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백호검(白虎劍)

1 2026.07.23

화산질풍검(華山疾風劍)

2화. 백호검(白虎劍)
사방신검(四方神劍) 중 서방검(西方劍).
서천신검(西天神劍). 백호신검(白虎神劍).
검인(劍刃) 백색. 재질(材質) 불명(不明).
검신(劍身) 이(二) 척(尺) 삼(三) 촌(寸).
검병(劍柄) 구(九) 촌(寸).
검폭(劍幅) 사(四) 촌(寸)의 양수검(兩手劍).
동방(東方) 이족(異族)의 고대(古代) 병기(兵器)라는 설이 있음.
파마(破魔)의 공능(攻能)이 지대하여, 어떤 귀물(鬼物)도 접근할 수 없다 전해짐.
연(連)이 닿는 자에게 무공(武功)을 선사한다는 전설이 함께 함.
마기(魔氣) 봉쇄 능력. 내력(內力) 증폭 능력 유(有).
제작자 불명.

한백무림서 병기편(兵器篇)
제 일장 검(劍) 중에서.

이십 삼 세.
청풍은 아직까지도 보무제자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천화관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화관 시험 자체가 없었으니, 새로운 평검수도 없다.
청풍으로서는 선검수에 뜻이 없는지라, 천화관을 기다리며 보무제자로 눌러 앉은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삼년 전에 있었던 종남과 화산의 회합 결과에 기인한 일이었다.
평소처럼 이겼더라면, 정상적으로 천화관이 치루어 졌을 터.
져버린 것이 문제였다.
이년이나 삼년. 정기적으로 벌어지는 대무(對武)의 회합이다.
장장 삼일 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삼십 번의 비무.
화산파는 십이승 밖에 챙기지 못하면서 이십여 년 만에 첫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다.
무승부가 네 번. 십 사패.
근소한 차이지만, 졌다. 그것도 화산 본산에서 일어난 패배였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만큼, 교류가 잦고 서로 간에 경쟁의식이 강한 두 문파다.
구대 문파의 두 곳.
선의의 경쟁을 벌이던 그 동안 화산파는 언제나 승자의 위치에 있었다.
두 회 이전에는 이십 번 비무에 십팔 승의 압승을 거두었었으며, 바로 그 전 회합 때도 삼십 번 비무에 이십 이 번의 승리를 얻어냈었다.
근 이십년의 세월동안 한번의 패배도 없었을 정도.
헌데, 그 때는 달랐다.
졌다.
그 동안의 전적을 생각한다면, 참담하다고 할 정도의 결과였다.
안이했던 마음가짐에, 절치부심한 종남파다.
예정된 결과?
아니다. 전에도 마찬가지. 종남파는 이기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었고, 화산파는 승리자의 입장에서 여유로움을 보였었다.
그러면서도 쭉 이겨왔다. 받아들이는 인재의 숫자, 보유하고 있는 고수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그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예상은 깨졌다.
종남파는 여전히 화산파보다 적은 규모에, 지닌 바 힘도 약했지만, 이겼다.
상황이 변한 것이다.
화산파 장문인은 이 일을 전에 없이 중대한 사안으로 받아들이고는 장로들을 불러모아 해결책을 모색했다.
화산파 장문인, 천화진인(天華眞人).
달리 천검진인(天劍眞人)이라고도 불리는 불세출의 고수로서, 젊은 나이 장문인에 올라 화산파의 중흥기를 주도한 큰 인물이다.
그는 이 사태의 원인을 평검수들의 수련 부족에서 찾았다.
확고한 매화검수의 자리.
평검수가 되어 있어도, 매화검수를 넘보기엔 자질과 무공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선택된 자가 아니라면 올라가기 힘든 위치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그렇게 되니, 되려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검수로서도 규율만 완벽하게 지키면, 어지간한 혜택을 모두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안주하는 이들이 생기는 것이었다.
머물러 있고자 하는 자에게 발전은 없다.
실제로 이번 대무 회합에서 패배한 제자들은 하나같이 평검수들 뿐이었다.
장문인은 천화관을 막았다.
회합이 끝나는 대로 뽑으려고 했던 계획까지 백지화 시켰다.
더 이상 평검수의 숫자를 늘리지 않은 채, 평검수들을 정예화 시키려는 의도였다. 평검수의 선발 간격을 오년으로 대폭 조정하였으며, 그 조건도 훨씬 까다롭게 바꾸어 놓았다.
한참이나 평검수를 뽑지 않으니,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포기하고 하산하는 제자들이 늘어갔으며, 그런 현상은 보무제자들보다 선검수들 사이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천화진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삼년 동안 평검수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에만 전념했다. 더불어 매화검수들이나 매화권사들게도 어려운 임무들을 맡기면서 실력을 가일층 진보시킬 수 있도록 혹독하게 몰아 붙였다.
그러하니, 보무제자들과 선검수들에 대한 관리는 소홀해 질 수 밖에 없다.
일부러라도 풀어주는 것.
여기서 그들까지 쥐어짠다면 남아날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천화진인의 뛰어난 문파 운영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약간은 자유로워진 규율과, 더 많아진 개인 수련 시간이다.
그것은 곧 청풍에겐 더할 나위 없는 복(福)으로 작용했다.
누구하나 건드리는 사람이 없다.
보무제자들 사이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하는지라 특별한 친우도 없는데다가, 유일하게 교류가 있는 연선하도 거의 산에는 붙어있질 않아 도통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홀로 된 청풍.
온전히 자하진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태을미리공, 매화삼릉검을 얻으면서 운공(運功)의 묘리를 깨우친 상황, 그의 내공은 날이 갈수록 정심해져만 갔다.
자하진기 삼단공의 끝자락.
받아들이는 자연기(自然氣)가 온 몸으로 녹아들며, 조용하게 갈무리 되고 있다.
자하진기의 본래 특성일지. 치우침 없이 드러나지 않는 내력이다. 장로들이 보아도 자세히 살피지 않는 한, 그의 공력을 가늠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벌써 봄이구나.’
오용 육현을 습득하는 일부분의 시간들을 제외하고는 전심 전력으로 내공만을 연마했다.
스스로도 얼마만큼의 힘이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적어도 선검수 이상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모르는 일이다. 그보다 훨씬 강할 수도, 아니면 느끼는 것 보다 약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나?’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종남과 화산의 회합이 열리는 것은.
이번에는 종남산.
여유로웠던 승자에서 도전하는 패자로 바뀐 화산파다.
친선으로 이루어지는 비무라지만, 마치 생사 결전을 앞둔 것처럼 온 산의 공기가 고조되고 있다. 특히나 평검수들이 거하는 은선대(隱仙垈) 산자락에서는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이글이글 끓고 있는 군기(軍氣)가 뻗쳐 나오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번 일 끝나고 나면, 천화관이 열릴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돼.”
한가하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벌써 일년이 넘은 것 같다.
삼십의 나이에 가까워진 연선하.
세월이 비껴가기라도 하는 듯,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 그대로다. 원숙에 이른 무공, 전보다 진중해진 성정만이 지나 온 계절들의 숫자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통과할 자신은 있겠지?”
“아마도요.”
“대답이 그게 뭐야. 그 동안 또 많은 성취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는 일이죠. 더 뽑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아닐 걸. 더 지체하진 않을 거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비무 결과에 관계없이 말이지.”
“종남파.......이번엔........이길 것 같아요?”
“별반 관심도 없어 하면서 왠일이니. 그런 것을 다 물어보게.”
“아니요. 그냥........”
“글쎄다. 지지는 않겠지. 나도 나가거든. 하하.”
“그래요?”
“응, 게다가 하운, 동한. 이름은 들어 봤지?”
“예.”
“그들은 강해. 거기다가 매한옥이라고, 들어 봤을거야. 속가 출신인데도 정말 대단하지. 그까지 출전하기로 했어.”
“예에.”
“나름대로 총력전이라 할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이번에는 중요한 손님들도 오기로 했으니까 질 수는 없지.”
“중요한 손님이라면.......?”
“무당파. 장문인께서 직접 오신대. 그 무당파야. 현양진인이시란 말이지! 고절한 인품과 무공이 비할 데가 없으시다던데, 정말 무척이나 기대 돼.”
연선하의 만면에 생기가 돈다.
무당파 장문인, 현양진인.
잘 알고 있다.
오용 사현 중, 지식의 시험을 통과하려면 현재 뿐 아니라 과거의 것까지, 강호 정세에 대해서 웬만큼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각대 문파들 중에서도 항상 수위에 거론되는 무당파다. 그 무당파 장문인인 현양진인은 그 덕(德)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으며 지닌바 무공도 그 품성 못지않게 정심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정말 대단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그렇겠지? 너도 함께 갈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말야.”
“그러게요.”
회합에 참가하는 것은 평검수까지만이다. 이번에는 더욱 규모를 늘려 사십 회 까지 비무를 하도록 결정했으니, 정말 볼만한 행사가 될 터,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쉬울 만도 했다.
“그나저나, 걱정은 걱정이다. 상대가 만만치 않아서 말이지.”
“아, 사저(師姐)는 어떤 사람과 싸우죠?”
“벽뢰신수 곽전각.”
“예? 진짜요?”
벌떡 일어날 정도로 놀란 청풍이다.
곽전각이 누구던가.
종남파의 장문인으로 화산파 천화진인과 함께 섬서 제일 고수를 넘보는 절대 강자였다.
“하하하, 그걸 믿니? 하여튼........”
놀라는 청풍의 반응이 재미있었던 듯, 깔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연선하다.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벽뢰신수는 아니고, 그분이 키운 제자라더라. 후계자 감이래.”
“아니, 그럼 굉장히 강할 것 아니에요.”
“어머. 지금 걱정하는 거니? 날 못 믿는 거야? 나도 강해. 아직까진 하운이나 동한한테 밀리지 않는단다.”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아니, 그냥.......그러니까.......”
청풍도 이제 다 큰 청년이다. 조각 같은 얼굴을 지닌 미청년. 연선하는 그런 그를 놀리는 것에 재미라도 붙인 모양이었다.
“뭐, 그래. 내가 걱정하는 것이랑, 네가 걱정하는 것이랑은 다를 테니까. 네가 걱정하는 것은 내가 지는 것이겠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야.”
“그........그러면요?”
“상대를 죽일까봐. 강하니까.”
청풍의 얼굴이 굳었다.
죽인다? 죽는다.
그렇다.
연선하는 매화검수다.
숱한 임무를 맡고서 강호를 종횡하는 매화검수였으니, 지금까지 적어도 몇 명쯤은 죽여 봤으리라.
어쩌면 몇 십 명. 아니면 그보다 더.
그녀는 사람을 죽여 본 진정한 검사(劍士)인 것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당연한 거야. 그런 것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청풍이다.
오용 사현. 전술.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머리로 배우는 것과 실제와의 차이는 생각보다 큰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몇 달 지나고 나면, 너도 매화검수, 나도 매화검수. 같은 위치에서 만나는 거야. 알겠지?”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긴 했지만, 이상한 예감이 든다.
무엇인가 어긋나는 느낌이다.
그녀의 이야기.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괜한 생각일거다. 괜찮아. 괜찮아야지.’
풍암당에서 배웅하는 연선하.
암향표의 바람을 타고서 금새 멀어져 간다. 다시 만날 때에도 이처럼 담소로서 만나기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청풍이었다.


