단전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온 몸을 하나의 그릇으로 생각하거라. 몸 안의 우주(宇宙)를 느끼고, 스스로 흐르는 것을 거스르지 않는 거야.’
계절이 바뀌며 몇 벌 없는 도복의 두께가 달라질 때, 깊어진 자하진기는 또 한번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안법(眼法)을 따로 익히지 않았음에도 사물을 보는 눈이 무척이나 밝아졌다.
장운대 무관에서 배우는 화형권과 육합권의 투로가 훤하게 읽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초식이 복잡하지 않는 단순한 무공들.
가장 말단 제자들이 익히는 화형권과 육합검도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절기가 될 수 있다.
다만 보무제자들에게는 기본공을 절공으로 바꾸어 주는 상승 요결들을 가르쳐주지 않을 뿐이다. 화형권 육합권만이 아니다. 처음으로 배우는 비형권이나 이형권 역시 핵심되는 정수를 얻을 수 있다면 뛰어난 무공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거기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었구나!’
청풍은 이제 그러한 상승 요결들을 볼 수 있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권형과 검형 속에서 잡아낼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눈을 확신할 수 있는가이다.
절대 다수의 보무제자들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홀로 보고 있으니, 스스로의 깨달음이 옳은 것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수련 사부께 여쭈어 보기에는 왠지 꺼려지는 바가 있다.
수련 사부에게 묻는 것은 어딘지, 스스로가 자하진기의 공능을 의심한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단공에 이르면 비로소 무공이 무엇인지 볼 수 있을 것이란다. 단순한 투로가 아니라 그 실체가 보인단 말이야.’
‘눈에 담아 둘게요. 제 눈을 믿어야죠. 기(氣)는 강한 믿음에서 연공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눈이 트이는 것에 이어, 청력, 미각, 후각, 촉각, 오감(五感)이 발달하였고, 특별한 수련을 하지 않음에도 근력과 유연성이 증대되었다.
십 사세, 한참 성장하고 있을 나이.
커가면서 이상적인 근골이 될 수 있도록, 자하진기가 그의 몸을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취운암에서 나와 주어야 되겠다. 이제 와서 정진암 숙소로 들어가기도 내키지 않을 터이니, 서벽의 풍암당(風庵堂)을 내어 주마.”
사부님과의 거처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풍암당은 멀다.
장운대에서 무공들을 배우고, 오일에 한 번 씩, 노부암 학연당(學硏堂)에서 학문을 습득하기 위해 오가려면 봉우리 두개와 오리에 걸친 긴 능선을 지나쳐야 된다.
“예. 알겠습니다.”
청풍은 일언반구 불평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쉽게 하지 못하는 편인데다가, 거처를 옮기는 것도 기실, 별반 대단할 것이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어차피, 사부님도 안 계신 곳이니까.
이 순간의 청풍.
어린 시절 모두를 그곳에서 보냈지만, 그것을 깊은 추억으로 받아들이기엔 아직은 어린 나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직도, 다른 장로를 모시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게냐?”
“예.”
“진심으로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어서 운대관에나 응시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 역시 약초 채집과 부옥 수집에 참가해야만 한다. 규율이기 때문이다. 일년 가까이 규율을 어기며 배려를 해 주었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알았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그다지 운대관, 서검수에는 미련이 없었다.
차라리 풍암당 먼 곳으로 가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거기서 라면 더욱 더 자하진기에 전념할 수 있으니까. 기실, 취운암은 장운대와 너무 가깝고, 오가는 사람들도 많아 집중에 방해되는 바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무공 수련에 별반 의욕이 없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검문 제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할 바에는 도문(道門)에 몸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다. 사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성심껏 수련하는 제자들의 분위기는 망치지 않았으면 싶다.”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절도와 극기를 강조하는 정원진인이다.
상처받을 만도 한 이야기였지만 청풍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착하고 순하지만 그렇다고 나약한 심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까지 풍암당으로 가겠습니다.”
절도있게 포권을 취한 청풍을 보며, 정원진인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들어 답례하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역시나 화산파다.
지금까지 취운암에서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감지덕지하라는 듯한 느낌.
확고하게 잡혀있는 원칙대로 움직이는 내사(內事)에는 최소한의 예외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도 아쉽기는 한가 봐요. 사부님.’
취운암.
연화봉 기상 높은 바위들 밑으로 매화가지 세 줄기 늘어뜨린 곳.
기억나는 모든 시간들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청풍은 마음을 다 잡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자하진기를 남겼고, 그것만으로도 그는 사부님과 함께 있다.
장소 따윈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음 날 풍암당으로 향하는 청풍의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물은 왜일까.
생각과 감정. 항상 같이 움직일 수는 없는 이치에, 소년 청풍은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넘기며 새로운 곳,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 * *
“너는 누가 가장 괜찮은 것 같아?”
“글쎄. 하운 사형도 괜찮고, 동한 사형도 좋고.”
“동한 사형은 너무 냉담해서 싫어. 게다가 본산제자고........”
“나랑은 다르네.”
“성일 사형은 어때?”
“글쎄. 성일 사형은 아직 선검수지 않어?”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매화검수쯤 되면 이미 사람이 아니잖아.......종일 무공에만 매달리고.......”
“하긴.......역시 그러면 매사형인가?”
“매사형 정도면 최고지. 하지만 매 사형도 곧 매화검수가 되어 버릴걸? 본산제자도 아니면서......곧 소요관에 도전한대.”
“매 사형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우리보다 한 살 많아. 열 일곱이라고 들었어.”
“근데 벌써 매화검수라고? 속가면서? 너무한 것 아냐?”
“게다가 얼굴도 잘 생겼잖아. 본산제자처럼 투박하지도 않고 말이지. 진이가 그러는데, 품행도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대.”
“심하다.......추영 언니 쯤은 되야 바라 볼 수 있겠네.”
“얘는........추영 언니가 어디 그런 데 신경 쓸 사람이니?”
“그렇긴 해.”
“아휴........운대관도 그렇게 어려웠는데, 우리는 언제나 천화관에 도전할 수 있지? 매 사형이나 하운 사형이나, 벌써 저만큼 멀리 가 버리고.......”
“모르지. 추영언니가 옥녀검법 펼치는 것 본 적 있는데, 우리랑은 너무 너무 다르더라.”
“나도 봤어. 정말........아휴.........”
