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해 여름
고양이 여인숙
2화. 그해 여름
" "
계단이 휘청거렸다.
미 대사관의 건물 내부가 일순간 거대한 미로가 되어 나를 뒤흔들고 있었다. 좁다란 비상
계단으로 비틀거리며 내려가는 내 시선 속으로 계단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덮치는 기분이
었다. 3층 비자발급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2층 이민국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매캐한 화염병 냄새가 여전히 이끼처럼 기생하는 철망으로 엉기성기 얽어놓은 대사관의
문을 빠져나왔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새벽 4시부터 무려 7시간을 꼬박 기다
린 은주가 환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던 그녀가 잠시 나의 어두운 낯빛을 발견하
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떻게 됐어요? 설마?]
[개같은 새끼들 .]
내 입에서 욕부터 튀어나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가끔씩 비자 인터뷰에 미끄러지곤 욕을 해대는 친구들을 보곤 한심하
다는 생각을 하곤 하던 내가 바로 그 저급한 주인공이 되어 있을 줄이야.
[못 받았단 말이예요?]
[가!]
난 대답 대신 은주의 팔을 잡고 그 잘난 입성(入城)을 기다리며 아련한 현기증 마저도 발
로 꾹꾹 누르며 몇 겹에 걸쳐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내 차가 기다리고 있는 쪽
으로 걸어갔다.
[이유가 뭐래요?]
평소에 침착하던 그녀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그쳤다.
[개새끼들 . 직장이 불분명하고 종합소득세가 적다나?]
난 정말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안산에 작년에 분양받은 아파트가 한 채 있고 물론 그나
마 은주의 수술 비용으로 비자만 발급 받고 팔 예정이었지만 어쨌든 몇 달 전에 산 89년
형 르망 등록증도 첨부했 건만 그 미국 기집년은 아예 서류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갑근세 증명서만 휙 훑어보더니 프리랜서냐고 물어왔다. 당연히 작가는 프리랜서라
고 했더니 종합 소득세가 적다는 것이었다. 49만원이면 작년 소득 3천5백만 원에 대한
과세 평가인데 그게 적으냐고 반박했더니 직장의 기반이 약한 자로서는 적다는 것이었다
.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시선이 나의 뒷사람에게로 옮겨졌다.
난 다급해졌고 그럼 한 달 짜리라도 달라고 했다. 미국에 꼭 가야할 일이 있다고 구걸 같
은 애원을 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내 눈만 말똥말똥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옆의 한국인
통역 여자는 한술 더 떠서 뒤엣 사람 기다리잖아요>라며 날 노려봤다.
양뺨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 순간 내가 초능력자라면 그 여자를 막고 있는, 아니 3층에 설치되어 있는 모든 유리
막을 다 부숴버리고 싶었어.]
차는 어느새 수원으로 뻗은 국도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의 만화같은 울분에 그녀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다가오는 교차로의 이정표만 멍하니 바
라보고 있었다. 왼쪽으론 우리의 아파트가 있는 안산 방면이었고 곧장은 일차선으로 좁
아드는 수원 방향이었다.
[우리 드라이브나 할까?]
은주는 금새라도 무너질 종이 인형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
이 고작 통속적인 드라이브뿐임을 서글퍼 하며 악셀레타를 힘껏 밟아 노란 대기등으로 막
변한 교차로를 잽싸게 통과했다.
[그러길래 내가 넥타이 매라고 했잖아.]
차가 수원을 통과해서 아직도 미궁에 빠진 연쇄 살인 사건으로 유명한 화성을 통과할 때
처음으로 그녀가 한 말이었다.
[그것 때문만은 아냐. 그 여자는 날 쳐다보지 조차 않던 걸.]
아, 그러잖아도 파랗던 은주의 입술이 더 파랗게 보였다.
[비행기 표는 어떻하지? 반납하면 제 돈 받지 못할텐데 .]
휴가철을 맞이해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운 비행기표를 KAL에 다니는 친
구녀석을 통해 겨우 10퍼센트 할인가로 구해놓고 떠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는데 .