* * *


* * *

‘지금 쯤, 시합이 다 끝났겠구나.’
이상하게도 오늘은 온 종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종남산의 회합이 시작된 것은 어제 부터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무엇인가 잘못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체 왜지?’
석양이 부드럽게 깔리는 저녁이 지나고, 암천의 서쪽 하늘에 일곱 개의 별이 반짝일 때 까지도,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그 기분은 없어지질 않는다.
풍암당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문을 밀치고 나와 밤 공기를 들이켰다.
나아지나. 아니다.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종남산은 서남 쪽에 있다.
먼 하늘을 바라보는 청풍, 연선하의 안위가 궁금했다.
‘아니. 아니다.’
뭔가 이상하다.
연선하의 안위.
그런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느낌.
청풍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연화봉. 상궁(上宮).
장운대와 은선대 방향이다.
‘연 사저가 아니야. 종남산이 아니었어! 여기, 화산이다.’
자하진기를 삼단공까지 연성한 그다.
이제 오감을 넘어선 육감을 지니게 된 청풍은 비로소 깨닫는다. 처음부터 연선하 쪽이 아니었다. 일이 벌어지는 곳은 종남이 아니다. 화산이었다.
청풍은 홀리기라도 한 듯, 장운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심한 밤.
풍암당이 위치한 곳은 구석진 곳 중에서도 구석진 곳이다. 점차 걸음을 빨리하는 청풍. 그의 눈은 한참 멀리 있는 장운대, 정진묘 숙소들로 고정되어 있었다.
‘저것은!!’
이제는 달린다. 자하진기를 일으키며 뛰기 시작했다.
보았기 때문이다.
장운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누군가가 지른 불. 넘실대는 악의(惡意). 습격이다. 온 종일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이 습격자들의 암울함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빨리.......!’
허리 춤에 매달린 목검을 잡아본다. 이것은 비무가 아니다. 실전이다. 통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어도 가야한다. 이런 변고에 두려움으로 일신의 안전을 꾀한다면, 더 이상 화산파 제자라 말할 수 없다.
속도를 내는 청풍.
장운대를 휩쓴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나가, 보무제자들의 숙소인 정진묘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웬 놈들이 감히!”
장운대의 담을 날아 넘으며 다짜고짜 살수를 전개하는 습격자들은 하나 같이 흑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길쭉한 협봉검을 휘두르며 쇄도해 오는 기세가 사납기 그지없다. 진입 방향은 세 방향, 거칠면서도 조직적인 공격이었다.

챙! 채챙!
“물러나지 마! 진검(眞劍)을 든 선검수들이 앞으로 나서라!”
큰 소리로 명령하는 이는 화산파 지객장로 원현진인이었다.
화광이 충천하는 장운대 담벼락.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어지럽게 얽혀들고 있다.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습격자들의 수가 벌써 기백을 헤아리고 있었다.
“어린 제자들을 보호하라! 검을 들어! 화산 제자들에겐 두려움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화산파 십이 계율 제 칠계. 화산 문하는 어떤 싸움에서도 물러나지 않는다.
웅혼한 내력이 담겨있는 원현진인의 독려에 겨우 목검을 든 보무제자들까지도 용감하게 나서고 있었다.
‘앞으로 나서라고 했지만 이들로는 안 돼. 위험하다!’
선검수라고 해 보았자, 이제 겨우 진검을 잡기 시작한 초급 무인들이다.
보무 제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쓰러지는 제자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역부족. 이대로는 버텨낼 수가 없었다.
‘이런 시점에! 이 놈들.......!’
모든 것을 알고 온 것이 틀림없다.
종남파에서 열린 회합으로 대부분의 정예들이 빠져나간 상태.
장문인 뿐 아니라, 열 명이 넘는 수행 장로들, 그리고 매화검수 이십 명과 평검수 칠십 이 명 중 사십 명이 종남산으로 떠나 있다. 지금 이곳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이라면 기껏 남아있는 평검수 삼십 이 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챙! 쓰걱!
흑의 무인들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다.
제대로 훈련받은 자들이다. 살수를 뿜어내는 모습들이 익숙했다. 보무제자들이나 선검수로는 절대 막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타종(打鐘)을! 서둘러!”
은선대의 평검수들을 동원해야 한다. 이곳에 남아있는 매화검수가 몇이었던가. 두 명. 은선대 위쪽 검향관(劍香官), 타종을 굳이 울리지 않더라도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으리라.
“보무제자들은 삼인 일조로 전권을 빠져 나가라! 산개(散開)해라! 이 일을 장로들에게 알려!”
화산검문, 제자들이야 연화봉 정상의 전각군에 모여 있지만, 장로들은 다르다.
대부분이 넓디넓은 화산 곳곳의 암당(庵堂)에 흩어져 있다.
심지어 이 연화봉이 아닌 운대봉이나 낙안봉에 거하는 장로들까지 있는 마당이다. 게다가 그들마저도 모두 제 자리에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가까이에 있는 장로들이야 이 변고를 보고서 달려오고 있겠지만, 그것도 몇 명 안 될 것이다. 종남산으로 간 이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용무로 강호에 나가 있는 장로들이 꽤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보내야 한다.
어차피 보무제자들은 실제적인 전력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죽도록 놔 둘 바에는 연락책으로 쓰는 편이 나았다.
재빨리 지시를 내리면서 생각을 정리한 원현진인이다.
직접 나서야 할 때.
검을 뽑아드는 그의 눈에 막 담벼락을 넘어 들어오는 검은 그림자가 비쳐 들었다. 하늘을 가로질러 나타난 흑포 괴인. 온 몸에 불길한 기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저것은........!’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검은 색 장포를 휘날리는 괴인의 얼굴에는, 사람이 지녀야 할 생기가 없다. 창백하다 못해 푸른 빛에 가까운 색깔, 그 표정이 괴이하게 비틀려 있었다.
파라라락!
움직이기 시작한다.
빨랐다.
순식간에 삼장 거리를 가로지르더니, 젊디젊은 선검수 한 명의 목을 비틀어 버렸다.
늘어지는 제자의 눈에 죽음이 내려앉는다.
원현진인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터엉!
원현진인의 몸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다.
흑의 무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위이잉!
지척에 이른 것은 순간이다.
날카로운 검광을 뿌려내는 원현진인. 흑포괴인의 몸이 기이한 각도로 휘어졌다.
‘피했다?!’
화산파 장로의 검예는 이미 그 이름값만으로 강호 일절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가볍게 피해냈다. 그 뿐인가. 반격까지 날려 온다. 찢어지는 흑포 사이, 짓쳐오는 손에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담겨 있었다.
퍼엉!
검을 회수하며 왼손으로 받아내는 원현진인이다.
화산(華山) 비전(秘傳) 난화수(亂花手).
날렵하게 밀어내는 손속에 커다란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이 진기는.......!’
진기(眞氣)에서 생령(生靈)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기(死氣)만이 느껴질 뿐이다. 사술(邪術), 아니, 사술보다 더한 마공(魔功)인 것 같았다.
화르르르륵!
등 뒤로부터 느껴지는 불기운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검을 전개하면서 상황을 확인했다.
문제다.
선검수들의 방벽은 이미 뚫려 버렸다. 깊게 파고든 흑의 무인들이 정진묘 모든 전각들에 불을 지르는 중이었다.
‘이 놈들......!’
흑의 무인들이 타오르는 불을 향해 검은 주머니들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검은 주머니가 터질 때 마다 낼름대는 화염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기름 주머니인 것이 틀림없었다.
촤아악! 파팡!
더 살피고 있을 겨를이 없다. 눈 앞의 적부터 상대해야 한다.
다른 것에 신경 쓰기에는 흑포괴인의 공격이 지나치게 위협적인 까닭이었다.
“합!”
일갈을 내지르는 원현진인의 검이 장쾌한 기세를 발하며 뻗어 나갔다. 불꽃처럼 터져 나가는 검력이다. 화산 일절. 천류신화검법이었다.
파사삭!
괴인의 흑포가 부스러지듯 찢겨 나갔다.
물러나는 괴인이다. 따라 붙은 원현진인의 검이 격렬한 떨림을 보였다. 정교함보다는 살상력. 깊게 찔러 들어가는 검형에 살기(殺氣)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쩡!
검과 육장이 부딪쳤음에도 금속성이 들려왔다.
검을 휘돌리는 원현진인. 아니다. 다시 보니 그냥 육장이 아니다. 흑포괴인의 오른손 팔목에는 강철 족쇄가 매달려 있다. 방금의 금속성은 바로 그곳에서 터져 나왔던 모양이었다.
쐐액! 파팡!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끝 차이다. 괴인의 무공은 놀랍게도 구파 일방, 화산검문 장로인 원현진인의 무공에 근접해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십 이 합을 교환했다. 그래도 원현진인이 한 수 위. 일순간, 원현진인은 결정적인 허점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푸우욱!
‘끝이다.’
포착한 허점을 놓칠 원현진인이 아니다.
제대로 들어갔다. 검날이 가슴을 지나 등 뒤에까지 뚫고 나왔다. 천류신화검의 내력을 그대로 쏟아 부었으니, 버텨낼 리가 없다.
‘?!’
검을 빼내려던 원현진인이다. 손에 전해지는 감각. 덜컥하며 걸리는 느낌을 받고서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큭큭큭큭.”
기괴한 웃음소리.
원현진인의 몸이 급박하게 뒤로 젖혀졌다.
파아아아.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간발의 차이였다.
흑포괴인의 손이 원현진인의 얼굴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것.
그대로 맞았다면 죽었을지 모른다. 오른발로 땅을 찍어 몸을 띄웠다.
다시 한번 쳐내 오는 공격을 막아내고는 놈의 머리를 향해 난화수의 일격을 뿜어냈다.
빠악!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공격.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화산 장로의 진가다. 강력한 일격에 흑포괴인의 목이 뒤로 꺾여 버린다. 그제서야 놈의 가슴에서 빠져나오는 검이었다. 재빨리 고쳐 들며 흑포 괴인을 향해 겨누었다.
“크큭, 크크큭.”
완전히 꺾여버린 목일진데, 아직까지도 괴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직, 우드드득.
“이.......이, 요사한.......!”
원현진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뼈가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목이 돌아오고 있다. 기사(奇事)도 이런 기사가 있을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니다. 괴물이었다. 사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귀인들, 강시들이 있다더니, 바로 이런 놈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우득, 우직, 우드득.
목이 제대로 맞추어지지 않는 듯, 숫제 두 손으로 머리를 잡은 채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끊임없이 흘러 나오는 기분 나쁜 뼈 소리.
원현진인은 더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죽여야 한다. 이런 괴물에게도 죽음이란 말이 통용될련지는 모르나, 목을 날려버린 후까지 움직이지는 못하리라.
슈각!
섬광처럼 뻗어낸 검에 괴인의 목이 떨구어졌다. 땅을 구르는 그 머리. 원현진인은 지체 없이 이검(二劍)을 전개하여 쿵 하고 넘어가는 괴인의 심장을 파괴했다.
“늦었군요.”
담장 저편 위에서 들린 목소리다.
홱 몸을 돌린 원현진인의 시야에 조그만 인영 하나가 들어왔다.
아담한 체구, 여자였다.
“신장귀(神將鬼)를 혼자서 처리하다니, 과연 화산 장로의 이름들은 명불허전인 모양입니다.”
백색과 흑색이 조합된 옷은 궁중의 복식 같기도 하고, 옛날 옛적 복식 같기도 한 것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창백한 피부에, 아기자기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미녀였으나, 그 손에 든 물건은 그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낫.
그것도 철봉의 양쪽 끝에 길쭉한 낫이 달려있는 양날 겸(鎌)이었다.
“겨우 신장귀 하나네요. 어쩌죠? 장로님 뒤 쪽에서는 수 십명의 제자들이 죽고 있어요.”
꿈틀, 눈썹을 치켜 올린 원현진인이었지만, 섣불리 공격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이 여자는 강하다.
요녀. 작은 몸 안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꿈틀대고 있었다.