“아! 그런데 말야. 너 그 이야기 들었니? 그렇게 잘 생긴 애가 하나 있다던데.”
“그래? 또 누가?”
“청풍인가.......평검수 언니들 사이에선 유명해. 우리들 선검수까지는 남자 제자들이 있는 장운대나 옥천각 근처엔 얼씬도 못하니까. 본 언니들 말로는 정말, 굉장히 잘 생겼대. 눈에 확 띌 정도라던데?”
“그 정도야?”
“근데 말이지. 걔 말야. 아직 보무제자래. 열 여섯인데.”
“뭘 아직이니? 우리랑 같은 나이잖아. 우리도 운대관 통과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뭘.”
“아니야. 걔 있잖아. 원래 장로님 직전이었대. 보통 장로님들 직전이면, 최소한 작년에는 선검수까지 올라갔어야 하잖아.”
“고작 일년 가지고.......”
“어머, 일년이면 얼마나 큰데. 다른 장로님들 직전 중에 열 여섯까지 보무제자인 애들은 아무도 없어. 물론 좀 문제가 있기는 하다지만.”
“문제? 아, 혹시 걔가 그, 돌아가신 선현장로님 제자였니? 그, 다른 사부님들 모시는 것 전부 거절했다던.......”
“그 애 맞아, 들어 본 적 있지?”
“잘생겼다는 건 몰랐어. 그 애가 그 애 였구나.”
“음.......근데 말야.......잘 생긴 것은 언니들이 다 그러니까 그렇다해도, 걔 좀 이상한 것 갖지 않니? 그 때부터 생각했었는데.......직전 제자 자리도 거절해 버리고.”
“모르지. 그거야. 뭐.......나름대로 낭만적이지 않아? 옛 사부님을 잊지 못해서 다른 사부는 못 모시는 어린 제자, 그런 거.”
“어머, 어머. 설마 정말 그럴라구......혹시........실상은 다른 장로님들이 모두 안 받아 주려 했다거나 그런 것 아니겠어?”
“에이. 너무 불쌍하게 보는 것 아냐?”
“그럴 만도 하지. 그 선현 장로님도 장로님들 사이에선 그렇게 인정받는 분이 아니셨다는데 뭘. 그 제자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쩜.......얄밉기는.......니가 더 심하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그런 것 가지고 눈을 흘기고 그러니?”
“화내지 마. 화산파 계율 십 이계. 화산파 제자들은.”
“동문끼리 다투지 않는다. 알아. 알았어. 요것아. 그나저나 어떤 애인지 되게 궁금하다. 얘.”
“그러게. 걔 얼굴 보기 위해서라도, 얼른 천화관 시험을 통과해야 되겠다.”
“맞아. 매 사형 얼굴도 보고 말이지.”
끝에는 서로 손을 부여잡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여제자들이다.
화산파의 여제자 수는 전체 남자 제자들의 십 분지 일 정도. 숫자는 적다지만 그 중 매화검수까지 올라가는 제자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현 이십사 명 매화검수들 중에도 여 제자가 네 명이나 있으니까.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여제자들이 태생부터 무가(武家)의 여식이거나, 화산 속가제자들의 여식들이었니 기초가 탄탄하는 점.
어차피 매화검수는 후기지수 때나 받는 호칭, 어린 시절의 수련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화산의 무공 자체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본래 화산파의 검법이 날카로움에 정교함을 중시하는 무공이라 다른 문파의 무공들에 비하여 여인들이 익히기에 유리한 면이 있었다.
화산파의 여제자들.
엄격한 규율과 관리 속에서, 생활하는 그녀들이다. 하지만 십대 소녀들의 마음이란 어떤 곳에서 무엇을 배우든 비슷한 모양이었다.
남자 제자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뛰어난 사형제들에 대한 동경.
그런 여제자들 한 켠에서 나름대로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청풍이다.
하지만, 십 육세 청풍이 지닌 것은 그 돋보이는 외모뿐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까지 그녀들, 아니, 화산에 있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 * *
‘쉽지 않다. 쉽지 않아.
내공 심법의 깨달음이란 홀로 정진하여 이루어야 하는 법이라지만, 역시나 사부님의 도움 없이 익혀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삼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단공에 머물러,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구결의 이해도 충분하고, 내력도 쌓을만큼 쌓았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벽에 부딪쳤다. 어찌해야 할까.’
다른 장로께 여쭈어 보면 해답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 될 말.
‘아니야.’
청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열 여섯, 특별한 친우(親友)조차 없이 오직 자하진기만을 벗하며 살아온 그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사부님이 화산파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기공(氣功)만을 고집하다가 결국 비무에서 패배하여 돌아가신 분. 화산파의 자존심을 깎아먹은 치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그런 것은 귀를 닫아놓는다고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이야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말들을 듣고 있으면서,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자하진기는 사부님의 일생이 걸려있는 유작(遺作)인 것이다.
‘혼자 해야 돼.’
어찌 보면 어린 마음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사부의 고집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자하진기의 완성을 위해 융통성을 보이는 것. 청풍은 아직 성장하지 못했다. 청풍의 마음은 선현진인이 죽었을 때, 그 때 그대로, 마치 사부가 살아있는 것처럼,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었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안은 채, 장운대로 향한 청풍이다.
‘아! 오늘부터였나.’
바로 어제까지와는 다른 풍경이다.
화형권과 육합검법을 연마하는 대신, 모두 다 행낭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부터는 경공 수련이다. 화영보(花影步) 구결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날이 저물 때 까지 황석곡에 가서 경석을 모으고 돌아온다. 인솔하는 매화검수를 잘 따르도록.”
“예!”
보무 제자 이백이 절도 있는 대답소리를 울렸다.
경공 연마를 구실로 이백 여명이 경석 수집에 나서면 나머지 이백여 제자들은 이 장운대에서 무공 수련을 계속한다. 십일의 경석 수집이 끝나면 교대다. 그 다음 십일 동안에는, 장운대에 남았던 이백여 제자들이 약초 채집에 나서게 되는 구조였다.
청풍은 선발대다.
바로 오늘부터, 경석 수집에 나서야 했다.
‘시간이 아까운데.......’
청풍은 이미 두 번이나 이 경석 수집에 나가본 적이 있다. 상당히 곤욕스런 작업, 청풍은 사부의 죽음이후 처음으로 선검수로 진급하는 운대관 시험을 생각했다.
