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제2장 - 독문귀환(毒門歸還) 2

조회수 7 15세 이상 이용가 등록 2026.09.19
독로무한
5화. 제2장 - 독문귀환(毒門歸還) 2


창령현의 나루에 도착하자 당문인들은 부랴부랴 내려 길을 떠났다.
몽뇌산은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머리를 한번 흔들더니 부지런히 길을 재촉했다.
당문인들과 헤어진 지 하루 만에 몽뇌산은 천초산이 있는 남창부 봉암현(鳳巖縣)에 도착할 수 있었다.
봉암현에 이르자 눈앞에 햇살을 등에 지고 뿌옇게 빛나는 천초산의 신비스런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여러 봉우리가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 평탄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몽뇌산은 줄곧 먹어 오던 독초가 바닥나자 건량을 씹으며 두 시진 동안 산길을 쉴새없이 걸었다.
해가 중천으로 옮겨 갈 무렵, 그는 마침내 천초산의 최고봉인 초령봉(楚嶺奉) 깊숙이
자리한 소사곡(素蛇谷)에 이를 수 있었다.
소사곡은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흰 뱀〔素蛇〕이 자주 출몰(出沒)한다 해서 사냥꾼들이
붙여 놓은 이름이었다. 소왕사(素王蛇)라고 불리는 그 뱀의 독은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절독에 속했다.
그러나 독문인이라면 소왕사의 독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또한 소사곡에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사모초(蛇母草)였다.
사모초야말로 소왕사의 주된 먹이임과 동시에 소왕사의 독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독초였다.
소왕사가 맹독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중독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원리였다.
따라서 소왕사는 절대 사모초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사모초는 천초산에서만 자라니 소왕사를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결국 사모초가 소왕사를 키우는 셈이니 사모초라는 이름의 유래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으리라.
몽뇌산은 곡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하지만 곡 안에는 소왕사도 사모초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아무리 맹독을 지녔다 하나 소왕사도 별수없는 뱀이고 보면 겨울엔 땅속에서 동면(冬眠)을 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모초는 신통하게도 소왕사를 키울 필요가 없는 겨울에는 땅속 깊이 숨은 채 말라 비틀어진 이파리
하나 내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몽뇌산은 호로병 모양으로 생긴 소사곡 너머 깊숙이 자리한 사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낡을 대로 낡아서 글씨의 칠이 거의 벗겨진 사문의 현판을 감회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 년여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문의 건물들은 더욱더 퇴락한 모습이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몽뇌산은 현판 아래에 서서 들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느 날, 하루의 일과를 마친 자신을 불러다 앉혀 놓고 느닷없이 사부가 십만대산
얘기를 꺼냈을 때, 얼마나 기겁을 했던가?
─`내일 십만대산으로 가거라. 지난 일 년 동안 내가 네게 가르칠 건 다 가르쳤다. 그러니
이젠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배우거라. 네게 준 진천독경(震天毒經)의
오의(悟意)는 거의 설명해 줬으니 남은 것은 네가 천독술해(天毒述解)를 기초로 십만대산에서 무수한 독초, 독물들을
다루며 스스로 이해해 가는 과정뿐이다. 앉아서 투덜거리지 말고 떠날 차비를 차려라. 내일 당장 떠나되,
한 가지 명심할 게 있다. 성취가 오(五) 성(成)을 넘기 전에는 절대 돌아와선 안 된다.
사부님이 내건 조건을 지키느라 사 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이젠 돌아왔다.
몽뇌산은 어깨를 활짝 펴고 망설임없이 마당으로 들어갔
마당 한가운데에 느긋한 자세로 서서 주위를 돌아보던 몽뇌산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짓궂게 씩 웃었다.
얼굴 근육 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이리저리 방정맞게 돌려댄 몽뇌산은 숨을 한번 커다랗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 부`─ 님`─`!”
* * *
감진택(坎珍澤)은 방안에 앉아 서탁에 놓인 반 토막난 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십 년 만에 이 물건을 다시 볼 줄이야!
감진택은 이십 년 전 친구와 나눴던 약속의 신표(信標)를 착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약속을 하고 즉석에서 끊어 나누어 가진 반 토막의 도!
지난 세월 동안 처음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그때의 약속을 마음에 묻어 두고 다시 꺼내 본 적조차 없었는데……
이제 약속의 무게를 털어 낼 순간이 왔구나.