“어린 요녀여. 네가 이 흉악한 무리들의 우두머리렸다.”
“일단은 그런 것 같네요.”
“요망한!”
검자루를 잡은 원현진인의 손에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뛰쳐 나갈 기세. 그러나 그는 땅을 박차는 대신, 멈칫 하며 얼굴을 굳혔다.
파락! 파라락!
하나 둘.......
천천히.
방금 해치운 것과 똑같은 흑포 괴인들이 담벼락을 날아 넘어 호위하듯 요녀의 주위로 내려서고 있었다.
여덟. 아홉. 아홉이나 된다. 하나 하나가 발하는 음산한 기운들이 타오르는 불길마저 몰아내는 듯, 온 장내를 메워가고 있었다.
“갈수록 큰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오늘은 많은 피를 보겠어요.”
“감히!........감히........이 화산에서........!”
분노에 사로잡힌 원현진인이다.
요녀의 목소리에는 그야말로 요사함이 가득했다. 도무지, 듣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화산도 화산 나름이지요. 오늘의 화산은, 아무래도 화산답지 못한 듯 해요. 그렇죠?”
“갈!!”
터엉!
결국 참지 못한 원현진인.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천류신화검의 막강한 검력이 쏟아질 때. 놈들 중에서도 가장 체구가 큰 흑포괴인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원현진인의 앞을 막아섰다.
쩌정!
십자로 교차한 흑포괴인의 양팔엔 흑색의 강철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검날을 얽어 맨 괴인의 족쇄들이다. 힘과 힘의 겨룸. 그러나, 그 싸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작은 요녀의 목소리가 곧바로 그 교착상태를 깨버렸기 때문이다.
“규귀(奎鬼) 물러나라.”
규귀라고 불린 흑포 괴인이 팔을 풀며 뒤로 몸을 날렸다. 쫓아 움직이려던 원현진인. 그러나 흑포괴인들이 둘러친 방벽은 튼튼하기 짝이 없어, 그의 쇄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성질이 급하시군요. 장로님.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으니 검을 좀 멈추시지요.”
원현진인은 가타부타 대답하질 않았다. 이런 요사한 무리들에게 무슨 대화가 필요할까.
하지만, 이어지는 요녀의 말은 원현진인의 공격을 멈추도록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다시 한번 뒤를 보세요. 벌써 몇 명이 죽었나요? 제 질문에 답하신다면 이 공격을 멈춰 드리지요.”
“이.......요사한 것!”
“못 믿으시겠나요? 잘 보세요.”
치리링!
작은 요녀가 품속에서 방울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소리, 그 이상의 파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자, 흑의 무인들이 일순간 살수를 멈추었다. 한 발작 물러나는 습격자들, 갑작스레 멈춘 그들의 행동에 화산 제자들은 되려 당황한 듯, 동시에 손을 멈추고 검을 겨누었다.
타닥. 타닥.
불똥이 튀는 소리 외에는 방울소리의 여운만이 남아, 사방을 정적으로 몰아넣었다.
요녀의 얼굴에 그려지는 조그만 미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자. 장로님. 묻겠어요. 사방신검(四方神劍)들은 어디에 있죠?”
“!!”
원현진인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었다.
‘그것 때문이었을 줄이야!’
습격의 목적이다.
화산파 본산 습격이란 미친 짓을 벌인 이유가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벌써 봉인한지가 수십 년인 신병(神兵)들.
화산파에서도 본파 소관의 장로들만 알고 있는 기밀 사항인 바다. 이 화산파에 사방신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작금 강호에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넘겨 줄 수 없다.”
어찌 알고 왔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것은 사방신검의 존재를 확신하고 왔다는 뜻. 어중간하게 둘러댈 때가 아니다. 어차피 알고 온 것, 끝까지 버티는 편이 옳은 방법이었다.
“순순히 넘겨주실 것으로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이런 수고는 의미가 없었겠죠. 장로님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사방신검의 위치를 말하지 않으신다면, 다시 공격할 수밖에요. 무고한 제자들을 살리려면 말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어림없는 수작이다. 그것들을 가져다가 어쩌려 하는가! 그것들은, 너희와 같은 사도(邪道)의 무리들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호호호. 그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화산 쪽에서 쓸 수가 없으니 봉인했던 것 아니었나요?”
“무엇이!”
“장로님께선 그것들이 어떤 물건들인지 보신 적이나 있으신가요. 소녀가 추측컨대, 장로님도 그것들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 진실을 아셔야죠. 화산파가 그것들을 얻고도 봉인해야 했던 이유는, 화산에서도 신검(神劍)들을 다룰만한 인물들이 없어서였겠지요. 그렇지 않던가요?”
“함부로 삿된 거짓을 말하지 말라! 어디의 어떤 무리이길래, 이리도 간사함과 교활함이 가득할까. 그 정체를 밝혀라!”
쩌렁 쩌렁 울리는 원현진인의 목소리.
요녀의 아미(蛾眉)가 부르럽게 일그러졌다.
“재미있는 말이네요. 이것이 뭔가요? 시간을 끌고 싶으신 건가요? 구차하군요. 대 화산의 장로님치고는 말이에요.”
위잉.
그녀가 손에 든 양날겸, 귀병(鬼兵) 양영귀(兩靈鬼)를 장난스럽게 휘돌렸다.
“다른 장로들이 오길 기다리는 모양인데, 잘 안 될 겁니다. 기껏해야 두세 명. 아, 어쩌죠? 아까는 어리디 어린 제자들을 제 수하들이 지키고 서 있는 길목들로 보내시는 것 같던데.......장로들에게 알리러 가던 임무도 다 못 마치고 죽게들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할까요?”
원현진인의 얼굴. 분노가 극에 달해 그 색깔을 창백하게 만들 정도다.
요녀가 마치 그 표정을 즐기기라도 하듯, 배시시 미소를 짓더니, 계속하여 말을 이어 나갔다.
“저기, 매화검수들이 오나 보네요. 둘 밖에 없는데다가 상처도 입었군요. 제법이네요. 가장 먼저 제거하기 위해 실력 있는 수하들을 보냈는데요. 자, 이제 이야기 하세요. 막을 수 없다는 것, 잘 아시잖아요.”
“.........”
“제자들을 죽일 생각이군요. 잃어버린 보물은 다시 찾을 수 있겠지만, 한 번 죽은 목숨은 어지간해서는 살려내기 힘들겠죠. 뭐, 어쩔 수 없군요. 직접 뒤지며 확인해볼 수밖에요.”
그녀가 종전에 흔들었던 방울을 다시금 치켜 올렸다.
그 방울을 바라 본 원현진인.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등 뒤에 있는 제자들의 눈빛.
굴복할 수 없다.
여기서 죽더라도 요사한 무리들이 뜻하는 대로는 놔두지 않겠다.
자랑스런 화산 제자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래서 원현진인은 더욱 더 갈등할 수밖에 없다.
하나같이 이 화산을 이끌어 갈 미래들이다. 뒤에 있는 아이들이 매화검수들이었다면, 응당 기개로서 죽을 때까지의 응전을 선택했겠지만, 그런 것을 고집하기엔 보무제자들과 선검수들이 너무 어렸다.
“그것들은.......”
억눌린 목소리. 원현진인의 입이 열렸다.
“상궁(上宮) 경내, 네 개의 기둥 안에 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요녀의 말대로 신검들이야 다시 되찾으면 되는 일이다.
‘이 결정으로 인해 장로직을 내 놓아야 하겠지.’
원현진인의 결정.
외압에 무릎 꿇고, 화산 정기를 훼손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화산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난다?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 원현진인 자신의 목숨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어린 제자들의 목숨 값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장로님은 듣던 바, 화산파의 장로들과는 꽤나 다르군요. 하지만 어쩌죠. 양영귀는 피를 더 마시고 싶대요.”
키이잉. 키이잉.
마치 살아있는 듯, 피를 구하는 마병이다. 양날의 낫, 양영귀로부터 기이한 울림이 계속하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튼 알려줘서 고마워요. 수고를 덜었어요.”
요녀, 방울을 든 손을 내리지 않는다.
옆으로 흔들리는 손목. 방울로부터 날카로운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장로님, 가시는 길이 외롭지는 않으실 거예요.”
무슨 짓인가.
원현진인의 얼굴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완전히 잘못 판단했다.
현혹.
요녀의 목소리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기(邪氣)가 넘쳐흐르고 있었던 바,
완벽하게 당한 것이었다.
“모두 죽여라. 화산파에 구주의 넓음을 가르쳐 줘.”
아홉의 흑포괴인들이 튀어 나온다.
피에 굶주린 양영귀의 재물로 삼기 위해.
원현진인에겐 요녀가 직접 그 마병을 휘두르며 날아들고 있었다.