‘시험을 봐야 하나. 역시......’
그러고 보면 청풍의 나이도 이제 보무제자들 중, 적은 편이 아니었다.
십 이삼 세 보무제자들도 꽤 되는데다가, 계속하여 어린 제자들이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아래에서 많아지면 위에서 잘려나가는 이들이 있어야 하는 법.
이십 세 까지도 운대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보무제자에 머무른 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대부분 하산하기 마련이었으며 십 칠 팔세만 되도 스스로의 한계를 느낀 제자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가, 전체 보무 제자들의 숫자는 사, 오백 명 선에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탁! 탁! 타타탁!
황색 도복 이백여 제자들이 질서 정연하게 장운대 수련장을 빠져 나왔다.
가파른 길을 따라 길 아닌 길을 넘고, 보법을 펼친다.
워낙에나 험한 산길이라, 경신술의 숙달 없이는 함부로 다닐 수 없다. 어린 보무 제자들이라고 특별히 챙겨주는 것은 없었으니, 굉장히 엄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련방식이 된다.
구결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하지 못하면, 낙오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보무 제자들이 화영보의 구결을 되뇌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단 하나 청풍을 제외하고는.
‘더 진중하게. 마음을 조급하게 갖지 말고.’
청풍은 화영보의 구결을 따르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하진기 뿐이다.
화영보와 비슷한 동작을 쓰고 있기는 하다. 다른 이들 사이에서 굳이 눈에 띌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청풍이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하진기의 운용에 의해서다. 진기의 흐름 대로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자신만의 세계에만 빠져들어 있는 것이었다.
탁, 타탁.
“거기 조심! 가파르다.”
앞과 뒤에는 각각 매화검수들이 하나씩 따라붙어 있다.
청량한 목소리. 한 매화 검수가 이백 제자 모두에게 들릴 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폭을 작게 해라. 구결 암송을 잊지 마.”
그들의 역할은 보무제자들의 인솔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인솔 뿐 아니라, 경신술 수련의 사범 역할도 겸하는 것.
특히 힘들어하는 제자들을 보면, 보법 활용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고, 전체 일행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매화 검수는 다른 것 같다.’
요즘 들어 특히 느끼는 바다.
자하진기가 이단공의 막바지에 이르러 감각이 예민해진 점도 있겠지만, 그렇게 진기로서 느끼는 것 이외에도 매화검수들에겐 확실히 다른 제자들과 구별되는 특질이 있었다.
잘 벼려진 명검(名劍)과도 같은 기도다.
이십 대 정도의 후기지수들, 기껏 십년, 또는 십 수년의 차이밖에 없음에도 어떻게 그렇게 고강한 기운을 발할 수 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자하진기를 얼마나 더 익혀야 저 수준에 이를 수 있을까?’
한참 걸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자하진기가 최고라는 사부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겠지만, 문제는 청풍 자신이 느끼는 스스로의 자질이다. 스스로 천부적인 무재(武才)라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하진기 하나만을 익히기에도 벅찬 마당이다.
워낙에 화형권, 육합검의 투로를 등한시 한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또래의 제자들과 화형권, 육합검 비무를 할 때면 겨우 겨우 패배만을 면할 뿐,·통쾌하게 이겨본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직 멀었나보다. 나는.......’
흔들리는 눈빛에 안타까움이 묻어 나온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청풍은 자하진기를 모른다.
제 단전 안에 축기를 이루고 있는 진기의 수준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자하진기는 신공(神功)이다.
신공에는 신공에 어울리는 비기(秘技)가 필요하다.
진기를 활용할 수 있는 무공만 제대로 익힌다면, 다른 보무제자들은 결코 청풍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가르치는 무공들이 문제인 것이다. 비형권이나 화형권 정도로는 안 된다. 그 안에서도 나름대로 상승 요결을 끌어낼 수 있는 청풍이었지만, 그것으로는 진신 내공을 끌어낼만한 진결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뭐, 늦으면 어때. 언제든 될 수 있겠지.’
몇 걸음 더 가파른 산길을 타 내리는 사이, 청풍은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달리 했다. 조급함을 떨쳐버린 맑은 눈에 더 이상 실망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내공은.......경쟁하기 위해 익히는 것이 아니니까.’
낙천적인 성격이다.
이 역시 자하진기와 함께 사부님이 남겨준 것, 천성적으로 선한 심성에 더해진 또 하나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휘이이이잉.
주홍색 바위를 타고 부는 바람이 황석곡에 거의 다 이르렀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조금 더 가자 조그만 정자 하나가 보인다.
적색 기와, 분홍 장식이 조화로운 색조를 띄고 있는 매화정(梅花亭)이었다.
황석곡 측면 능선에 위치한 매화정은 화산의 장중함을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지다.
하늘 높이 솟은 연화봉과 운대봉을 한눈에 담아둘 수 있는 곳, 쉬어가는 구름이 머무는 아름다운 장소였다.
“다시 정렬하라. 여기까지는 갑조. 여기까지는 을조. 저번에 나누었던 방식대로 움직인다.”
매화정을 기점으로 이백여 제자들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져 황석곡으로 들어간다. 어린 제자들은 덜 위험한 동쪽 진입로로, 십 오세 이상의 제자들은 북쪽 진입로로 이동해야 했다.
처처처척.
금새 대열을 갖춘 제자들, 생활로 익숙해진 엄정함이었다.
“유 사형, 오랜만이네요.”
매화정을 지나치려니,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발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있다. 뜻밖의 일.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소녀가 거기에 있었다.
“연 사매. 오랜만이다. 언제 올라왔느냐.”
연 사매라 불린 이. 매화정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는 여인임에도 무척이나 큰 키를 지녔다. 늘씬한 체구에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가니, 그 모습 가히 선녀에 비길 정도라, 그녀를 보는 보무제자들의 눈이 모두 다 휘둥그레졌다.
“어젯 밤에요. 보무제자들인가요?”
“그래.”
“수고 하셔야겠네요. 보무제자들도, 모두들 고생이군요.”
스스로의 위치에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성정을 지녔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보무제자들을 향하여 웃 음짓는 그녀다.
가파른 산을 탄 제자들의 피로를 한 번에 앗아갈 만큼 시원한 미소였다.
연선하. 매화검수다.
방년 이십 오세, 오년 전 이십 세의 나이에 소요관을 통과한 여걸이었다.