그런데 어찌 이리 마음이 무거운가?
감진택은 오늘 새벽녘에 찾아와 많은 얘기를 하고는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며 아침이 오기도 전에
떠나갔던 손님을 떠올렸다.
이름이 전유담(田柳淡)이라 했던가!
얼마나 고생을 하며 찾아왔던지 그의 녹의는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몽뇌산을 제외하고는 십수년 만에 천독문을 방문한 그 외지인(外地人)이 인사 후에 선뜻 내미는 물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월의 무게를 이겨 내고 녹조차 슬지 않은 그 반 토막짜리 물건!
자신이 지니고 있던 나머지 반 토막을 꺼내어 둘을 하나로 맞추자 그날의 약속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래, 세월이 벌써 이십 년이나 흘렀구나!
군명(君銘), 그 친구를 못 본 지도 결국 이십 년이나 되었단 소리구나……
감진택의 생각은 과거로 흘러갔다.
흰머리보다 검은 머리가 많던 그 시절, 현실보다는 이상을 생각했던 그 시절로……!
그래, 우린 천초산의 산정(山頂)에서 같이 일출을 맞았었
─`진택! 천독문(天毒門)에 남겠다는 마음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나?
─`물론!
─`독문은 제아무리 번창한다 해도 강호에서 명문 대접 받기가 힘들 텐데? 게다가 자네의 사문은……
─`군명, 나도 알고 있다네. 그래도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
─`자네 고집은 참……!
─`내 뜻을 평소 잘 알고 있던 자네가 이제 와 새삼 내게 다시 그 얘기를 묻는 데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것 같은데……?
─`역시 자네 눈은 못 속이겠군. 자네 말이 맞네. 사실 자네가 마음을 바꿔 이제라도 길을 달리한다고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네.
─`……?
─`실은 자네에게 부탁이 있어. 물건을 하나 맡아 주게. 내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번 일엔 나 자신보다도 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그런 사람은 자네밖에 없지. 어때, 들어줄 수 있겠나?
─`물론 중요한 물건이겠지? 자네가 보관할 수 없는 이유도 있을 테고?
─`그래.
─`그 이유를 지금은 말할 수 없겠지?
─`……
─`좋아! 내가 보관하고 있지. 지금 주고 갈 텐가?
─`미안한 말이네만, 자네를 갑자기 찾아온 이유도 사실은 이것 때문이라네. 자! 여기…… 잘 부탁하네.
─`언제까지 맡아 주면 되겠나?
─`옥합 안에 무엇이 들었나 묻지도 않는 겐가?
─`묻길 바라나?
─`이런!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군. 고맙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네. 그 옥합을 내가 사람을
보낼 때까지만 맡아 주게. 십 년이 걸릴지 이십 년이 걸릴지
나조차도 모르는 일이야. 그래도 괜찮겠나?
─`훗날 잊지 말고 찾아가기나 하게.
─`나도 꼭 그러길 바래. 그리고 이런 말 하지 않으려 했지만…… 고맙네, 정말!
“사부님`─`!”
느닷없이 들려 온, 귀청을 멍멍하게 하는 소리에 감진택은 회상(回想)에서 깨어났다.
그는 반 토막난 도를 포단 아래에 밀어 넣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녀석이 십만대산에서 화통을 삶아 먹었나?”
감진택은 느릿하게 밖으로 나섰다.
사 년여 만에 들어 보는 제자의 목소리였지만 감진택의 얼굴은 강퍅해 보이기만 했다.
비록 그 제자가 천독문의 십이 대 문주 자리에 앉은 지 십칠 년 만에 문하에 들인 유일한 제자라 할지라도
그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섬돌을 딛고 서서 감진택은 차가워 보이는 눈동자로 뜰에 서 있는 몽뇌산을 내려다보았다.
열여섯의 철없던 소년은 이제 어엿한 사내대장부가 되어 있었다.
감진택은 몽뇌산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너무 매끈하지도, 너무 우락부락하지도 않은 얼굴은 어쩐지 편안해 보이는 표정과 더불어 호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문득 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얼결에 제자 하나를 받아 놓고 얼마나 난감했던가?