아산만 방조제의 넓다란 도로를 통과할 때 은주는 바닷 바람을 한껏 들이마시려는 듯 고
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를 보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 왔다. 내가 따라
가지 못하면 은주 혼자 어떻게 그 막막한 미국으로 떠나 보낸단 말인가? 그리고 아무도
곁에 없는 삭막한 수술대 위로 올라갈 그녀를 생각하자니 비자를 캔슬한 그미국 여자에
대한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라 왔다.
삽교 방조제를 지나서 잠시 삽교 유원지에 차를 멈추었다.
유원지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지친 어깨를 주무르고 있을 때 내 코 앞으로 하얀 종이
컵이 불쑥 드밀어졌다. 종이 컵 가득히 수북히 담긴 바닷고동을 나의 옆에 앉아 쪽쪽
빨아당기는 사랑스런 여자의 어깨를 말없이 꼭 감싸 안았다.
팔월로 접어드는 오후의 태양이 멀리 간척지 위로 헐떡이며 떨어지고 있었다.
원래 섬이었던 안면도에 다리가 놓이고부터는 섬이라고 불리기엔 안면도는 좀 뭣했다. 안
면교를 통과해서 태안 해안 국립공원의 도로를 달릴 때는 이미 어둑해진 저녁무렵이었다
.
입버릇처럼 저녁노을이 보고싶다던 그녀에게 오늘 만큼은 근사한 저녁노을을 보여주고 싶
었다.
이제 막 속알이 탱탱해지기 시작한 옥수수들이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떨구고 서있었고 하
루의 논밭 일을 마감하려는 농부들의 분주한 손길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자기 수술 잘 끝나고 튼튼한 심장 가지고 돌아오면 우리 이런 데서 살자. 옥수수도 키우
고 , 원두막도 짓고 , 자기 좋아하는 담쟁이로 온통 집을 덮어버리고 그렇게 살자 .]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누렇게 퇴색한 담뱃잎을 가득히 실은 경운기의 행렬이 저녁 노을 속을 비틀거리며 달아
나고 있었다.
삼봉 해수욕장은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휴가철을 대비해서 여기저기에서 천막공사가 한창
이었다. 끝도 없는 모래사장이 정말 피빛처럼 짙은 황홀한 낙조가 되어 우리 앞에서 날개
를 펄럭이며 웃고 있었다.
오늘의 그 지겨운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 보내고 싶었기에 난 모래사장의 진입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어멋, 빠지면 어쩔려구 그래요?!!]
[빠질테면 빠지라지 뭐!!]
나의 차는 가볍게 집입로를 뛰어 넘어 로마의 원형 경기장보다도 더 넓은 모래사장을 내
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탄성에 가까운 비명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이미 만조에 가까와 오는 바다의 가장자리
에 바퀴를 바짝 갖다댄 채 달렸다.
바다의 표면은 청동빛으로 마구 갈라지고 이 순간 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심지어는
대기의 공기조차도 우리를 축복해주고 있었다.
정말 그녀도 잠시 웃음을 지어보이며 신기해하는 것이었다.
난 더욱 힘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제발 바퀴를 모래 속으로 빨아당기지
말아주소서.
[걱정 마! 다음 주에 영사를 직접 찾아갈께!! 그리고 무릎 꿇고 사정이라도 해볼께! 지
들도 인간인데!!]
그녀도 가쁜 숨을 내쉬며 소리질렀다.
[그러지 마!! 나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웬지 모를 슬픔이 마구 몰려왔다. 하늘과 수평선은 일체가 되어 온통 불타고 있었다.
세상이 불바다가 되어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난하고 비극 투성이인 연인을
삼켜버리려는 듯이 그 장열한 마지막 호흡까지도 화염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모래 속
에 박힌 조개껍질을 빼내던 아이들이 우리를 보곤 박수를 쳤다.
이 모래사장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긴 우리의 무대이리라. 난 은주의 손을 잡아 핸들
위에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과 핸들을 동시에 애무하며 트로이의 목마를 탄 개선
장군처럼 노을 속으로,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읍내라는 곳은 참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과, 버스들이 한데 뒤엉켜 질퍽거리는 갯벌처럼 물을 튕
겨내고 있었다.
장을 마친 사람들이 여기저기 쓰레기를 끌어모으며 무어라고 떠들고 손님들을 잡기에 길
거리까지 삐쳐나온 식당들은 웬지 지저분해보였다.