이제 겨우 입문한 제자들이야 모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무제자들이 그녀를 안다.
워낙에 유명하니까.
잘 알고 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천재 여협, 아기자기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에 깊고도 맑은 눈을 지닌, 대단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검수였다.
“왠 여자 아이냐?”
“하하, 딸 하나 낳았어요.”
약간은 산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밝은 성격을 지녔다.
그 모습에서 섬서성을 떨쳐 울리는 천류검의 달인, 천류여협의 명성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듯 싶다. 그래서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멋진 여자였다.
“........그 괴이한 농담은 여전하구나. 상원진인께서 들으셨다가는 징벌을 면치 못할 이야기다.”
“에그, 딱딱하기는. 유사형도 여전하네요 뭘. 이 아이는 그 산서신협 서자강 대협의 장중보옥이죠. 인사드려라. 얘야.”
열 두세 살 정도의 귀여운 여자아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수줍어하는 기색은 찾아 볼 수 없다. 도리어 한 발 나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서영령이라고 해요.”
맑은 목소리다.
아직은 어리디 어린 소녀지만, 그 얼굴에서 앞으로 대단한 미인이 될 조짐을 볼 수 있었다. 매화검수의 정기어린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태도하며, 움츠러들지 않는 대담한 모습이 또 한 명의 여협 탄생을 예고하는 듯 했다.
“나는 매화검수 유자서다. 대협을 닮은 듯 대단한 기질이 ,보이는구나.”
“감사합니다.”
서영령이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옆에서 서영령의 어깨를 감싸 안은 연선하가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귀엽죠? 나도 나중에 딸이나 낳을까 봐요.”
“누가 너를 데려가겠느냐. 걱정이다.”
“어머, 농담도 할 줄 아네요. 기억해 두겠어요. 서자강 대협은 지금, 장문인을 뵙고 있을 거구요. 아이는 화산 구경이나 시켜줄 겸, 데리고 나온 거죠.”
“그렇구나. 서 대협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다더냐.”
“잘은 모르겠어요. 저 같은 경우, 저번 강호행 때, 우연히 친분을 쌓을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이번에 들어오면서 만나게 되었어요. 서 대협 말씀으로는 그냥, 화산파가 어떤지 궁금해서 왔다 하시대요. 영령의 말벗이나 되어 달라고 부탁하시던데........뭐, 달리 말하자면 놀러온 거라 할 수 있대요.”
“그러냐.”
유자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산서신협만한 고수가 아무런 목적 없이 놀러 온다? 화산파에? 모르는 일이다.
산서신협은 그 무공이 화경에 이른 절정 고수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근본 내력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직접 그 무공을 견식해본 사람조차 드물어, 출신 문파, 뒷 배경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경계를 해 볼만한 이라 할 수 있다.
경각심을 일으키던 유자서의 시선이 서영령에 닿았다.
뭐가 어찌되었든 산서신협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온 것은 아닐 것 같기는 하다.
순진한 눈빛의 서영령.
어린 딸이 여기에 있다.
화산파 제자들이 어떤 이들인지 궁금했던 듯, 보무제자들을 하나 하나 찬찬히 훑어보고 있는 서영령이다.
문제를 일으킬 요량이었으면, 이처럼 어린 딸을 동행하고 이곳에 오지는 않았으리라.
“그럼 가 봐야 되겠다. 간만에 보니 반갑구나. 가끔 본산에도 올라오고 그러거라.”
“알았어요.”
매화검수 유자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재빨리 대열을 수습하고 보무제자를 이끈다. 저녁까지 목표량을 채우고, 장운대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꽤나 촉박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썰물처럼 이동해 버린 후.
서영령이 연선하를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 있잖아. 화산파 제자들 중에도 굉장히 잘 생긴 사람이 있네.”
“누가? 유 사형? 설마.”
“당연히 아니지. 중간쯤에 있던 제자 말야.”
“그래? 누굴 말하는 거지?”
“못 봤어? 눈에 띄던데. 그런 미남은 흔치 않아. 나이가 들면 더 멋있어 질걸?”
“아이고. 못 말린다. 너 몇 살이니? 벌써부터 남자 이야기를 하고.”
“왜 어때서?”
“말을 말아야지.”
“뭐, 언니 눈에는 무공 강한 사람밖에 안 보일테니까.”
“점점.......대체 누가, 얼마나 잘 생겼길래 그래?”
“나중에 한 번 알아봐. 언니. 아마 여기 여제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할걸?”
“내 참. 여기 제자들이 뭐 그런 것 신경 쓸 것 같니?”
“신경 쓸걸? 언니랑은 다르잖아. 언니는 천재고. 다른 언니들은 천재가 아니니까.”
“벌써부터 이렇게 여우같아가지고, 나중엔 얼마나 속을 썩이련지.”
“언니, 정말 알아보고, 꼭 가르쳐 줘야 돼? 이름이 뭔지 말야.”
“알았다. 알았어. 이 꼬맹아.”
어느 봄 날의 매화정이다.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다.
하늘은 그 수레바퀴를 천천히, 그리고 단호하게 굴려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 었다.
경석은 악기를 만들 때 쓰는 돌이다.
두 개의 돌을 마주쳐 보았을 때, 소리가 가볍고 맑게 울려야 진짜였다.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는 돌들은 아무리 모아도 쓸모가 없었다.
경석을 모으는 작업은 반나절에 걸쳐 진행된다.
반 나절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황석곡에 널려 있는 돌맹이들 사이사이, 한 발작을 움직일 때도 화영보에 의해 움직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제대로만 한다면 분명 좋은 수련방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배우는 보무제자들이나 그들을 감독하는 매화검수들이나 그런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매화검수 한 명이 인솔하는 제자들만 백 명.
매화검수들이 그들을 일일이 봐 줄 수는 없다.
스스로 열심인 제자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 수련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는 것이다.
특히나 청풍은 처음부터 화영보의 연마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무엇을 배우든, 따르는 시늉만을 한다. 내면에서는 온전히 그 혼자서 쓰는 시간이었다.
간간히 떠오르는 약간의 상념들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자하진기 연마에 전념한다.
‘매화검수.......여자인데도 그렇게 대단하다니.’
지금은 잠시의 휴식, 상념의 시간이다.
매화검수 연선하의 모습.