* * *


불길이 번지고 있는 장운대다.
하늘로 치솟고 있는 검은 연기가 사납기 그지없다. 온 하늘의 별빛마저 가려버릴 정도였다.
새까만 밤, 장운대로 오르는 길.
청풍은 사방에 쓰러진 보무제자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럴 수가!’
놀라움을 넘어선 충격이다.
피에 젖어 있는 참혹한 시체. 청풍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험한 산, 사고로 죽었던 동문의 시체를 본 기억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처참한 검상(劍傷)으로 쏟아내는 피, 죽음을 직접 대면하는 일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여기 또 있군.”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다가오는 자들.
세 명이다. 흑의 무복에 피 묻은 협봉검들을 들고 있었다.
‘이들이.......제자들을.......’
분노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경계심이다.
적들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또한 죽여 본 자들이었다. 피부로 전해지는 살의(殺意)가 섬찟하다. 쳐내는 검에 당장이라도 목이 날아갈 것처럼 두려움이 들었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해.’
청풍은 더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았다.
공포심을 버려야 한다.
보무 제자들의 시체는 애써 외면했다. 진득한 살기를 품고서 다가오는 세 명의 흑의 무인들에게만 정신을 집중했다.
‘자하진기를.......!’
청풍은 목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통할 수 있을까. 모른다. 이것은 비무가 아니다. 목숨을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다.
한 번도 그런 것을 겪어보지 않았다는 사실. 잊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불리하다 느끼는 순간, 그 싸움은 이미 진 싸움이다. 천화관, 오용 사현. 전술의 장(章)이었다.
쒜액!
아무런 말도, 아무런 기합소리도 없다.
흑의무인의 협봉검이 독사(毒蛇)의 송곳니가 되어, 청풍의 가슴을 향해 뻗어오고 있었다.
위잉.
청풍의 몸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실전의 달인이라도 된 양, 반전되는 상체 너머로 목검(木劒)을 휘두른다. 매화삼릉검, 육합검에서 뽑아낸 절기(絶技)였다.
땅!
첫 일격을 튕겨내는 데 성공했다. 통한다.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취리링!
협봉검은 한 자루가 아니다.
청풍은 본능처럼 오감을 최대로 열면서 몸을 숙였다. 등 뒤를 스쳐 나가는 검격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세 번째!’
또 한 자루가 더 있다.
이번에는 왼 쪽으로 비켜냈다.
특별한 형(形)에 따른 움직임이 아니다. 적들의 악의(惡意)를 감지한 자하진기가 그의 몸을 이끌고 있었다.
‘공격을 해야 하는데!’
세 개의 협봉검을 피해 내고도 반격의 실마리를 잡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경험 부족 때문이다. 청풍은 이런 싸움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죽고 죽이는 혈전, 그곳에 처음으로 들여놓은 일보(一步)는 예상했던 것 보다 더욱 무섭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식은땀 나는 일이었다.
쐐액! 쐐애액!
세 번의 공격을 모두 피해낸 까닭인지, 훨씬 더 사납게 쳐 들어오는 공격이다.
하나는 위쪽으로 머리를 노려 오고, 하나는 아래쪽으로 다리를 베어 온다.
‘나머지 하나는?’
검은 세 개다.
눈에 보이는 두 개의 공격보다, 뒤에 들어올 한 번이 더 위험할 것이다.
본능적으로, 아니, 주인을 지키는 자하진기가 가르쳐 주는 느낌이었다.
파박!
왼발로 땅을 박차고는 완전히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공중에서 가로 누운 청풍이다.
위아래 허공 훑고 지나간 두 개의 협봉검 사이. 청풍은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매화삼릉검의 일초를 펼쳐냈다.
채앵!
아래와 위, 방향을 바꿔 집중되는 공격을 잘 막아낸 청풍이다.
‘지금이 고비!’
다음 순간이다. 마지막 남아있던 세 번째 공격이 오른쪽으로부터 날카롭게 흘러 들어왔다. 꽃잎 하나, 삼각으로 떨쳐낸 검격에 큰 충격으로 맞부딪쳤다.
쩌억!
생각보다 너무 잘 전개되는 무공에 너무 가볍게 본 것일까.
협봉검에 마주한 목검이 두 동강 나고 말았다.
‘이런.......!’
큰일이다.
급히 몸을 틀어 뒤로 물러났다. 뒤 따라 오는 협봉검, 이들은 강하다. 실전을 아는 자들, 보무제자들과의 비무가 전부였던 청풍으로서는 밀리는 것이 당연했다. 이만큼이나 맞상대한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놀랄만한 일이었다.
슈각!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엄청나게 뜨겁다. 검상(劍傷)이란 것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상대의 살의(殺意)가 상처를 타고 들어와서 심장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쐐액!
청풍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왼발을 뒤로 빼며 옆으로, 다시, 한발 뒤로.
신경이 극도로 곤두선 지금, 두 눈에 상대의 검 끝이 아리도록 비쳐든다.
간발의 차이로 비껴나는 청풍이다.
단전에서부터 끌어내진 진기가 온 몸을 타고 돌며, 그의 몸을 유도한다.
자하진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더더욱 활성화 되는 것 같았다.
파박! 쒜섹!
자꾸만 맞추지를 못하니, 흑의 무인들의 공격도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듯 하다. 거칠어지는 검격에 청풍은 한 가지를 깨닫는다.
‘이것은.......!’
아까부터 자꾸만 시선이 가는 지점들.
무인들의 동작 몇몇 부분에 허술해 보이는 곳들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낀다.
‘허점.......! 그런 것이었나!’
하고 많았던 보무제자들과의 비무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왜 이제 와서 깨달아지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보무제자들의 무공은 온갖 군데가 허점이었으니까.
거기서 오는 혼란 때문에 도리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공격할 부분이 너무 많아,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했었던 것이었다.
피핑!
귓가를 스쳐가는 검날은 여전히 두렵다.
몇 치만 이쪽으로 왔어도 왼 쪽 눈이 꿰뚫렸을 터.
오싹해지는 상상 뒤로, 청풍은 마음 깊은 곳의 용기(勇氣)를 끌어 올렸다.
‘좌 하방, 다섯 치! 지금!’
청풍의 몸이 앞으로 기울여졌다.
노리는 곳은 맨 앞 흑의 무인의 오른 쪽 허리다. 상체 전환의 핵이 되는 곳,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파탄을 드러내는 부위였다.
빠악!
흑의 무인의 몸이 활처럼 꺾였다.
일순간 멈춰버리는 몸, 공격의 맥이 완전히 끊어진다. 제대로 본 것이다.
‘치명적이진 않아! 목검이 너무 짧다!’
판단력도 수준 이상이다.
보무제자를 훨씬 뛰어넘은 수준.
이 정도면 평검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쉬익!
두 번 째 흑의 무인이 재빠른 움직임으로 협봉검을 찔러왔다. 중단을 노려오는 검이다. 뒤에는 순간적인 경직에서 회복하는 첫 번째 흑의 무인이 있고, 이 앞, 어깨 너머에는 상단을 겨누고 있는 세 번째 무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검으로는 안 돼. 버리자.’
보무제자니까 가능한 생각이다.
매화검수, 평검수는 검집에 검을 도로 넣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 검자루를 놓지 않는다.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키워지기 때문. 그러나, 보무제자 청풍은 다르다. 일순간 반토막 남은 목검을 저 앞, 세 번째 무인을 향하여 힘껏 집어 던졌다.
쨍!
세 번 째 무인의 검이 목검을 쳐 내는 순간이다.
무기를 버리는 청풍에 놀란 듯한 그들.
‘안 쪽으로!’
생각은 순간이다. 게다가 몸이 움직인 것은 그보다도 먼저였다.
청풍은 눈 앞 두 번째 무인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손바닥을 내질렀다.
퍼엉!
장법이다.
예측 밖의 공격에 제대로 격중당한 흑의 무인의 몸이 공중으로 두 자 가까이나 떠올랐다.
털썩, 하고 허물어지는 몸.
‘되었나?’
태을미리장이다.
통하리라는 확신도 없이 시도해본 일격은 놀랄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쓰러진 흑의 무인, 다시 일어나지 않고 있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모양이었다.
‘아직, 위험해.’
하나를 쓰러뜨렸지만,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동료를 아랑곳 하지 않고 날려 오는 두 자루의 협봉검. 청풍은 또 다시 수세에 몰렸다.
태을미리장이 통한 것은 행운이다. 적들이 몰랐기에 가능했던 것. 장법을 경계하며 거리를 두고 검들을 휘둘러오니, 공격을 성공시킬 방도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위기다.
자하진기가 유발하는 신법(身法), 굳이 말하자면 자하신법(紫霞身法)일까.
처음 그 진가를 드러내는 신공(神功)의 방대함으로 용케 피해내고는 있다지만, 그것으로 한계다. 회피에 이어지는 반격이 있어야 하는데, 잘 되질 않는다. 사나운 검날에 대한 무서움이 그의 마음을 위축시키고 있었다.
파악!
땅에 꽂힌 검 끝에서 흙먼지가 인다. 어둠 속에 번뜩이는 협봉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저것을!’
청풍의 시야에 땅에 떨어진 협봉검이 들어왔다.
쓰러뜨린 흑의 무인이 놓쳐버렸던 검이다. 집어 들 수 있다면, 반전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타탁!
마음이 일자, 자하진기가 호응한다.
한 발, 한 발.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땅에 떨어진 검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안 돼. 눈치 챘다. 그렇다면.......’
적들의 검세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알 수 있다.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 내는 능력. 백전의 고수들이나 가질만한 감각이다. 청풍은 언제나처럼, 그 감각이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모르면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사용하고 있었다.
‘더 가까이.’
한 발 더 나아갔다.
지척에 이른 협봉검.
청풍이 몸을 날리며 손을 뻗자, 두 자루의 검날이 기다렸다는 듯 속도를 배가시키며 매섭게 꽂아 들어왔다.
청풍이 방향을 급 전환한 것은 그 때다.
오른발로 땅을 찍고, 몸을 되돌리며 협봉검 두 자루의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빠악! 우직!
흑의 무인 하나의 무릎이 바깥쪽으로 꺾여 버렸다. 허우적거리듯, 검을 내 저으며 쓰러지는 무인의 옆으로 청풍은 보폭을 크게 잡아 움직임을 빨리 했다.
다급하게 베어드는 검을, 단숨에 피해내며 손을 내 뻗었다.
턱!
적의 어깨를 잡은 손.
단전에서부터 솟구치는 진기가 팔을 타고 뿜어진다. 마지막 남은 흑의 무인, ‘컥!’하는 외마디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땅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내가........이런 것이 가능했었나........?!’
비틀 비틀, 일어나려 애쓰지만, 부서진 무릎에서 오는 고통 때문인지, 거동을 못하는 흑의 무인이 눈앞에 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땅에 머리를 쳐 박은 두 사람의 흑의무인을 보며, 청풍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한기를 느꼈다.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얼떨결에 이긴 느낌이지, 무공이 강해서 이긴 것 같지가 않았다. 진기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승리를 거두고 나자 어쩔 줄을 모르겠는 심정이었다. 스스로 두렵기까지 한 자신의 힘,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그것을 경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청풍은 보무제자들의 시체들을 보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가라앉는 마음. 몇 번의 호흡에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진 정신이다.
고개를 돌려, 장운대 쪽을 바라보았다. 올라가고 있는 불길, 은선대까지 번지고 있는 그 화광(火光)의 향연 속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 * *