우리는 좀 더 깨끗한 식당을 찾으려고 계속해서 중앙선의 구분도 없는 일차선의 좁다란
읍내의 길을 헤쳐나갔다.
길이 끝나고 그나마 식당은 한군데도 보이지가 않았다.
한낮의 태양이 남기고 간 오열이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대지 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일단 차를 돌려 이 무지막지한 갈증을 식혀야만 했다. 길가의 매점에 들어가서 삐걱거
리는 냉장고 문을 열고 구석에 숨어 있는 캔커피 두 개를 집어들었다. 여전히 차 안에
머물러 있는 은주에게 캔커피를 하나 건네주고 막 운전석 쪽으로 돌아서 나올 때 매점 앞
의 간이 마루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가 눈에 띄였다.
혹시 이 근처에 회를 먹을 수 있는 깨끗한 식당이 없느냐고 물었고 노인은 잠시 눈을 껌
뻑이며 생각을 하다가 백사장 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백사장이 마을 이름이냐고 물었고
노인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가는 길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정말 오던 길을 약 20분쯤 거슬러 올라가니 왼쪽에 백사장이란 푯말이 눈에 띄였다.
그 푯말 쪽으로 접어들자 비교적 잘 정돈된 넓은 세멘트 포장길이 논둑을 따라 곧게 나 있
었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전진하자 어느 지점에서 길이 나누어 지고 있었다. 다행히
왼쪽 길은 공사중이란 푯말과 함께 두 개의 통나무가 엑스 자로 놓여져 있기에 갈등할 필
요도 없이 오른 쪽 길을 선택할 수가 있었다.
철이 덜 들어 일찍 알에서 깨어나온 잠자리들이 잘 곳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것
이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잡혔다. 그런 잠자리를 비아냥거리며 내가 막 핸들을 오른 쪽으
로 꺾을 때였다.
순간 뭔가 시커먼 물체가 우리 차를 향해 돌진해오는 것이었다. 먼저 그 형체를 알아보
고 비명을 지른 쪽은 은주였다.
은주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내 가슴이 아련히 아래로 가라 앉고 있었다.
2화. 그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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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이 휘청거렸다.
미 대사관의 건물 내부가 일순간 거대한 미로가 되어 나를 뒤흔들고 있었다. 좁다란 비상
계단으로 비틀거리며 내려가는 내 시선 속으로 계단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덮치는 기분이
었다. 3층 비자발급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2층 이민국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매캐한 화염병 냄새가 여전히 이끼처럼 기생하는 철망으로 엉기성기 얽어놓은 대사관의
문을 빠져나왔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새벽 4시부터 무려 7시간을 꼬박 기다
린 은주가 환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던 그녀가 잠시 나의 어두운 낯빛을 발견하
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떻게 됐어요? 설마?]
[개같은 새끼들 .]
내 입에서 욕부터 튀어나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가끔씩 비자 인터뷰에 미끄러지곤 욕을 해대는 친구들을 보곤 한심하
다는 생각을 하곤 하던 내가 바로 그 저급한 주인공이 되어 있을 줄이야.
[못 받았단 말이예요?]
[가!]
난 대답 대신 은주의 팔을 잡고 그 잘난 입성(入城)을 기다리며 아련한 현기증 마저도 발
로 꾹꾹 누르며 몇 겹에 걸쳐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내 차가 기다리고 있는 쪽
으로 걸어갔다.
[이유가 뭐래요?]
평소에 침착하던 그녀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그쳤다.
[개새끼들 . 직장이 불분명하고 종합소득세가 적다나?]
난 정말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안산에 작년에 분양받은 아파트가 한 채 있고 물론 그나
마 은주의 수술 비용으로 비자만 발급 받고 팔 예정이었지만 어쨌든 몇 달 전에 산 89년
형 르망 등록증도 첨부했 건만 그 미국 기집년은 아예 서류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갑근세 증명서만 휙 훑어보더니 프리랜서냐고 물어왔다. 당연히 작가는 프리랜서라
고 했더니 종합 소득세가 적다는 것이었다. 49만원이면 작년 소득 3천5백만 원에 대한
과세 평가인데 그게 적으냐고 반박했더니 직장의 기반이 약한 자로서는 적다는 것이었다
.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시선이 나의 뒷사람에게로 옮겨졌다.