연약한 이들. 여인은 보호해야 할 존재. 사부님께 배웠던 것인데, 그가 본 연선하는 그 가르침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딱, 따악, 딱.
‘너무 시끄럽구나. 청각을 줄이자. 여긴.......안 좋아. 생각하기에도, 수련하기에도.’
돌을 맞부딪치는 소리가 석벽을 울리며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안 좋은 돌을 걸러내기 위해 모두가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집중하자. 거의 되었어. 이제 거의 안 들린다.’
오감을 통제하는 청풍이다. 오감을 각각 따로. 청력을 최소한으로 줄여 소음을 막아내고 있었다.
‘훨씬 났구나.’
골몰히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경석들을 골라내며 작업을 멈추지 않는 상태다.
장운대에서 무공을 배울 때와 같다.
겉으로는 마치 육합검을 펼치는 것 같아도, 내부에서는 완전히 다른 일이 일어난다.
바깥과 안이 다른 것.
그것이 가능한 것은 자하진기 덕분이다.
오감과 정신의 분리였다.
청각을 막아 놓았어도, 몸은 듣고 있다. 보통 기이한 일이 아니었지만, 정작 청풍은 그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모른다. 신비함을 일상으로 만드는 것. 자하진기의 공능이었다.
‘여자.......매화검수.......뭐 매화검수니까 그럴 수 있겠지.’
원래 하던 생각으로 돌아간 청풍이다.
여인이라도, 강할 수 있다.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헌데........그 여자 아이는 뭘까. 그렇게 어린데도, 내력이 상당한 것 같았는데.......’
연선하의 옆에 있던 서영령을 떠올렸다.
작고, 어리지만 자유분방한 생기(生氣)가 기억에 남는다. 서영령은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다. 미묘한 차이. 청풍은 그런 것도 분간해 낼 수 있었다.
‘세상은 정말 넓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확실히, 운대관 시험을 보기는 해야겠다.’
선검수가 되어도 넘어야할 관문이 많다.
천화관을 통과하여 평검수가 되어야 비로소 강호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런 면에서는 보무제자가 선검수보다 더 자유로울지 모른다.
보무제자에게는 화산파의 진산 무공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입문에서 하산이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선검수는 처음으로 상승 무공을 접하는 위치라 강호행에 큰 제약을 받게 된다. 혼자서는 절대 산 밑으로 내려갈 수 없다. 무공 유출도 유출이지만, 다른 위험도 많기 때문이었다.
강호행에 제약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보무제자들 보다 훨씬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이 선검수다. 적어도 이런 쓸데없는 노동에는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선검수가 되어서 배우는 무공들에 해답이 있을지도 몰라. 더 나아갈 수 있는 길.’
운대관 시험을 고려하게 된 청풍이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없었다.
선검수가 되어도 해답은 없다.
오행기와 구소공, 암향표, 천류검, 태을검에는 그가 구하는 진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기(氣)는 느끼고자 하는 사람,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 힘을 빌려준다.
준비가 안 되었을 뿐.
그저 청풍은 그 해답이 자신의 안에 이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 * *
‘이렇게였나.’
경석의 수집이 끝나던 밤.
마음먹고 시전해 본 화형권은 무척이나 어색했다.
세 번을 연이어 펼쳐보고, 비형권과 이형권도 다시 한번 되 짚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돌아온 화형권에 이르러, 청풍은 문득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뭔가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변한다?’
이상하게 달랐다. 진결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 전의 권형과는 차이가 있다. 상원진인이 보여주던 것과는 어딘지 다른 권법이 되어가고 있었다.
‘왜지?’
비무 할 때는 이렇지 않았다.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라 생각하고 권형대로만 내 뻗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몸, 진기가 저절로 그를 이끌고 있다.
화형권의 투로 그대로가 아니라, 조금 더 빠른 궤도, 조금 더 날카로운 기세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 이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 권각을 휘두르다 보니, 화형권의 도중에 비형권의 동작과 구결이 끼어들었다. 조금 더 지나자 처음 배웠던 이형권의 구결까지 섞여 들어왔다..
파악.
어느 순간, 말아 쥐었던 주먹이 펴졌다.
찌릿 찌릿 팔을 타고 올라간 진기 때문이다. 끝까지 이른 진력이 손가락을 펼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팡! 파팡!
이제 청풍이 펼치는 것은 권법이 아니라 장법이었다.
공수가 자유롭게 조화되어 있는 상승 무공.
쳐내는 장력에 날카로움과 정교함이 함께 깃들어 있는 강력한 무공이었다.
‘안 돼.’
도취된 듯 장법을 전개하던 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쳐야 한다. 잘 멈추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끊어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것은 안 되는 일이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정해진 투로에 따르지 않고 함부로 무공을 변형시키는 것은 이 화산파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새 무공의 습득과 연공.
매화검수가 되기 전까지는 금기다.
아무리 큰 깨달음을 얻었더라도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장로들이 직접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이상, 다른 무공을 익히다가는 엄벌에 처해진다.
청풍은 자신도 모르는 새 중대한 잘못을 저질러 버린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규율을 어긴 마당이다.
그럼에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더 알고 싶은 기분, 파고들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움직였어.’
느꼈기 때문이다.
전에 없던 자하진기의 요동을 감지했다. 새로운 무공, 새로운 진결. 지대한 유혹일 수밖에 없었다.
‘펼쳐 볼 수 없다면 생각해야 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자하진기를 움직이게 만들었는지.’
삼단공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좌공, 입공, 동공만으로는 부족하다.
뭔가 계기가 있어야 되는데, 그 실마리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자하진기의 구결을 곱씹으며,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이형권, 비형권, 화형권의 투로를 검토해 본 것도 물론이다.
‘세 무공, 처음부터 하나였는지도 몰라.’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느낌이다.
점차 그 실체에 접근해가는 청풍은 장운대에서 있었던 육합검법의 수련을 건성으로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다시 한번 그것을 펼쳐 보기로 결심했다.
풍암당 앞 조그만 공터, 사위를 분간하기 힘든 어두운 밤이다.
야조(夜鳥)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때.
‘아무도 없는 것 맞겠지.’
청풍은 주위를 면밀히 살핀 후, 생각해 놓았던 구결들을 재차 떠올려 보았다.
누가 보면 큰일이다. 풍암당 안에서 펼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너무 비좁아, 어쩔 수 없이 밖에 나왔다.
떨치기 힘든 불안감이다.