“멈추어라!”
정심한 내력이다.
장운대를 너머, 은선대까지. 상궁의 지척에 당도한 양영귀의 요녀는, 뒤 쪽에서 새롭게 들려온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파아아아!
반백의 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넘긴 초로의 도인이 달려오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세 명의 젊은 도사들. 초로의 도인이나, 젊은 도사들이나 특이하게도 검을 들고 있지 않았다.
‘오행진인인가! 저것은 매화권사들로군!’
오행진인.
본래 도호는 전현(前賢)이다. 오행진기와 매화오행장의 달인으로 달리 오행진인의 칭호를 얻었으며, 권각과 장법에서 화산 제일을 다툰다는 고수였다.
‘와 있다니. 잘못된 정보였나.’
매화권사들은 전부, 강호에 나가 있는 상태라 들었다. 매화권사 하나의 전투력은 매화검수 개개인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했다. 상당한 전력. 그러나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매화권사들을 통괄한다는 오행진인은 주의할만한 상대였지만, 매화권사들은 신장귀들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산서(山西)에 나가셨다 들었는데, 오행진인께서는 어찌 이곳에 계시는지요.”
요녀의 말에 달려오던 오행진인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안면이 전혀 없음에도, 대번에 신분을 알아보는 안목은 차치하고서라도 장로 개개인의 근황까지 파악하고 있는 정보력은 다시없는 놀라움이다. 산서성에서의 일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 귀환한 것이 바로 오늘, 얼마 전이었다.
쫓아오면서 보았던 변고.
장운대에서 은선대까지 밀리고 있는 전황이 보여주듯, 이 습격자들은 무척이나 강했고, 또한 철저했다.
“알 바 없다. 요녀여. 어디에서 왔기에 이리도 요사한 것인가. 어느 문파에서 왔든, 그대와 그대의 문파는 이것을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 두고 봐야 아는 것이겠지요.”
“방자하기 이를데 없다. 원현이 이 밑에 있었을 터인데, 어찌 보내 주었는지 알 수 없도다.”
“그러게요. 너무 짧았죠. 원현장로는. 이 십초를 채 못 버티시더랍니다. 하지만, 장로님의 피. 워낙에 깨끗한 피였던 만큼 양영귀가 굉장히 흡족해 했어요. 매화검수들의 피도 젊은이들의 것인 만큼 무척이나 좋아하더군요. 진인. 오행진력이 담긴 진인의 피는 그보다 더 맑겠지요?”
오행진인의 눈이 잠깐 감겼다.
원현의 죽음. 어렴풋이 느꼈던 바다.
사제가 어떤 이였던가.
정이 많으면서도 강직했던 이. 목숨을 내 놓지 않고서야 이런 무리들을 여기까지 이르도록 허용할 리가 없었다.
다시 뜬 오행진인의 눈에는 슬픔보다는 정기(精氣)가 이글거리고 있었으니.
창노한 음성, 오행진인의 입에서 강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끝없는 잡기(雜氣)와 요사한 사기(邪氣)로 온통 물들어 있는 여인이구나! 아깝지만 장대한 죽음이었을 터. 원현의 넋은 내가 위로하리라!”
텅!
상궁의 문 앞을 막아 선 오행진인이다. 진각 한 번에 땅이 울린다. 하늘을 우러러 펼쳐지는 오행진기의 기운, 난전을 벌이고 있는 제자들을 수습하는 매화권사들이 짜임새 있는 방벽을 이루기 시작했다.
“쓸 데 없는 수고일 거예요. 장로님 정도로는 안 되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양영귀의 요녀에겐 아까와 같은 여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흑포괴인, 신장귀들의 숫자는 이제 여덟이다.
두 명 있었던 매화검수들을 처리하면서 하나를 더 잃었다. 이제 겨우 이십 대, 혹은 삼십 대의 젊은 자들이면서 신장귀 하나를 못 쓰게 만든 매화검수다. 예상 밖의 일, 그래서 원현진인을 죽인 후, 직접 손을 썼다.
매화검수 두 명을 죽이고서 느꼈다.
여기에 동원한 호교무인들만도 이백 명, 벌써 반 수 가까이 쓰러졌다.
화산파는 강하다. 목적한 바야 이룰 수 있겠지만, 확실히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치리리링!
그녀가 손에 든 방울을 크게 울렸다.
흑의 무인들이 집결된다. 한 지점을 향하여. 오행진인 한 사람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신장귀들은 나를 따르라. 무인들은 오행진인을 막는다!”
“신장귀들은 나를 따르라. 무인들은 오행진인을 막는다!”
오행진인과의 정면 대결은 피하는 편이 좋다.
몇 십초 안에 제압할 자신이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장운대에서 너무나 많이 지체한 모양이다. 그녀의 예상보다 빨리,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납시는군. 빨리 끝내야 되는데.’
서로 다른 방향, 멀리서부터 다가오고 있는 두 개의 기운이 있다.
그녀는 그 기운들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
오행진인 이상의 강자들이다.
그들이 들어 닥치기까지, 아마도 일다경 정도 여유가 있을 터. 어쩌면 그보다 빠를 수도 있었다.
‘하나는 목영진인. 그리고 이 정도 기운.........하나는 옥허진인인가!’
먼저, 목영진인.
한 자루 목검으로 온 천하에 이름을 날린 절정의 검객이다. 그 기량은 오행진인을 훨씬 넘어서, 이미 초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수준이었다.
하나 더 있다.
봉우리 몇 개를 격한 먼 곳, 이 연화봉도 아닌, 운대봉 저 멀리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이 있다. 한 마리 금룡(金龍)이 꿈틀거리듯, 뭉클 뭉클 전해오는 기파. 접근하는 속도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르다.
매화검신, 옥허진인이 틀림없다. 장문인인 천화진인에 버금가는, 또는 그 이상이라고까지 말해지는 초절정고수다. 목영진인까지는 상대할 수 있겠지만, 매화검신이라면 장담할 수 없었다.
그 둘 만이 아니다.
화산 곳곳에 포진한 절정 고수들, 어느 정도 이상 연배의 화산 도사들은 대부분 화산 도문에 틀어박혀 세속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알려져 있으나, 이 정도 일이라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 사태를 알아채고 이 곳에 올라온다면 그 때는 이 정도 무인들과 그녀로서도 정말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당도하기 전에 찾아야 된다.’
그녀가 신법을 전개했다.
오행진인의 옆 쪽, 상궁을 둘러 친 돌담 위를 향해서였다.
그녀를 잡기 위해 오행진인도 몸을 날렸다. 암향표 신법을 최대로 펼치는 오행진인, 그러나 제대로 되질 않는다. 앞을 가로막는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망한 것들!”
흑포괴인들이었다. 흑포괴인 둘, 거기에 더하여 흑의 무인들이 조직적으로 벽을 쳐 왔다.
퍼엉!
뛰쳐 오른 오행진인의 손에서 막강한 장력이 터져 나왔다.
격중당한 흑의 무인이 삼장이나 날아가 목을 꺾고 쳐 박혔다. 가공할 위력이다. 수십 근 사람 몸을 날려 버리는 힘, 화산 일절, 오행의 무인(武人)이란 이런 것임을 뚜렷이 보여주는 듯 했다.
“요녀여! 직접 나서거라!”
빠악!
공중으로 뛰어올라 앞으로 차낸 각법에 상체 전체가 뒤틀려 버린다. 흑포 괴인 둘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적도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는 무용. 혀를 내두를 무예였다.
“그렇게는 안 되겠네요.”
이미 담벼락 위에 올라가 있는 요녀다. 땅을 박차는 오행진인은 흑포괴인들이 휘두르는 손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빠악!
흑포괴인 하나의 신형이 뒤로 튕겨났다.
펄럭거리는 검은색 장포를 타 넘은 오행진인이다.
공중에서 내리찍는 일장을 막아내는 흑포괴인의 팔이 ‘우지끈’ 소리와 함께 뒤틀려 버렸다.
파라락! 꽈앙!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부러진 팔을 그대로 휘둘러 오행진인의 장법에 맞서 나갔다.
“크크크.”
오행진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느낀바 그대로, 이 괴인들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일반적인 공격으로 끝장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텅!
“소진, 청람! 이곳을 지켜!”
담벼락에서 뛰어내리며 매화권사들을 불렀다.
상궁으로 향하는 요녀를 막아야 하는 바, 그것을 맡을 사람은 오행진인 자신뿐이었다.
파바바바박!
뛰 쫓아 들어오는 흑의 무인들을 하나 하나 떨구었다.
암향표 신법의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후방의 적들을 차단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기(神技)라고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쾅!
그런 신기도 상궁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제 갈 길을 잃어 버렸다.
상궁 안에는 이미 들어서 있는 흑포 괴인들이 여섯이나 된다. 가로 막은 것은 셋. 오행진인은 철벽과도 같은 검은 그림자들을 맞이하여,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용맹하게 무공을 전개했다.
팡! 파파팡!
어려웠다.
흑포괴인들은 굉장히 강하다. 부상의 영향을 안 받는 비정상적인 신체와, 바위를 부술 만큼 강력한 일격들이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타탁! 쐐액!
쏟아져 들어오는 흑의무인들도 문제다.
상궁의 바로 앞까지, 보무제자들과 선검수들의 방벽은 뚫려 버린 지 오래였고, 남아있는 방어선이라고는 오행진인과 매화권사들 셋이 전부였다.
‘헌데, 대체 왜 상궁까지!’
그 이유를 알아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궁 안 쪽, 장문인의 태사의를 둘러싸고 서 있는 네 개의 기둥을 부수고 있는 요녀와 흑포괴인들이 보였던 것이다.
‘설마!’
설마가 아니다.
기둥을 부수고 있다면 노리는 바가 자명하다.
그 곳에 감춰진 제어 불능의 병기들. 사방신검을 노리고서 이러한 짓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었다.
쿵! 콰쾅!
“안 돼!”
속절없는 외침이다. 부서지는 한 쪽 기둥 안으로부터 수십 장 부적에 덮여있는 푸른 색 목갑이 드러나고 있었다.
콰직!
두 번째는 붉은 색 목갑이다. 역시나 부적에 덮여있는 상태였다.
오행진인의 눈에 다급함이 떠오를 때, 세 번째 검은 색 목갑, 그리고 결국 네 번째 흰 색의 목갑까지 마저 바깥으로 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기둥 속 공간에 깊이 박혀있는 사색(四色)의 목갑.
암천 이십 팔 수의 별들을 수호하는 사신(四神)의 영령처럼, 언제까지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술식(術式)........! 잘도 봉인해 놨군요. 시간이 걸리겠어요.”
오행진인에게 던지듯 발하는 목소리엔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전에 없는 사나움이 엿보이고 있다. 이 상황이 매우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다. 기둥 곳곳을 살피고, 부적들을 살피며 뽑아내 운반할 방법을 고민하는 요녀의 모습, 오행진인의 손속에도 다급함이 깃들었다.
‘어서 돌파해야......!’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화산파 오행진인의 이름이 이렇게도 무력할 수 있다니.
생전 처음 느껴보는 절망감이다.
눈앞에서 사문의 비보(秘寶)를 강탈당하는 심정이란 참으로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사용하지 못하는 물건이었을지라도.
* * *

삼인 일조로 지키고 서 있는 길목을 한 번 더 돌파했다.
이번에는 오히려 첫 번째보다 더 어려운 싸움을 했다.
옆구리에 작은 검상, 오른 쪽 등에도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격한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처음 어깨에 입었던 상처도 더 벌어진 느낌이었다.
‘아직 멀었어.’
확실히 부족했다. 그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자하진기의 공능 덕분이다.
무공의 정심함. 깨달음의 깊음 따위가 아니다.
그를 움직였던 것은 자하기(紫霞氣), 자연으로 빗은 사부님의 숨결일 따름이었다.
‘아프다.......’
익숙하지 않은 고통이다. 정신없던 고전(苦戰)의 와중에서는 느끼지 못했었지만, 한 숨 돌리고 보니, 세 군데 벌어진 상처가 굉장히 쓰리고 아팠다.
옷을 찢어 세 군데를 모두 동여맸다.
몇 벌 없는 도복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확실히 살기는 살은 모양이다.
저 앞에 누워있는 또 한 명 보무 제자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는 살아서 도복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구는 부릅뜬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창창한 삶의 저편으로 넘어가 버린다.
씁쓸함과 아릿함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훌훌 털어내듯, 달리려 할 때다.
뒤에서부터 느껴진 기척.
청풍이 급하게 몸을 돌렸다.
화아악!
날아들고 있는 흑의 무인이 있었다.
그것도 광폭한 숨결이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방금 쓰러뜨렸던 흑의 무인 중 하나.
기절한 줄 알았더니, 금새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흉흉하게 내쳐오는 협봉검이 곧장 청풍의 목덜미를 노려오고 있었다.숨이 턱턱 막히는 위급함 속에서, 청풍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 뻗었다.
파팟!
청풍의 오른손이 흑의 무인의 소매를 잡아챈다.
왼발을 축으로 반 바퀴 몸을 회전시키고는 딱 멈추며, 협봉검을 잡은 상대의 팔을 확 재껴버렸다.
모든 것이 무의식중에 이루어진 일.
청풍의 손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안 돼!’
멈출 수가 없었다.
워낙에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잡아 채 재껴버린 팔을 뒤집어 그대로 밀어 넣는다. 꺾여있는 손목, 흑의 무인이 잡은 협봉검의 검 끝은 그 자신의 몸을 향해 겨눠져 있었다.
푸우욱!
검 끝이 흑의 무인의 옷을 찢고, 갈비뼈 사이를 가르며 들어갔다.
심장을 꿰뚫고는 핏줄기를 머금으며 등 뒤로 솟아나온 협봉검이다.
‘죽는다.......!’
청풍은 흑의 무인의 두 눈이 흐려지는 것을 보며, 커다란 혼란을 경험했다.
‘죽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이지?’
흑의 무인의 몸이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급격히 생기를 잃어가던 두 눈. 곤두서듯 올라온 핏발과, 흔들리던 두개의 눈동자.
이미 거기에 없지만, 거기에서 그를 바라보는 듯 지워지지가 않는다.
‘죽......였다. 사람을!’
손이 떨리고 있었다.
태을미리장, 금나수의 변형.
손목을 잡아채 꽂아 넣으며 느꼈던 그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다.
옷자락이 찢겨지는 느낌. 그리고 스쳐가던 갈비뼈, 힘있게 박동하던 심장의 근육까지.
그가 못 쓰게 만든 상대의 육신이 손끝을 붙든다.
‘이런 것이었을 줄은 몰랐다.’
사람을 죽이는 것.
언젠가는 하게 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익숙해 질 것 같지 않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사부님.......’
청풍은 억지로 자하진기를 휘돌렸다.
첫 살인의 고통을 사부님께 이야기하기라도 하듯, 끌어올리는 진기에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벌써........가라 앉는가.’
지나치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는 없다.
‘사람을 죽였음에도.......’
하지만, 역시나 자하진기의 효용은 스스로를 두렵게 만들 만큼 엄청나다.
빨라졌던 심장의 고동소리가 금새 제 속도를 찾고 있었다.
손도, 언제 그랬냐는 듯 떨림을 멈추며,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돌아왔다.
자하진기가 어루만지는 곳은 마음의 밭, 중단전이다. 언제라도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무변(無變)의 공능이었다.