난 다급해졌고 그럼 한 달 짜리라도 달라고 했다. 미국에 꼭 가야할 일이 있다고 구걸 같
은 애원을 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내 눈만 말똥말똥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옆의 한국인
통역 여자는 한술 더 떠서 뒤엣 사람 기다리잖아요>라며 날 노려봤다.
양뺨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 순간 내가 초능력자라면 그 여자를 막고 있는, 아니 3층에 설치되어 있는 모든 유리
막을 다 부숴버리고 싶었어.]
차는 어느새 수원으로 뻗은 국도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의 만화같은 울분에 그녀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다가오는 교차로의 이정표만 멍하니 바
라보고 있었다. 왼쪽으론 우리의 아파트가 있는 안산 방면이었고 곧장은 일차선으로 좁
아드는 수원 방향이었다.
[우리 드라이브나 할까?]
은주는 금새라도 무너질 종이 인형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
이 고작 통속적인 드라이브뿐임을 서글퍼 하며 악셀레타를 힘껏 밟아 노란 대기등으로 막
변한 교차로를 잽싸게 통과했다.
[그러길래 내가 넥타이 매라고 했잖아.]
차가 수원을 통과해서 아직도 미궁에 빠진 연쇄 살인 사건으로 유명한 화성을 통과할 때
처음으로 그녀가 한 말이었다.
[그것 때문만은 아냐. 그 여자는 날 쳐다보지 조차 않던 걸.]
아, 그러잖아도 파랗던 은주의 입술이 더 파랗게 보였다.
[비행기 표는 어떻하지? 반납하면 제 돈 받지 못할텐데 .]
휴가철을 맞이해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운 비행기표를 KAL에 다니는 친
구녀석을 통해 겨우 10퍼센트 할인가로 구해놓고 떠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는데 .
아산만 방조제의 넓다란 도로를 통과할 때 은주는 바닷 바람을 한껏 들이마시려는 듯 고
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를 보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 왔다. 내가 따라
가지 못하면 은주 혼자 어떻게 그 막막한 미국으로 떠나 보낸단 말인가? 그리고 아무도
곁에 없는 삭막한 수술대 위로 올라갈 그녀를 생각하자니 비자를 캔슬한 그미국 여자에
대한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라 왔다.
삽교 방조제를 지나서 잠시 삽교 유원지에 차를 멈추었다.
유원지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지친 어깨를 주무르고 있을 때 내 코 앞으로 하얀 종이
컵이 불쑥 드밀어졌다. 종이 컵 가득히 수북히 담긴 바닷고동을 나의 옆에 앉아 쪽쪽
빨아당기는 사랑스런 여자의 어깨를 말없이 꼭 감싸 안았다.
팔월로 접어드는 오후의 태양이 멀리 간척지 위로 헐떡이며 떨어지고 있었다.
원래 섬이었던 안면도에 다리가 놓이고부터는 섬이라고 불리기엔 안면도는 좀 뭣했다. 안
면교를 통과해서 태안 해안 국립공원의 도로를 달릴 때는 이미 어둑해진 저녁무렵이었다
.
입버릇처럼 저녁노을이 보고싶다던 그녀에게 오늘 만큼은 근사한 저녁노을을 보여주고 싶
었다.
이제 막 속알이 탱탱해지기 시작한 옥수수들이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떨구고 서있었고 하
루의 논밭 일을 마감하려는 농부들의 분주한 손길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자기 수술 잘 끝나고 튼튼한 심장 가지고 돌아오면 우리 이런 데서 살자. 옥수수도 키우
고 , 원두막도 짓고 , 자기 좋아하는 담쟁이로 온통 집을 덮어버리고 그렇게 살자 .]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누렇게 퇴색한 담뱃잎을 가득히 실은 경운기의 행렬이 저녁 노을 속을 비틀거리며 달아
나고 있었다.
삼봉 해수욕장은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휴가철을 대비해서 여기저기에서 천막공사가 한창
이었다. 끝도 없는 모래사장이 정말 피빛처럼 짙은 황홀한 낙조가 되어 우리 앞에서 날개
를 펄럭이며 웃고 있었다.