꼭, 등 뒤에서 누군가 그를 쳐다보고 있을 것 만 같았다.
‘해 보자. 어차피 이 시간에 이 곳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
천천히 이형권의 투로를 밟아가는 청풍.
청풍은 자신의 불안감, 자하진기가 가져다 준, 오감 이상의 감각을 믿는 편이 좋았을련지도 모른다.
그의 뒤, 풀숲 사이 어둠 속에 정말로 청풍을 쳐다보고 있는 두개의 눈동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형권이네.’
두개의 눈동자.
그 주인은 청풍의 투로를 보며 생각했다.
발을 내 딛는 동작, 주먹을 뻗는 자세가 이형권의 첫 초식, 선권좌보 그대로였다.
‘정말 잘 생기긴 잘 생겼구나. 그런데 이 야심한 시간까지도 겨우 이형권이라니. 무공에 있어서는 그렇게 눈에 띄는 이가 아니라고는 들었지만.......보무제자.......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꼭 알아봐 달라는 부탁에 이런 편법을 썼지만, 어느 정도 실망감이 든다.
잘 생긴 것이야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 야심한 밤까지 기껏 이형권을 수련하고 있다니, 정말 기대 이하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제법.’
조금 보고 있으려니, 비록 이형권이라고 할지나마 제대로 펼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결을 확실하게 짚어내고 있다. 보통 이상은 되는 모양이었다.
‘열 여섯........저 때, 내가 익히던 것은 옥녀검이었지. 아마.’
이형권 정도는 이미 열 두셋 부근에 수련을 끝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남들보다 몇 년씩 앞서나갔었던 바. 그리고 다른 매화검수들도 모두 그런 이들 뿐이라 더더욱 비교가 되었다.
얼굴은 잘 생겼지만, 그것으로 그만이다.
듣던 그대로.
별반 볼 것 없는 보무제자인 것이다.
‘영령에겐 관심 끊으라 해야겠구나.’
외모 뿐이라면, 흥미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서영령이야 아직은 어려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좋아하겠지만 얼마 안 있어 생각이 바뀌리라. 영리한 아이였으니까.
‘괜한 걸음이었네. 돌아가자.’
매화검수 연선하.
시선을 거두려 할 때다. 문득 마지막으로 청풍을 바라본 그녀.
그녀의 눈이 크게 치떠진 것은 한 순간이었다.
‘저, 저것은!!’
이형권이 변하고 있었다.
권법이 장법으로 전환되며 움직임이 빨라진다.
장쾌한 몸놀림. 정교한 손속.
잘 알고 있는 무공이었다. 청풍이 펼치고 있는 것은 매화검수들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비기 중의 비기였다.
‘태, 태을미리장(太乙迷離掌)!!’
그녀는 진정으로 놀랐다.
태을미리장은 장로들을 제외하곤, 단 여덟 명 있는 매화권사들이나 투로를 풀어낼 수 있는 상승의 무공이다.
자신도 모르게 풀숲에서 일어난 그녀다.
넘실대는 진기의 흐름.
이것은 진짜다. 흉내가 아니라, 진짜 태을미리장이었다.
팡! 파파팡!
스스로의 무공에 도취되어 그녀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청풍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선하는 놀라움을 가라앉히며 잠자코 청풍의 장법을 지켜보았다.
‘조금은 다르다. 아직 완전하진 않아.’
태을미리장은 태을미리장이지만, 다소 부족함이 엿보이고 있다.
당연한 일일까. 그렇다 해도 충격적인 광경. 이런 것을 보게 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었다.
어느 순간이 되자, 청풍이 고개를 손을 멈추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제대로 되지 않는 듯 하다.
마치 처음 펼쳐본 것 같은 모양새였다.
“누구에게 배운 거지?”
결국, 직접 물어보고 만 연선하다. 화들짝 놀라는 청풍의 얼굴. 곤란한 표정이 만면에 떠올랐다.
“아.......그것이.......”
제 사부에게 배웠을 리는 없다.
그녀는 미리 들은 바가 있다.
청풍의 사부가 선현진인이었다는 것.
선현진인이 유명을 달리한지가 벌써 삼년 째다.
열 셋의 나이에 태을미리장을 익혔다는 것은 제아무리 희대의 천재라고 해도 어불성설이다. 아니, 그만한 천재라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화형권을 연마하다가.......그러니까.......구결이, 섞이기 시작하여.......”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당황한 청풍이다.
횡설수설에 가까운 목소리.
연선하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상한 녀석이다. 이리도 잘 생겼으면서, 또한 전혀 예상 밖의 무공을 보여주었으면서, 말하는 품은 또 왜 이런지 알 수가 없었다.
“훔쳐 배우기라도 한 건가?”
물어보는 스스로도 웃기다고 생각한 질문이다.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청풍.
어리다.
열 여섯이라고 했는데, 눈 안에서 느껴지는 나이는 그 정도가 아니다. 아이의 그것처럼 순수하고도 맑은 빛. 이해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그럴리야 없기는 하지. 그것, 어떻게 가능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
태을미리장은 훔쳐 배우려 한다고 훔쳐 배울 수 있는 성질의 무공이 아니다. 게다가 태을미리장을 수련하는 이들이라면 매화권사 이상의 고수들, 청풍 정도가 눈에 띄지 않고서 수련 장소까지 접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하다 보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함부로 무공을 변형시킨 것.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무슨 소리야. 무공의 변형?”
연선하는 또 한번 놀랐다.
“설마하니........너,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펼친 거야?”
“예? 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지.
“태을미리장. 네가 펼친 무공의 이름이다.”
“태을......미리장........”
“보무제자들은 들어본 적도 드물겠지. 본 적은 더더욱 없을 것이고. 다시 한번 정리하자. 그러니까, 네 말은 그냥 화형권을 펼치다 보니, 태을미리장이 나왔다 이거지?”
“예.”
“내 참. 자세히 좀 설명해 봐라.”
연선하의 재촉, 청풍은 능숙하지 않은 말솜씨로 천천히 그 자초지종을 설명해 나갔다.
화형권에 비형권의 구결이 간섭해 들어오던 일.
세 무공의 근본이 하나가 아니었을까 했던 가정.
그리고, 힘이 흐르는 길.
다 듣고 난 연선하가, 결국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만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몸이 저절로 따라 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청풍 자신도 그 이치를 잘 모르는데.
