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조회수 14 15세 이상 이용가 등록 2026.08.19
고양이 여인숙

1화. 프롤로그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예상대로 다섯번 째의 검문소에서도 건석의 차는 멈추어야 했다. 세번째 검문소에서부터
는 건석은 옆자리에 앉았던 은주를 다마스 밴의 뒷부분에서 서성이던 반젤리스와 카이로
에게로 합류시켰건만 검문소의 경관들은 기가 막히게 이 이상한 차의 내부를 궁금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을 출발할 때부터 은주를 비롯한 세 녀석이 마구 흥분하기 시작했고
거울에 비친 건석의 모습은 마치 이놈들을 도살장으로 끌고가는 흉악한 도살업자쯤으로 보
이기에 딱 좋았다.
그나마 은주는 주인의 마음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이 다소 침착하려고 노력했지만 반젤리스
와 카이로는 달랐다. 연신 지나치는 타이탄 트럭의 그림자에게 조차도 으르릉거리며 콧잔
등을 안으로 일으켜 세우곤 했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면허증 조회가 끝난 경관이 다마스의 뒷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동시에 세 놈이 콧털을 일으켜 세우며 경관을 노려보았다. "쉿 하는 건석의 신호에 놈들
이 꼬리를 내렸다.
여행이라는 짧은 말과 함께 설명에 지친 건석은 개들의 혈통과, 내역이 적힌 일종의 족보
첩을 내보였다. 이리저리 살피던 경관이 족보첩을 돌려주며 경례를 했다.
차는 다시 2차선의 좁은 국도를 따라 아산만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50년
만의 살인더위에도 불구하고 연한 연두빛의 벼들이 살랑거리며 바람에 스러지고 있었다
. 마침내 차는 발안을 지나 아산만의 드넓은 방조제 아래를 달리고 있었다.
은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두 놈이 따라서 일어나며 탁트인 바다의 광경에
잠시 초조한 심경을 달래는 듯 했다. 건석은 냉방기의 스위치를 끄고 대신 창문을 열어
주었다. 순간 훅하고 차 안으로 뜨거운 기운이 짠 바람과 마구 뒤엉켜 침입해 들어왔다
. 그래도 자연의 바람이 훨씬 더 부담스러운 듯 세 놈은 코를 벌름대기도 하고 입맛을
쩍쩍 다시며 눈을 껌뻑였다.
이내 차는 아산만 방조제보다 더 광활한 삽교 방조제로 뛰어들었다.
바다를 보더니 반젤리스와 카이로가 끙끙대기 시작했다. 놈들이 급한 모양이었다.
잠시 삽교호 유원지에 차를 멈추었다. 며칠간 뜬눈으로 밤을 세운 탓에 몰골이 앙상한 건
석은 지친 몸을 그대로 벤치 위로 가져갔다. 은주가 잽싸게 건석의 곁에 뛰어올랐다. 그
리고 둘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멍하니 앞에 펼쳐진 간척지를 내려다보았다. 반젤리스와 카
이로는 실례를 할 장소를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두 놈이 거의 동시에 이끼낀 바위로 잔뜩 쌓아올린 방파제 아래로 뛰어내려가자 조개를
줍던 아이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놈들의 품위있는 행동을
아이들은 금새 눈치챘다. 볼일을 마친 두 놈이 비호처럼 방파제를 뛰어올라와서는 주인
의 곁에 나란히 앉는다. 이들은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동지임을 지금 이 순
간만큼 강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건석의 미안해하는 마음을 이들은 다 안다는 듯이 그렇게 오늘따라 잠시도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붙어있으려 했다.
멀리 하늘과 맞닿은 바다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던 건석의 눈이 점점 흐트러져 갔다. 겨우
가라앉혔던 악몽 같은 기억들이 이제 몇 시간 후면 있을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피의 전
투를 조금씩 들쑤셔내는 것이었다.
쿵 . 쿵 . 아주 일정한 간격으로 북치는 소리가 건석의 가슴 속으로부터 번져나왔다. 입
술을 깨물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 공포를 다스려 보고저 노력하나 건석은 어느새 실패하
고 만다. 바다 바람 속에서, 아니 정확히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함께 후각에 익은 진득
한 피냄새가 몰려오는 듯했다.
지난 5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부터 시작된 끝도 없는 그 지옥같은 피냄새가, 아예 건석
의 인생 전부를 지옥 속에서 첨벙이며 살게 했던 그 살육의 냄새가 그의 앞에서 요사스
런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건석은 가슴을 쥐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건석의 속에 자리한 또다른 건석은 지금이라도 늦
지 않았으니 돌아가라고 속삭인다. 그렇게 값싸게 죽으려거든 차라리 한강 다리 위에 올
라가서 장열한 황혼을 온몸에 뒤집어 쓴 채 그렇게 죽으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실제의 건
석 입에선 거의 오열과도 같은 단어 몇 개가 떨리듯이 나열된다.
[반드시 끝내어야 한다.]
그 악마들과의 전쟁을 . 기다려라!! 그 5년간의 눈물과 피흘림을 다시 짊어지고 지금 내
가 간다. 너희들의 심장과 내장을 맨 손으로 꺼내어 그 하얀 백사장 위에 불사질러 가루
로 만들어 번제를 드리고 말리라.
주인의 비장한 각오를 눈치라도 챈 듯이 곁의 세 동지가 일제히 포효를 시작한다.
[우우우 .]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건석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미 훨씬 건석의 앞에서 세 녀석이 빛처럼 재빨리 치달아 빨간 다마스밴 앞에서
꼬리를 살랑이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석은 다마스의 운전석 문을 열며 아련한 현기증을 느낀다. 바로 몇 미터 앞에 이 차의
색깔보다 더 붉은 우체통이 자신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순간 건석은 다시금 무척이나 망설인다. 최후의 순간까지 악마는 건석을 시험하고 있었
다.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달라고 부단히 종용하고 있었다. 그래, 결국 이런 결말
이 아닌가? 건석은 결심이 흐트러지기 전에 재빨리 운전석의 문을 열고 공구 케이스를
열었다. 그리고 약간 두툼한 누런 서류봉투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그렇게 우체통으로 다가갔다.
S 녀석이 이 원고를 받아볼 때쯤이면 난 아마도 능지처참 당한 고기덩어리처럼 여기저기
에서 뜯겨져나가 파도에 휩쓸려 다니리라. 아니면 태양이 떠오르는 바닷가에서 마침내
이 기나긴 악몽을 다 청산하고 불어오는 아침 바람을 두 팔 벌려 맞이하고 있든지 .
우체통은 건석의 망설임과는 대조적으로 그 커다란 서류봉투를 꿀꺽하고 삼켜버린다. 아
, 휑한 그의 손 안으로 아무 것도 잡히는 게 없다.
이렇게도 텅 비인 고독감이 고작 지난 몇 주간 밤을 새어 기록해나간 내 삶의 편린들이란
말인가? 건석은 한참 동안을 그 블랙호올 같은 우체통의 구멍을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이 우체통 속으로 빨려들어간 원고의 서두는 그의 사랑하는 친구 S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되고 있다.
친구가 이 글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할 때쯤이면 이 지독한 여름이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생각을 하며 그가 운전석에 올라앉는다. 좀 괜찮은 글을 써보라고 그토
록 볶아대며 정작 자신은 괜찮은 시나리오 한 편 발표하지 못하던 영화감독 지망생인 친구
가 이순간 이다지도 그리운 것은 지금 자신을 장악하고 있는 공포감과 연관이 있는 것일
까? 그 엉뚱한 친구녀석은 나의 글들을 보고 어떤 반응을 지어보일까?
눈에 선한 그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원고를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버릴 정도로 몰인
정한 놈은 아닐테고 자신이 가끔씩 영화평도 쓰곤 하는 신문의 한귀퉁이에다 실어주는 것
이 아닐까? 아니면 삼류 잡지 속의 믿거나 말거나 란에서 원색적인 사진과 함께 조잡한
활자 인쇄로 나뒹굴까?
그가 어떤 매체를 통해 나의 글을 발표하든 어차피 중요한 건 아니다. 분명 그는 기발한
방법으로 그가 항상 궁금해 했던 지난 5년간의 나의 행적들을 조심스럽게 세상에 토해놓
을 것이다.
건석이 모는 차는 다시 이글거리는 팔월의 태양 속으로 까마득히 길 떠나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 S 보아라 .