짧은 시간.
첫 살인의 강렬함을 삭히고 있는 청풍.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위, 불길은 은선대를 타 넘어 연화봉 꼭대기를 붉게 밝히고 있는 중이다.
걸음이 달리기가 되고, 자하진기가 일으키는 신법이 되어 산길을 나아가는 그의 앞에 하나의 갈림길부터, 제자들의 시신 대신 흑의 무인들의 시신을 발견한다.
‘이쪽에서부터 누군가 올라 온 모양이다.’
아래쪽으로 이어진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산 밑까지 뻗어 있는 산로(山路)는 오행진인이 올라 왔던 방향. 청풍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이 변고를 보고 산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그 혼자만은 아닌 것이다.
심호흡을 한 번 더 하며, 진득하게 눌러오는 마음의 부담을 털어냈다.
넓어지는 산길을 지나, 곧게 만들어진 화강석 계단에 이른다.
화산 경내로 향하는 계단, 드디어 난장판이 된 장운대가 눈에 들어왔다.
‘심하구나!’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매캐한 연기가 코끝을 괴롭히는 가운데, 막 ‘우지끈’ 하고 무너지는 정진묘 전각 한 귀퉁이가 보이고 있다.
상상조차 해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늦은 밤. 맑은 공기가 적막한 연무장을 누비고 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타오르는 불길과 피냄새로 가득하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다.
화르르륵!
번져 나오는 불길이 기세를 올렸다가 사그라 들었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다는 듯, 넘실 넘실 줄어들고 있는 화광을 보고 있자니,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새삼, 가슴을 쳤다.
‘어찌하여.......!’
장운대 안으로 들어온 청풍은 딱히 뭔가를 찾는 것도 아니면서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이곳 저곳, 살아있는 제자들이 있다. 거동이 가능한 자들이 삼삼오오 돌아다니며 또 다른 생존자들을 찾고 있다. 불길을 막아 보려는 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타탓!
청풍은 곧장 장운대를 가로질러 은선대 쪽으로 향했다.
옳은 선택인가.
모른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챙기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
습격자들.
이렇게 놀랍고도 무서운 일을 저질러 놓았으니, 그 흉악함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니, 그 흉험함은 실제로도 맞닥뜨려 보지 않았던가.
사방 천지에 쓰러져 있는 흑의인들만 보아도 질릴 지경이다. 다짜고짜 살초(殺招)들을 날려 왔던 자들, 그런 자들이 이리도 많다니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래도.......!’
하지만 가야 한다.
저 안 쪽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들이 그의 망설임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었지만, 용기를 내기 위해 애썼다.
‘이왕 마음을 먹었다면.......!’
죽음을 모르고 뛰어드는 한 마디 부나방이라도 된 양, 청풍은 달리는 속도를 더 빨리 했다. 신음하는 제자들을 뒤로 하며 달리는 그의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오만가지 복잡한생각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파팍!
은선대 초입. 청풍은 한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계단 한 쪽 구석에 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자 때문이다.
가슴에 길게 그려진 상처에선 더운 피를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중, 익숙한 얼굴이다. 보무제자들의 무공과 일과를 감독하곤 했던 매화검수, 유자서였다.
“보무.......제자........인가?”
“예.”
작은 목소리. 죽어가고 있다. 저만큼이나 깊은 상처, 아무것도 모르는 청풍이 봐도,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리로, 와서 나를.......부축해라. 나는 싸워야........돼.”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만한 상처를 입고서도 싸울 생각을 한다.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잃지 않는 긍지다.
‘매화.......검수.......!’
이것이 바로 화산파의 자랑, 매화검수다.
굽히지 않는 강인함이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화산의 고고한 기상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순백의 매화였다.
청풍이 다가갔다.
손을 들어오는 유자서. 흔들리는 그 팔에는 이미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검 한 자루 들어올리기도 힘들 것이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일까. 유자서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오행진인께서.......오셨다. 일부러........부르지 않았어. 나는 잘 한 것이다. 이런 부상자에게 시간을 지체하면.......안 되니까.”
자부심이 어려 있는 표정이다.
유자서의 손을 잡은 청풍, 눈이 부시다. 그 표정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피워 올리는 기개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보무.......제자로는 어렵겠지. 나와 함께 가자. 그리고 싸워. 너도. 화산의 힘을........보여 주는.........것이야........”
뚝 뚝, 끊기는 말이 잦아든다.
잦아드는 말소리가 손에 잡힌 힘까지 앗아 가는 듯, 유자서의 팔이 축 쳐지고 말았다. 믿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부여잡은 매화검수의 손은 천근처럼 무겁기만 했다.
툭.
유자서가 죽었다.
계단을 울리는 그 팔의 무게가 억장으로 쏟아진다.
이 싸움은 생각보다 더욱 위험하다.
드높은 매화검수마저도 죽을 수밖에 없는 싸움. 청풍은 두려움에 질려 있음에도, 돌아가는 대신 평검수가 떨군 진검하나를 주워들었다.
유자서의 매화검은 손대지 않았다. 어찌 감히 그 고고한 영혼의 동반자를 건드리겠는가.
꺾여 버린 매화의 그림자에 한 번 더 눈길을 준 청풍은 이제,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매화검수.
그런 사람들을 선배로 두었다. 그런 사람들을 목표로 생각했었다.
물러날 수는 없다.
설사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일개 보무 제자밖에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가야 한다. 여기까지 그 장대한 그늘 속에서 그를 키워 준 화산파다.
사부님의 화산파.
어떻게든 나서야 할 때다. 두려워 할 때가 아니었다.