“그래. 그렇다고 쳐! 그런데 왜 넌 아직도 보무제자야?”
“그것이.......”
“보무제자 수준이 아니잖아. 너.”
“굳이 선검수가 될 필요성은 없다고......하지만 요즘에는 좀......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하! 무슨 소리야! 너는 매화검수를 목표로 하지 않아?”
“매화검수도.......특별히........”
“하! 정말 이거........”
거의 화를 낼 듯한 얼굴이다.
선검수를 마다한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매화검수에도 관심이 없다?
말도 안 된다.
일찌감치 포기한 것이라면 모르되, 그런 것은 아닐 거다.
말 그대로 특별히 염두에 둔 바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처음 봤다. 처음 봤어.’
매화검수.
매화권사.
화산파 젊은 제자들이 예외 없이 지니는 꿈의 지위다.
이미 이루어 놓은 그녀가 잘 안다.
매화검수가 가지는 권한과 자유. 그만한 책임과 의무가 따르지만, 여기까지 올만할 가치가 충분했다.
매화검수는 가장 중요한 화산파 십이 계율 이외엔 모든 면에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다. 문파의 허락 없이도 혼인할 수 있으며, 협의에 어긋나지 않는 한, 어떠한 비무와 살인도 가능하다.
그 뿐인가.
화산파의 어떤 무공이라도 배울 수 있고, 제자를 가르칠 수도 있다. 필요한 돈, 은자는 쓰고도 남을 만큼까지 얼마든 제공되며, 무엇이든 부족함이 없도록 온갖 혜택이 주어진다.
엄정한 화산파의 규율 속에서, 이렇게 멋대로 남자 제자들의 거처를 들락거릴 수 있는 것 역시 그녀가 매화검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평검수나 선검수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
혼인은커녕, 이성을 만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어느 것 하나에도 소소한 제약이 따르니, 누구든 기를 쓰고 매화검수가 되길 원하는 것이다.
“내 눈으로 본 것이니까 믿을 수밖에 없지만, 글쎄.......이것을 알리는 것이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받아들이기 힘들거야. 어떤 조치가 취해질지........”
“.........”
“그래서, 운대관에는 지원할 생각이 있다고?”
“예.”
“아서라.”
“예?”
“내 생각엔, 차라리 이곳에서 무공을 다듬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운대관과 천화관을 단번에 통과할 수 있다면 모르되, 선검수는 어떤 면에서 도리어 보무제자들보다도 못한 점이 많어. 모든 것이 단체 생활로 이루어지거든. 겪어 보지 않으면 몰라. 배우는 무공은 보무제자로서 배울 때보다 훨씬 뛰어난 것들이지만, 너에게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 들어. 어떤 무공도 태을미리장에는 비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거기서도 할 수 있지 않나요.”
“옥로암 생활은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 아, 남자 제자들은 옥천각이었던가. 여튼, 거기에 들어갔다가는, 아마 태을미리장을 다시 펼쳐볼 기회가 없을 거야.”
“........”
“잘 생각해. 오늘 너는 경솔했어. 내가 아닌 다른 이였으면 집법 장로님께 보고부터 했을 거다.”
“예.......”
“난 재능을 지닌 사람을 알아. 너한테는 그게 보여.”
“.........”
“여기까지 올라와. 매화검수까지. 검을 잡고 싶지 않다면 매화권사로라도. 선현진인께서 남기셨다는 심법도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니까. 여기까지 올라와서 진인의 역작(力作)을 증명하는 거다. 이번 일을 눈 감아 주는 대신에 꼭 이루어야 되는 약속이야. 알겠지?”
연선하가 시원스런 웃음을 지었다.
신뢰가 가는 여인이다. 어머니가 있다면 그런 느낌일까. 엉뚱한 생각이었겠지만, 청풍이 느끼는 바는 그러했다. 사부님 이후, 진심으로 대해주는 첫 사람. 청풍은 굳게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해야 할 일.
새롭게 나아가야 할 목표가 그 싹을 틔우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은 빠르고도 빠르게 지나갔다.
삼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풍은 태을미리장을 또 한번 변화시켰다.
여전히 보무제자로 머무른 채, 계속되던 수련이다.
자하진기는 마치 태을미리장의 진결을 흡수해 버리기라도 하듯, 하나 하나 동작들을 지워버리더니, 종국에는 좌공 처럼 진기의 흐름을 보조하는 운공법으로 바꿔놓고 말았다.
청풍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형(形)은 사라지고 기(氣)만 남았다.
그날 이후에도 몇 번인가 더 찾아왔던 연선하, 강호로 나가버려 일 년 째 만나지 못한 그녀도 태을미리장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을 알면 크게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어찌 보면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을지.
저번에는 그저 태을미리장이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누군가 알게 되면 쉽게 넘어가지 못할 터다.
어겨서는 안 되는 금기.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태을미리장의 본모습일 것 같은 느낌이다.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운공 속에 녹아든 것이야말로 태을미리장, 아니, 태을미리공의 진정한 실체인 것 같다는 말이었다.
태을미리공을 받아들인 자하진기의 성취는 어느 새 삼단공의 초입을 훌쩍 넘어서 버렸다.
삼단공.
진기의 활용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상태. 범위를 확장시켜나가던 청풍이 다음으로 손대게 된 것은 다음 아닌 육합검법이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해 가는 청풍, 육합검법에서도 새로운 무공을 발견해 냈다.
‘이렇게 움직이면, 음. 맞아. 이렇게다.’
목검을 휘두르는 기세가 굉장하다.
약관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청풍은 이제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헌앙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여전히 진신 실력을 발휘하지 않아, 보무제자들 사이에서는 그냥 그런 정도로 평가받는 중이었지만, 작년부터 새롭게 장운대 사부를 맡은 소현진인은 청풍에게서 뭔가를 느낀 듯, 최근 들어 다음 운대관 응시를 권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셋인가?’
매일 같이 두 번 이상 주변을 살피고는 수련에 들어간다. 수련을 할 때도 동작을 최소한으로. 오감을 열어두고 누가 접근하든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이거다. 육합은 압축될 수 있어. 이것이 핵심이다.’
육합검법에서 뽑아낸 것은 삼(三)이란 숫자다.
육합 십이장, 삼십 육초가 삼장 구초로 최적화 시키고 나자, 종전의 검법보다 훨씬 강력한 검법이 나왔다.