우리가 밤새워 토론하던 인본주의의 병폐니, 니체가 남기고 간
니힐리즘의 유산이니 하던 것들이 이밤 눈물처럼 내 가슴에 스며든다.
지난 5년간 갑자기 돌변해가는 날 지켜보던 안스러운 너의 시
선이 눈 앞에 선하다.
우리는 문학이란 서슬이 퍼런 칼날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
둥쳐왔고 누구보다도 그 생존이 주는 비굴함과 참흉(慘凶)에
가까운 배고픔을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난 너를 "사랑
하는 이란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한 형용어로 기꺼이 이 편지
를 시작한다.

이 원고를 너에게 보내겠다는 확고한 의지는 아직 서지 않았지
만 이 원고가 네 손에 들려져 있을 때에는 이미 난 픽션과 넌
픽션의 경계선에 존재한다는 삼계제천(三界諸天)의 모든 욕망
을 접어둔 채 어떠한 모양으로라도 편안한 안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이 원고를 읽어나가면서 마치 날 미친놈 취급하면서도 한편으
로 니가 가졌던 그 많은 지난 5년간의 궁금증들이 하나씩 얽힌
실타레가 풀리듯 풀려져 나가리라 믿는다.

5년전 그 여름의 중턱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은주의 수술을 맡았던 미국 심장병학회에서 발견했다는
그 극비의 사실은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 앞에서 조차 미친 듯이 세 마리의 족보있는 개를
사들이던 은주의 그 황당한 최후라든지(적어도 네 눈에 비친),
그리고 내 의식의 전부를 너무도 완벽하게 쇄편,쇄설 조각내며
휘감아돌던 그 악마들의 그림자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빠져들지 말기 바란다.
그 악마는 너와 나의 주변에서 온갖 잡다한 이론들 ..
양자물리학이니, 오펜하이머의 우주론까지 들먹이며 너의 지식
의 포만감 속에서 기생하려들테니까 .

부탁한다.
이 허황된 이야기를 읽고 혹시 일말의 진실이라도 있는 듯 나
를 찾아나서는 그런 우스광스런 짓은 하지 말아주길 간원한다.

다만 너에게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밤이기에 적잖은 밤을 세워 이 글들을 써내려간다.

사랑하는 친구여,
지금부터 너의 모든 상식을 잠시 내려놓고 5년 전의 그 무덥던
여름으로 나와 함께 잠시 거슬러 올라가자 .

모든 논리와 흥겨운 이성을 배냇냄새 비릿한 원초의 상태로 돌
려놓고 말이다.

94년 7월 7일.
친구 건석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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