챙! 채챙!
은선대를 지나, 저 멀리 상궁이 보였다.
병장기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온다.
아직까지 남아있었던 선검수들과 평검수들이 흑의 무인들을 맞아 혼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 화산파 제자들 쪽이나 흑의 무인들이나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여기가......아니야.’
기이한 예감이다.
청풍이 거들어야 하는 싸움은 이곳의 싸움이 아니라는 느낌.
그가 맞닥뜨려야 할 싸움은 더 안에 있다.
상궁.
그토록 오랜 시간 화산파에서 살아왔음에도, 한번도 그 안에 발을 들여 놓아 보지 못했던 장문인의 거처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달려가던 청풍.
그가 몸을 띄워 상궁을 둘러친 담벼락 위에 올랐다.
밖에서 볼 때와는 또다른 광경이 그 안에 있다. 하늘을 날 듯 움직이는 흑포 괴인 하나, 떼로 몰려드는 흑의무인들과, 놀라운 무공을 뽐내는 세 명의 권사(拳士)들이 거기에 있었다.
‘매화권사!’
도복의 가슴에 새겨진 매화문양. 그럼에도 검을 들지 않았으니, 곧 매화권사들이다.
펼쳐내는 권격에 날카로운 발경이 함께한다.
예측할 수 없는 흑포 괴인의 움직임도 놀랍지만, 처음 보는 매화권사들의 진신 무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태을미리장!’
한 매화권사가 펼쳐내는 무공. 익숙했다.
유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장법은 청풍의 그것과는 또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능숙하다는 것.
한 순간 자하진기의 도움을 얻어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 상대의 손속에 맞춰 하나 하나 대응하는 정교함이었다.
‘그 보다.......!’
매화권사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은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싶은, 배우고 싶은 것이었으나, 자꾸만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상궁의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기이한 기운이다.
마치 그를 찾고 있기라도 하듯, 넘실대는 공기.
청풍은 담벼락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흑의 무인들이 막아섰지만, 청풍의 신형은 전에 없이 세밀했으며, 또한 전에 없이 빨랐다.
“되었다.”
상궁의 내부가 보일 때.
청풍은 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주변을 휩쓸고, 사라진다.
양쪽으로 길게 뻗은 양날겸을 든 작은 여자 하나.
흑포괴인들이 상궁 내에 있는 기둥들로부터 색색의 길다란 목갑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타앗!”
강렬한 기합 소리와 몰아치는 경력이 청풍을 한 발 물러나게 만들었다.
흑포괴인 셋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이.
오행진인이다.
매화권사들을 통괄한다는 이 강력한 장로에 대해서는 청풍으로서도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사부님께서도 수차례에 걸쳐 그 무예를 칭찬하신 바 있었던 강자. 그의 무공은 뒤 쪽 매화권사들의 그것과는 또 다른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평검수! 저것을 막아!”
경황 중이니, 착각을 한 모양이다.
흰색 수실. 평검수의 진검을 들고 있기 때문이었을지.
평검수 정도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었으면서도 재촉을 할 만큼,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큭!”
너무나 다급했기 때문일까.
무리를 하며 흑포 괴인들을 뿌리치려던 오행진인이 결국 일장을 얻어맞고 만다.
비틀거리는 오행진인.
“어서!”
청풍은 이를 악물며, 목갑들을 들쳐 올리고 있는 흑의무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 목갑들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사문에 중요한 물건인 것쯤은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위잉!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지.
상궁 내부를 날듯이 가로질러 검을 휘둘러보는 청풍이다.
항상 지니고 있었던 목검보다 훨씬 더 묵직한 진검이 매화삼릉검의 기세를 받아, 장쾌한 속도로 뻗어 나갔다.
쩡!
단숨에 튕겨나가는 검.
‘너무 빠르다!’
안 된다. 이것은.
이 흑포괴인들은 앞서 싸웠던 흑의무인들과 전혀 다른 자들이다.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청풍 정도로 맞설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었다.
콰쾅!
일격을 피해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요행이다.
땅을 친 장력. 상궁의 단단한 화강석 바닥에 금이 가 있었다.
‘상대할 수 없어.’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다.
자살행위다.
하나도 아니고, 셋이다.
기다란 목갑을 어깨에 둘러메고들 있다지만, 그런 것쯤은 문제도 아닐 것이다. 한 팔만으로 상대한다 해도 청풍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인께서도 굉장히 급하셨군요. 이런 애송이에게 바란다고 될 일이었던가요.”
요녀의 목소리가 상궁을 울릴 때.
청풍은 오싹한 공포를 느꼈다.
당장 괴이한 모습들 때문에 흑포괴인들에게만 신경을 썼었는데, 그럴 것이 아니었다.
이 요녀는 흑포괴인보다 훨씬 더 강하다.
무시무시한 힘.
요녀 작은 몸집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만 저희는 가봐야겠습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거든요.”
팡! 파파팡!
어떻게든 돌파해 보려 애쓰지만, 흑포괴인 셋은 도무지 틈을 보이지 않았다.
백중세.
삼 대 일로 동수다. 답답한 상황.
그 때다.
청풍의 눈길이 한 흑포 괴인에게 닿은 것은.
세 흑포 괴인들이 네 개의 목갑을 운반하려니, 한 놈은 양 어깨 모두에 목갑을 걸쳐 들고 있는 상태다.
청색의 목갑과, 백색의 목갑.
두 팔을 다 못쓴다는 뜻. 어쩌면 통할 수도 있었다.
‘가능할까.’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박차고 나간 청풍의 눈빛과, 이 쪽을 보고 있던 오행진인의 눈빛이 한 순간 빠르게 교차되었다. 요녀에게서 그토록 큰 두려움을 느꼈음에도, 어떻게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일, 몸을 숙이며 달려든 청풍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검날이 바람을 갈랐다.
쩡!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휘두른 흑포괴인의 발목에는 강철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튕겨 나가는 검자루를 억지로 쥐고 있는 청풍의 몸으로 무서운 경력들이 집중된다.
흑포 괴인 둘.
양영귀의 요녀까지.
‘끝인가!’
죽는다.
오른발로 땅을 박차고 몸을 띄우며 뒤 쪽으로 회전했다.
간발 차로 첫 번째 공격을 피해낸 후, 그 다음 일권이 날아들던 순간.
한 줄기 날카로운 기운이 날아와 청풍의 위기를 구해낸다.
매화오품지(梅花五品指).
화산 제일의 지법(指法), 오행진인이 날린 일격이었다.
피잉!
또 한번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요녀를 향해서. 휘두르는 양영귀에 부딪친 지공(指功)이 ‘땅!’하고 경쾌한 금속음을 울렸다.
퍼벅! 파팡!
청풍을 구해낸 대가로 두 흑포 괴인의 육장을 허용하고 만 오행진인이다.
비틀거리는 오행진인.
그의 손에서 마지막 매화오품지가 펼쳐지고, 청풍의 발도 착지함과 동시에 다시 땅을 튕겨냈다.
목표는 하나다.
양팔에 목갑 두개를 걸쳐 맨 흑포 괴인.
청풍의 검이 흑포괴인의 움직임을 멈칫하게 만들었을 때.
매화오품지의 경력이 날아가, 흑포괴인의 오른쪽 어깨, 백색의 목갑을 관통했다.
파삭!
한 귀퉁이가 부서진 그 백색 목갑.
보무제자 한 명과 장로 한 명이 성공해 낸 조그만 공격이 빚어낸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뭉클 뭉클.
큰 구멍이 난 백색 목갑의 안으로부터, 아지랑이와 같은 백색 기운이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연기처럼, 마침내 눈에 뚜렷이 보일 정도로 솟아나온 기운에 흑포 괴인의 입에서 기이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키이이이엑!”
텅.
고통을 느끼는 듯 몸부림치던 흑포 괴인이 백색의 목갑이 땅으로 던져 버렸다.
양영귀의 요녀가 눈을 굳히고, 흔들 흔들 쓰러지는 오행진인의 얼굴에 득의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 놈!”
양영귀의 요녀가 커다란 호통을 내질렀지만, 청풍을 향해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녀가 날아든 것은 백색의 목갑 방향.
기이한 주문을 발하면서 양영귀를 가져다 댄다. 하얀 기운이 살아있는 듯 양영귀의 접근을 막아내니, 신비롭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죽이겠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지,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을 발하는 요녀다.
그녀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위귀. 묘귀. 필귀! 신검을 들고 내려가라! 백호검은 포기한다!”
양영귀의 요녀가 청풍을 노려보았다.
극도의 살기(殺氣).
하지만 청풍은 살을 저며 오는 살기에도, 오직 하나, 백색의 목갑만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무엇일까.’
백색의 목갑에서 한 움큼씩 흰색의 기운이 흘러내릴 때 마다, 거기에 맞추어 심장이 한 번씩 뛰고 있음을 느낀다.
두렵다.
두려우면서도 친근하다.
마치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었다.
오행진인을 쓰러뜨린 세 흑포괴인들이 날아들고 있고, 앞에서는 무시무시한 요녀의 일격이 다가온다.
단숨에 목숨이 날아갈 순간임에도, 급박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느릿 느릿 보이는 힘의 흐름.
바닥에 가라앉은 하얀 기운이 그의 발을 휘감고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우웅!
청풍의 본신 수준으로는 절대로 피해낼 수 없었던 일격이다.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요녀의 공격임에도 상승 영역의 회피를 보여 준 청풍이었다.
몸을 숙이고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하다.
그토록 강하게 느껴졌던 흑포 괴인들의 쇄도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몸을 젖히고, 옆으로 빼는 움직임에 흑포괴인들의 공격들이 무산되고 말았다.
퀴융!
뒤에서 짓쳐오는 양영귀의 일격은 파공음부터가 달랐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몸을 날린 청풍이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일어난다.
그의 눈은 이미 그 자신의 눈이 아니다.
다른 무엇인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몸.
쳐내 오는 양영귀를 막은 것은 청풍이 팔을 뻗어 땅에서 들어올린 백색의 목갑이었다.
살벌한 겸신(鎌身)에 부딪친 목갑이 한 순간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파앙!
비산하는 나무 조각 사이.
드러나는 형상이 있다.
휘황한 백색 검날을 지닌 한 자루 검!
폭이 손가락 하나의 길이를 넘어갈 만큼 넓었으며, 넓은 검신에는 포효하는 백호의 전신 문양이 새겨져 있어, 그 압도적인 자태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한다.
검신에 길이는 이척 가량.
검병(劍柄)은 한자에 달하여 긴 편으로 강호에 흔히 통용되는 날렵한 모양의 검이 아닌, 고대의 검형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꽈악.
청풍의 손이 검병을 쥐었다.
하얗게 요동치던 기운이 빨려들 듯, 그 손을 통하여 청풍의 온 몸에 머물었고 먼 시간을 건너 뛴 전설이 청풍의 혈맥을 타고 흘러 심장에 이르렀다.
“이얍!”
쩡!
청풍의 손에서 첫 포효를 발하는 백호검의 기세는 말 그대로 도약하는 한 마리 범과 같았다.
양영귀의 날을 쳐 내며 앞으로 곧장 내질러 나간다.
뒤집어 회전시킨 두 번째 겸신(鎌身)이 백호검의 전진을 막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소용없다. 상체를 뒤로 재껴 피해낸 요녀다.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화악!
옆으로 물러나는 그녀의 뒤로부터 흑포괴인들이 날아들었다.
찍어내듯 내리 꽂는 흑포괴인의 손바닥.
청풍은 그 자리 그대로 선 채, 백호검을 위로 뻗어 올렸다.
쩡! 쓰걱!
강철 족쇄가 단숨에 부서지며 흑포괴인의 손목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그 오랜 시간 봉인된 채, 한번도 손질하지 않았을 터인데도, 백호검의 날은 천하명검의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에에에엑!”
잘려진 손목과 팔뚝이 하얗게 굳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돌덩이처럼 딱딱해 지고 있는 느낌.
괴인의 마기에 반응한 서방 백호, 금신(金身)의 힘인 모양이었다.
“백호 금신! 이런 애송이가 서방 백제(白帝)의 진력을 끌어내다니!”
양영귀, 요녀가 이를 악물었다.
분노와 당혹감을 쏟아내고 있는 그녀. 그녀를 앞에 둔 청풍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흐려졌던 눈에 빛을 되돌리고 있었다.
‘이것이........검(劍)?’
정작 청풍은 그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조차 모르는 듯 하다.
손에 든 것에서 전해지고 있는 힘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맥동하는 진기.
스스로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무슨 무공이든 전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자하진기도 삼단공의 벽을 넘어 사단공의 초입까지 나아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우웅!
검명(劍鳴).
검이 울부짖는다.
그 진중한 울림, 청풍의 발이 앞으로 내딛어지며, 그 팔로 검의 의지를 행한다. 강렬하고도 날카롭게 흘러드는 그 검날에 흑포 괴인들의 몸이 휩쓸려 든다.
파카캉!
강철 족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일격에 부서지는 팔.
뻗어내는 검에, 흑포괴인 하나의 어깨가 통째로 날아갔다.
‘도대체!’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매화삼릉검이 아니다.
펼쳐 본 적이 한번도 없는 무공이다. 그러면서도 강하다. 공격 칠할에 방어 삼할. 호쾌하고, 장중한 검도(劍道)였다.
퍼억!
흑포괴인 하나의 머리가 부서졌다.
잔인한 손속이라는 것도 별반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을 뿐.
“거기까지다!”
순식간에 두 흑포 괴인을 잃은 요녀가 앙칼진 외침을 발하며 달려 든다.
신검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백호, 맞이하는 귀병(鬼兵)의 이빨들이 춤을 추었다.
쩡! 쩌저정!
검이 곧 무공을 만들어 낸다.
이해할 수 없는 기사(奇事)를 온 몸으로 체험하는 청풍이다. 믿을 수 없는 일, 백색의 진기가 온 몸을 타고 흐르며 그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치칭! 쩌엉!
이십 여 합.
청풍은 점차 숨이 막힘을 느꼈다. 위험하다. 알 수 없는 공능이 그의 검격을 이끌고 있지만, 이제 한계다. 익숙하지 않은, 모르는 무공이라는 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그 진기는 점차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헐거워져 갔다.
“합!”
기합성을 내지르며 검을 떨쳐 보았다. 더 강한 검격이 나간다. 하지만, 요녀의 응수는 현란하면서도 정교했다.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청풍이, 아니, 백호검이 펼쳐내는 무공도 강했지만, 진신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양영귀의 요녀는 고강하기 짝이 없었다.
이기지 못한다.
청풍의 본신 진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무공의 힘을, 그 깊이를 청풍의 신체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익숙하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일격 일격에 쑥쑥 빠져나가는 진기를 감당하기에는 아직, 청풍의 기해(氣海)가 충분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꽝!
시간이 갈수록 힘이 줄어들고 있었다.
백호검에서 전해지는 기운도 점차 그 양이 적어진다. 마치 고여 있던 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가, 점차 그 흐름이 줄어드는 형세와도 같았다.
촤악!
도포 자락이 길게 찢겨 나갔다.
호방하게 이어졌던 미지의 검도가 더 이상 발동하지 않고 있다. 청풍이 펼치고 있는 검도는 이제 매화삼릉검. 어찌 된 것인지 불가해한 현상에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런 것이었군!”
왜 그런 것인가.
어찌하여 신비의 검기가 매화삼릉검으로 바뀌었는가.
청풍은 영문을 몰라도, 양영귀의 요녀는 내막을 알아챈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내쳐오던 일격에 고삐를 풀고, 사납게 쳐 들어오는 요녀다. 쏟아지는 살기어린 공격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뒤로 물러나다가 남아있는 흑포괴인의 일격을 맞이했다.
요녀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양 쪽에서의 공격이라니, 감당할 수가 없다. 손속이 어지러워지면서, 그렇게도 유장하게 흐르던 자하진기까지 바닥을 드러내 버렸다.
쩡!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내는 것은 오로지 신검 덕분이다.
휘두르고 있는 백호검만큼은 가히 신검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자랑하고 있다. 진기가 실리지 않더라도 무엇이든 베어버릴 수 있는 날카로움이 여기에 있었다. 게다가 흑포괴인은 이 백호검에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는 듯, 아까와 같이 흉폭한 기세로는 달려들지 못하는 상태였다.
공격을 해 오더라도, 간헐적일 뿐. 지닌 바 사기(邪氣)가 검이 내뿜는 정기(正氣)에 반응하여,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 틀림 없었다.
취링! 슈각!
양영귀가 한 마리 영사(靈蛇)와도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백호검을 타고 올라와 청풍의 팔뚝을 베어냈다.
핏줄기가 길게 솟았지만, 청풍은 검을 놓지 않았다. 검을 놓치는 순간 죽는다. 자하진기만으로는 불가능한 싸움이었다.
쩡! 쩌정!
몇 합이련가.
기진한 상태에서도 무아지경에 빠져 들며, 근근이 요녀의 살의를 버텨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무슨.......!’
한 순간, 백호검이 새롭게 일으키는 변화가 있다.
예상 밖의 그 변화.
결코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빨려 들어간다.......!’
이미 쥐어 짤 만큼 쥐어 짠 진기다.
하지만, 어디에 그런 진기가 남아 있었는지.
청풍에게 힘을 주고 있는 백호검이 이제는 반대로 그의 진기를 빼앗아 가기 시작한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는 것일 터이지만, 이대로라면 원정까지 손상당할 수 밖에 ???다. 제어할 수 없는 병기(兵器)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크윽!”
아찔해지는 기분과 함께 코 언저리에서 무엇인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코피가 쏟아졌다.
혈맥을 타고 있었던 백색의 금기(金氣) 역시 갑작스레 요동을 치며 전신에 참기 어려운 고통을 선사했다.
위이이잉!
망가지는 몸.
힘의 대가(對價)라고 해야 하는가.
일순간, 다시금 강해진 면모를 보이는 청풍이다. 붉게 충혈된 눈과, 피를 쏟아내는 얼굴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드러내면서도, 양영귀를 상대하는 손속이 더 빨라져 있었다.
‘안 돼........’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대로 놓아버리고만 싶었다.
‘놓으면, 죽는다......!’
죽음의 순간을 느낀 것이 오늘 하루에만도 벌써 몇 번째다.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 또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정말로 죽는다.
매화검수 유자서의 의연한 죽음을 떠올렸다.
백호검이 얼마만큼 그의 힘을 빨아먹더라도.
전신을 괴롭히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버텨내야 한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그래서 결국 죽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
청풍에게 구원의 손길이 온 것은 죽을 듯 죽을 듯, 쓰러지기 직전의 일이었다.
몰아치던 요녀의 공격이 딱 멈춘다.
한 쪽으로 돌아가는 몸. 언제 그렇게 악독한 손속을 보였냐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결국 오시고 말았군요. 무광검께서.”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이른 곳, 상궁의 담 아래, 깡마른 도사 한 명이 나타나 있었다.
“네가 이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렸다.”
뽑아드는 것은 칙칙한 빛깔의 나무 막대기다.
한 자루 목검에 천하를 건다는 초절정고수, 목영진인.
막강한 기도가 넘실넘실 일어난다.
거의 의식을 잃어가는 청풍으로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조금 늦었네요. 무광검의 경공은 그 목검만도 못한 모양입니다.”
“건방지구나. 꼬마 계집.”
절도 있는 말투에 어울리지 않는, 거침없는 언사다. 그가 목검을 들어 요녀를 겨누었다.
“오시면서 보셨을 텐데요. 그것들이 더 급하지 않던가요?”
“쓰지도 못하는 보검(寶劍) 나부랭이들, 내 알 바 아니다.”
일대 파격.
파격적인 언행이다.
무광검, 병기의 날카로움을 찾는 것은 진정한 검도가 아니다.
오직 목검만을 사용하는 장로로서 온갖 신병이기를 눈 아래로 여긴다지만, 그렇다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설마하니 화산파가 그리도 오랫동안 숨기고 있었던 사방신검마저 신경 쓰지 않을 줄이야.
“굉장하군요. 사문의 물건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시끄럽다!”
신경을 긁으며 기이한 섭혼의 묘를 발휘하던 요녀의 화술(話術)이 전혀 먹히질 않는다.
화산 장로로서 상상조차 힘든 억센 말투다. 당황한 요녀. 목영진인은 쓸데없는 대화로 심력을 소모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 이 흉사를 벌려 놓은 요녀를 징계하는 것뿐인 모양이었다.
“어린 제자야! 그깟 보검 따위, 버리든 아니면 이 요사한 계집에게 죽든, 걸리적거리지 말고 어서 비켜나라!”
청풍을 향한 호통이다.
온 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 속에서 퍼뜩 정신을 차린 청풍이 백호검을 고쳐 잡았다.
방해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 해도, 어찌 물러나겠는가.
안간힘을 쓰는 청풍의 모습에 목영진인이 미간을 좁혔다. 양영귀의 요녀가 청풍을 돌아보더니, 입을 연다.
“대단해요. 대단해. 이 녀석은 제가 죽여 드리지요.”
위잉!
무서운 기세로 몸을 날리는 요녀다.
양영귀의 흉폭한 날이 허공을 가를 때.
말은 냉정하게 했어도, 가만 둘 수 없었는지 목영진인도 몸을 날렸다.
쒜에엑.
두 사람.
목숨을 빼앗으려는 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자.
그리고 한 사람.
스스로를 지키려는 자.
청풍.
삼엄하고도 사나운 공격을 맞이하여 청풍은 한 발작 앞으로 나선다.
온 힘을 다해 떨쳐낸 백호검에서 하이얀 빛무리가 일어났다.
쩌어엉!
백색의 불꽃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양영귀의 요녀가 튕겨 나간다. 달려들던 목영진인의 목검이 그녀를 겨누는 것을 보며, 청풍은 마침내 온 하늘이, 온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털썩.
힘이 풀린 다리,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청풍.
목검과 양영귀가 부딪치며 발하는 충돌음이 그의 위로 내려앉는다.
감기는 눈에 담아둘 수 없는 광경, 백호검과 함께 한 첫 싸움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 * *