검법을 이해하는 것은 태을미리장보다 어렵다.
순수한 육체로 발하는 기(氣)가 아니라, 검(劍)의 기(氣)를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무공과 씨름하던 청풍은 뒤에서 들려온 맑은 목소리를 맞이했다.
연선하.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이었다.
“이번에는 삼릉검(三凌劍)이네. 홀로 매화삼릉검(梅花三凌劍)을 익혀내는 보무제자라니. 다들 신기해 할 거야.”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오용 사현.
소요관에서 시험하는 오용 중에 암행(暗行)의 관문이 있는 만큼, 마음먹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매화검수는 제아무리 자하진기가 뛰어나도 아직 잡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러게.”
“일이 많으셨나봐요.”
“응. 강호 전체가 난리야. 지금.”
“무슨 일 있었습니까?”
“있었지. 온갖 기이한 요물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가지고.”
“요.......물이요?”
“장강의 교룡출세 몰라? ‘교룡출세 이후, 수많은 영물과 귀물들이 출현하니 상서로운 징조일지 환란의 징후일지 알 수가 없도다.’ 요즘 강호는 온통 이 이야기뿐이야.”
“이상한 이야기네요.”
“이상한 이야기지.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기도 하고. 아무도 안 가르쳐 줬지? 여하간 보무제자들에 대한 대우가 너무 박한 것 같아. 뭐 알아봤자 좋을 것도 없지만서도.”
“대단히 골치 아픈 일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래. 이 화산에서도 몇 놈 나타났었다는데. 어찌 조용조용 잘 처리한 모양이야. 듣기로는 나타난 귀물들도 이 연화봉 주변에는 얼씬도 못했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다들 몰랐던 것 같아. 도문에서는 꼭꼭 숨겨 두었던 매화술사들을 처음으로 내 놓았다는 이야기도 들려.”
“예에......”
그러고 보면 몇 달 전, 갑작스레 약초 채집과 부옥, 경석 수집이 한참 동안 중단된 적이 있었다. 무슨 괴사(怪事)가 있었다는 것 같았는데, 청풍으로서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신경 쓰지 않았었다. 도리어, 홀로 수련할 시간이 더 생겼다고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육합검이 매화삼릉검의 기초라는 것은 평검수가 되어서야 가르치는 부분이야. 거기까지 이른 것을 보면, 확실히 넌 능력이 있어. 아무도 일러주지 않은 상태에서도 삼릉검을 찾아낸 제자는 이제껏 몇 명 없었다고 하거든.”
“그런가요.”
“그래. 이제 슬슬 천화관을 생각해도 되겠어. 무공이야 충분하지만 문제는 나머지야. 오용 중 무공을 뺀, 전술, 암계, 추적, 암행. 이것들, 하나 하나가 무척 어렵지. 다음은 사현인데, 의협과 도학은 그렇다 쳐도, 지식과 지략 두 가지는 굉장히 힘들어. 오랫동안 준비해야 할거야.”
“오용 사현은.......아직 육력도 다 못했는데요.”
“오용 사현을 전부 습득했다 하면, 운대관 육력은 아무것도 아니야. 문제는.......운대관과 천화관 시험을 한꺼번에 보려면 한참 기다려야 된다는 것이지. 운대관이야 수시로 열린다지만 평검수 숫자도 자 차버렸으니, 이번 해 천화관 시험은 아마 없을거야. 내년에도 없을 수 있고.”
“아, 이번 해에는 없나요?”
“응. 내년에는 종남과 화산의 정기적인 회합이 있거든. 저번에 종남이었으니, 이번에는 화산에서 하겠지. 그것 때문에라도 천화관은 미뤄질 거야. 회합 때에는 대대로 두 파사이에 비무 시합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 나가는 것이 주로 평검수들이거든. 천화관을 막 통과한 제자들을 당장 내보낼 수는 없으니까, 새로운 평검수들을 뽑지 않는 것이지.”
“그렇군요.”
“차라리 잘 되었어. 어차피 준비하는 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니까. 아니면, 천화관 뿐 아니라 아예 소요관까지 한번에 돌파해 보는 것도 괜찮고. 보무 제자에서 곧바로 매화검수라면 정말 대단한 주목을 받겠지. 필요한 서적들은 내가 구해다 줄게.”
조그만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연선하가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리는 그녀. 청풍이 옆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진심이 깃든 말이다. 잘생긴 외모는 차치하고서라도 마음을 다 내보여 줄 듯 꺼내 놓은 목소리는 가히 비교할 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승사자의 얼굴에도 미소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맑고도 듣기가 좋았다.
“아, 잊을 뻔 했다. 이것, 너에게 전해주라던데.”
연선하가 미소로 청풍의 말에 화답하고는, 주섬주섬 하나의 물건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게 뭐죠?”
“목걸이. 여기서 난 부옥으로 만든 거라더군.”
우윳빛 옥석(玉石)을 길쭉하게 세공하여, 굵은 태사(太絲)줄에 매달아 놓은 목걸이였다.
“누가 이걸........”
“그러니까 네가 감사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 목걸이를 준 아이라 이 말이지. 그 아이가 그랬어. 널 더 멋있는 남자로 만들어 달라고 말야. 원래는 매화검수로 올라올 때까지 손을 대지 않으려 했는데, 하도 재촉을 하더라고.”
“예? 아니, 무슨.......”
“잘 해봐. 나와 한 약속과는 별개니까.......나한테는 네 성취만 보여주면 되지만, 그 아이는 더 많은 것을 바랄지 몰라. 매화검수가 되어 강호로 나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때 쯤 이면 그 아이도 미녀가 되어 있을 거다.”
청아한 웃음소리만을 남긴 채,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지는 연선하다.
청풍으로서는 혼란스러울 따름.
목걸이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일단 품속에 간직해 두었다.
‘언젠가는 돌려줘야겠지.’
그로서는 받을 이유가 없다. 문득, 이년 전 매화정에서 보았던 서영령이 떠오른다.
왠지 모를 느낌. 나름대로 근거 있는 추측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실제로 그녀이든. 다른 누구이든지간에, 딱히 기꺼운 일은 아니다. 도움을 주겠다는 것은 진실로 고맙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자하진기.
그것 하나면 된다. 그저 지켜봐 줄 뿐인 연선하의 존재까지.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그 홀로도 잘 해 낼 수 있는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