오늘의 그 지겨운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 보내고 싶었기에 난 모래사장의 진입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어멋, 빠지면 어쩔려구 그래요?!!]
[빠질테면 빠지라지 뭐!!]
나의 차는 가볍게 집입로를 뛰어 넘어 로마의 원형 경기장보다도 더 넓은 모래사장을 내
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탄성에 가까운 비명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이미 만조에 가까와 오는 바다의 가장자리
에 바퀴를 바짝 갖다댄 채 달렸다.
바다의 표면은 청동빛으로 마구 갈라지고 이 순간 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심지어는
대기의 공기조차도 우리를 축복해주고 있었다.
정말 그녀도 잠시 웃음을 지어보이며 신기해하는 것이었다.
난 더욱 힘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제발 바퀴를 모래 속으로 빨아당기지
말아주소서.
[걱정 마! 다음 주에 영사를 직접 찾아갈께!! 그리고 무릎 꿇고 사정이라도 해볼께! 지
들도 인간인데!!]
그녀도 가쁜 숨을 내쉬며 소리질렀다.
[그러지 마!! 나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웬지 모를 슬픔이 마구 몰려왔다. 하늘과 수평선은 일체가 되어 온통 불타고 있었다.
세상이 불바다가 되어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난하고 비극 투성이인 연인을
삼켜버리려는 듯이 그 장열한 마지막 호흡까지도 화염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모래 속
에 박힌 조개껍질을 빼내던 아이들이 우리를 보곤 박수를 쳤다.
이 모래사장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긴 우리의 무대이리라. 난 은주의 손을 잡아 핸들
위에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과 핸들을 동시에 애무하며 트로이의 목마를 탄 개선
장군처럼 노을 속으로,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읍내라는 곳은 참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과, 버스들이 한데 뒤엉켜 질퍽거리는 갯벌처럼 물을 튕
겨내고 있었다.
장을 마친 사람들이 여기저기 쓰레기를 끌어모으며 무어라고 떠들고 손님들을 잡기에 길
거리까지 삐쳐나온 식당들은 웬지 지저분해보였다.
우리는 좀 더 깨끗한 식당을 찾으려고 계속해서 중앙선의 구분도 없는 일차선의 좁다란
읍내의 길을 헤쳐나갔다.
길이 끝나고 그나마 식당은 한군데도 보이지가 않았다.
한낮의 태양이 남기고 간 오열이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대지 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일단 차를 돌려 이 무지막지한 갈증을 식혀야만 했다. 길가의 매점에 들어가서 삐걱거
리는 냉장고 문을 열고 구석에 숨어 있는 캔커피 두 개를 집어들었다. 여전히 차 안에
머물러 있는 은주에게 캔커피를 하나 건네주고 막 운전석 쪽으로 돌아서 나올 때 매점 앞
의 간이 마루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가 눈에 띄였다.
혹시 이 근처에 회를 먹을 수 있는 깨끗한 식당이 없느냐고 물었고 노인은 잠시 눈을 껌
뻑이며 생각을 하다가 백사장 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백사장이 마을 이름이냐고 물었고
노인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가는 길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정말 오던 길을 약 20분쯤 거슬러 올라가니 왼쪽에 백사장이란 푯말이 눈에 띄였다.
그 푯말 쪽으로 접어들자 비교적 잘 정돈된 넓은 세멘트 포장길이 논둑을 따라 곧게 나 있
었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전진하자 어느 지점에서 길이 나누어 지고 있었다. 다행히
왼쪽 길은 공사중이란 푯말과 함께 두 개의 통나무가 엑스 자로 놓여져 있기에 갈등할 필
요도 없이 오른 쪽 길을 선택할 수가 있었다.
철이 덜 들어 일찍 알에서 깨어나온 잠자리들이 잘 곳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것
이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잡혔다. 그런 잠자리를 비아냥거리며 내가 막 핸들을 오른 쪽으
로 꺾을 때였다.
순간 뭔가 시커먼 물체가 우리 차를 향해 돌진해오는 것이었다. 먼저 그 형체를 알아보
고 비명을 지른 쪽은 은주였다.
은주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내 가슴이 아련히 아래로 가라 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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