“보통 준비를 철저히 한 것이 아닙니다. 중턱에 지원 병력인 철기(鐵騎)들이 기다리고 있더랍니다.”
“철기들이라.”
“요사한 계집과 그 무리들을 철통같이 수호하면서 도주하더군요.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구나.”
의식 저편으로부터 아득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다.
‘목영진인이신가?’
목영진인,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다.
“워낙에 철두철미한 놈들이라.......다만 강호에서 종적을 찾을 수 있도록, 곧바로 추적을 붙여 놓았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했을꼬. 그보다 다친 듯한데, 상처는 괜찮은가?”
“예? 아, 예. 괜찮습니다.”
목영진인의 말투에는 공손함과 함께 조심스러움이 함께 하고 있다.
“누가 있어, 네게 손해를 입힐 수 있었을지. 철기의 무리들 중에도 고수가 있었으렸다.”
“아닙니다. 제 잠시 불민하여 흐트러졌을 따름입니다.”
‘누굴까.’
누군지 모르겠다. 얼마나 높은 분이실까. 그 음성에서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선기(仙氣)가 우러나온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깨어나는 모양이로군. 조금 더 쉬도록 하거라.”
세월이 세겨진 늙은 손이다. 다가와 수혈을 짚는 그 손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의식이 끊기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느낀 것은 등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다는 사실이었다.
맨 바닥이 아니다. 침상 위, 건물 안이었다.
“백호는 골육을 손상시킨다. 진기가 다 고갈되었는데에도 살아있구나. 이런 것은 처음 보았다.”
“이 상태에서 더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더 나빠지지도 않고 있습니다.”
“받아들이고 있은 게다. 백호검이 이 아이를 그 주인으로 인정한 모양이로다.”
선기(仙氣) 가득한 음성 속에서는 지고한 연륜이 묻어 나오고 있다. 그 목소리 깊은 곳, 오랜 경험 속에서도 겪어 본 적 없다는 의아함이 낮게 깔려 있었다.
“누구의 제자라 하였던가?”
“선현의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선현이라.......과연........”
사부님께 가지는 호감이 느껴졌다. 지금껏 보였던 다른 장로들의 반응과는 다르다. 진실로 궁금하다. 대체 누구실까.
“사신검 중 백호검만 남았구나. 목영. 그 사상은 익히 알고 있었던 바이다만, 사방신검은 예사의 보검이 아니었도다. 가벼이 여긴 것은 실수라고 네 아니 말할 수 없겠다.”
“참오하고 있습니다.”
잠시의 침묵.
가라앉는 공기가 점차 깨어나고 있는 청풍의 정신을 무겁게 내리 눌렀다.
이윽고 두런 두런 들려오는 현기(賢氣) 어린 목소리.
청풍은 다시금 의식을 놓아 버렸다.

“원로원을 소집하라.”
“원.......로원을........말씀이십니까.”
“조양봉에 제자들을 보내라. 낙안봉에도. 원로원 뿐 아니라 도문(道門)과도 상의를 해 봐야 할 일이다.”
매화검신. 옥허진인.
목영진인이 마주한 인물이다. 원로원의 소집,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목영진인이다. 원로원과 도문이 가지는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화산 검문.
원로원.
그리고 화산 도문.
연화봉 정상에 위치한 화산 검문은 도가성지 서악 화산에 자리 잡은 수많은 도가 일파 전체로 따지자면, 자그마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산을 닮은 강인한 도사들.
화산 검문이 존재해 온 것은 수백 년, 어쩌면 그 보다도 전부터다.
하지만 제자들의 지위를 구분하며, 수많은 속가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크게 중흥하게 된 것은 기껏 수십 년에 지나지 않았다.
원 시대. 압제와 탄압 속에서 구파의 암흑기를 어렵사리 버텨낸 화산파다.
반원의 기치를 올리는 강인한 도사들을 수없이 배출하고, 또 잃어 버렸던 화산검파가 그 규모를 확장시켜 무림 거파로서 그 이름을 꽃피우게 된 것은 당금의 천화진인 대에 이르러서였다.
천화진인.
속가 제자들을 무한정 받아들이고, 천하 인재들을 끌어 모아 무공을 연구하니, 화산검파가 띄게 된 성격은 도문(道門)이라기보다 패주(覇主)에 가까운 무파(武派)라. 검도(劍道)를 좇아가던 원로 도사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불만이 생겨난다.
검(劍)을 추구하지 않는 도인(道人)들이 떨어져 나오고, 높은 연배의 장로들이 연화봉을 떠나 조양봉에 자리 잡았다.
화산검문, 화산파의 특화다.
수십 리 대산(大山), 봉우리가 달라지니 왕래가 드물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서로 간에 알 길도, 관심도 없다.
전대, 전전대의 고수들. 추측키 어려운 선인들이 즐비할 법도 한데, 이와 같은 적습에도 나타나지 않았음에는 그와 같은 비사(秘事)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원로원 소집의.......안건(案件)은 무엇입니까.”
“저 아이를 하산(下山)시키는 것에 관해서이니라.”
“하산........이라면........”
“백호검과 함께 강호로 내보낸다 함이다.”
“가.......강호로 말입니까.”
“그래.”
“장문인.......장문 사제가........반대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허면.....원로원과 도문은........”
“원로원과 도문이 결정한 사안은 장문인으로서도 바꿀 수없다. 그것이 약조한 것 아니었더냐.”
목영진인이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장문사제가 가만히 있을까. 그토록 중요한 사안, 중요한 물건이라면 장문인, 천화진인이 손에서 놓을 리가 없다. 어떻게든 손에 쥐고 있으려 하리라.
“본디, 사방신검을 쥔 자들은 큰 위험을 겪는다. 검이 내뿜는 기운이 혈맥을 타고 흐르니, 상충을 일으켜 내상을 입히는 도다. 내력이 약한 자는 종국에 내력이 고갈되어 죽음에 이르고, 내력이 충만한 자는 본성을 잃고 검에 휩쓸리게 된다. 저 아이는 어느 쪽도 아니다. 검과 상응하여 안정을 이루고 있는 바, 이는 검이 제 주인을 찾았다고 볼 수밖에 없느니라”
“그렇기에 더욱......”
“천화를 잘 알고 있구나. 천화는 탐심이 많다. 오직 화산의 위상과 중흥을 온전하게 하려는 마음에 그냥 두고 보았다만, 이번에는 천화의 뜻대로 둘 수가 없구나.”
매화검신의 눈이 오묘한 현기를 머금는다. 세상 밖의 이치를 설명하려는 듯. 그의 음성에도 선정(仙瀞)한 기운이 깃들었다.
“천화라면 백호검을 풀어 놓을 리가 없다. 이 화산에 잡아둔 채, 그 힘의 비밀을, 저 아이가 백호검을 잡고도 무사한 이유를 알아내려 할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은 알려고 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물(神物)의 주인이란 인력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닐진저, 저 아이가 백호의 주인으로 내정되었다면 그대로 천하에 내보내는 것이 옳은 일이다. 저 아이로 하여금 나머지 세 검을 찾아오도록 하는 것도 좋겠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하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외부보다, 백호검 그 자체이니라. 다만, 저 아이의 몸에는 알 수 없는 내력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이 그 위험을 막아 주련지도 모른다. 그 내력이란 제 사부 선현이 남겨준 것일 터, 선현은 본디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고, 나아가 도문과도 스스럼없는 인덕이 있었도다. 그 천품이 그 제자로 하여금, 백호와의 연을 닿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현이........그 정도였던지요.”
“진인은 멀리 있지 않아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 두고 두고 배워야 할 자세다.”
긴 이야기, 매화검신 옥허진인은 한 번 더 목영진인을 응시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호검은 그 스스로 선택한 주인을 섬기고, 지킨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사방신검은 서로를 부른다고들 하지. 저 아이의 하산 문제, 이 일은 도문과 원로원이 맡는 것으로 하겠다. 사방신검은 본디 연화봉, 검문의 물건이 아니다. 기실,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 화산의 물건도 아니었느니라. 천화, 장문과 장로들은 화산을 습격한 흉수들의 추적에 전념하여라. 사방신검의 회수는 원로원 책임 하에 해결하겠다.”
“알겠습니다.”
단호한 말에 깃든 매화검신의 의지다.
그가 그렇게 정했다면 그러해야 하는 것.
화산을 통틀어 최고의 고수로 추정되는 옥허진인이다.
검문과, 도문, 그리고 원로원과의 갈등이 그 밑에 깔려 있더라도, 목영진인은 더 이상 감히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매화검신의 존재는 화산에서 신화,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목영진인은 아직까지도 한 손에 백호신검을 걸치고 누운 청풍 쪽을 바라보았다.
화산 본산에 행해진 적습과, 오래된 신검의 전설.
세월의 부침과 화산파 내부의 갈등까지.
목영진인은 느낀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그가 아니라, 아직 어리다고밖에 할 수 없는 한 명의 보무제자임을.
서산 연꽃 바위의 황적색과 서방 일곱별의 백색이 함께하는 바람.
천하에 풀려난 사신(四神)의 검, 첫 번째가 엮어낼 바람이 아직 멀리, 이제와 이 앞에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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