첫 대면이 워낙에 엉뚱했던 터라, 독공을 비롯한 제반 무공의 기초를 가르친답시고 앞에 불러다 앉혀 놓고도 어찌 다루어야 할지 내심 막막했던 기억이 났다.
같이 지낸 일 년 동안 내색은 안 했지만 많은 정을 느낀 제자였다.
가끔은 은근한 기대를 품어 보기도 하고, 더러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황당함을 느끼게 하던 제자 아이.
그애가 돌아온 것이다.
사 년여 만에 만나는 제자를 보면서도 따뜻한 말 한마디 던지지 않는 사부의 모습에 몽뇌산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여전하시군, 정말!’
사 년!
길다면 길 수 있는 그 시간들.
그 동안 제일 많이 떠올랐던 얼굴이 저 주름지고 메말라 보이는 사부님의 얼굴이었다.
괴팍하다 싶을 만큼 엄격하고 싸늘했던 사부님이었지만 그 이면에 자신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철이 없진 않았던 그였다.
그래서인지 늘 그리웠다.
몽뇌산은 활짝 웃었다.
“하하! 저 돌아왔습니다, 사부님! 얼굴 좀 펴세요. 속으로 엄청 기뻐하고 계시다는 거 다
아니까요. 혹시 생각보다 일찍 와서 걱정이세요? 문주 자리 빨리 달랄까 봐서요?”
몽뇌산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자리 얘길 들먹였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그런 걸 묻게 되면 눈물이라도 날까 봐서였다.
“달란다고 누가 주기나 한대냐? 제자가 너 하나긴 하다만 자리를 물려 주는 건 좀더
생각해 봐야겠구나. 일단 들어가자.”
잠시 후 방안에 좌정(座正)한 감진택에게 몽뇌산은 인사를 올렸다.
“이젠 알아서 인사도 하고, 멀리 떠나 보낸 보람이 있긴 있구나!”
감진택의 말은 계속해서 비딱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게 어디 멀리 갔다 온 덕분인가요? 다 제 예의가 워낙 깍듯해서지. 그러나저러나 사부님! 제가 떠날 때 운남성이 그렇게 멀다는 말씀을 왜 안 해주셨어요?”
“그걸 몰랐단 말이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나……! 나는 당연히 네가 아는 줄로만
알았지. 그리고 예의 문제라면, 너처럼 예의와 담 쌓은 녀석도 있더냐? 그보다,
좀 전의 네 고함 덕에 집의 수명(壽命)이 족히
십 년은 단축된 듯하니 어찌할 테냐?”
따지는 듯한 감진택의 말투에 몽뇌산은 씨익 웃더니 다시 한 번 고함을 치려는 듯 자세를 잡았다.
감진택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던졌다.
“그 입에서 모기 날아가는 소리만한 것이라도 튀어나올 시엔 백 년 안에
문주 자리를 이어받을 생각은 버려야 할 게다.”
몽뇌산이 화들짝 놀라 얼른 입을 다무는 모습이 보였다.
감진택의 눈가에 슬며시 웃음이 떠올랐다.
아무튼 기쁜 날이었다.
* * *
강소성(江蘇省)을 지나는 장강(長江) 하구에서 상류 쪽으로 칠백오십 리 길을 쭈욱 따라 올라가다 보면 태조(太祖) 주원장이 명을 개국하면서 도읍으로 삼았던 남경부(南京府)가 나온다.
남경은 명 이전에 이미 오와 남조의 수도였는데, 영락제가 도읍을 북경(北京)으로 옮긴 후 좀
퇴락하긴 했으나 교외에는 태조가 안치되어 있는 명효능(明孝陵)이 있는 등,
여전히 과거의 화려했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왕야(王也)께서 돌아오신다. 호궁무사(護宮武士)들은 왕야를 맞이할 차비를 하라!”
우렁찬 목소리가 찌뿌드드하게 흐려 있는 잿빛 하늘을 갈랐다.
높다란 담벼락에 맞닿은 육중한 대문이 열리며, 안에서 일단의 무사들이 날씨와는 무관하게 활기 넘치는
동작으로 쏟아져 나와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무사들과 합류했다.
담벼락을 따라 주욱 늘어선 무사들은 청의무복를 입고 있었고, 대문 앞에
종으로 길게 도열한 무사들은 적의무복을 날렵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구령 소리에 맞춰 청의무사들의 손에서 장창(長槍)이, 적의무사들의 손에서는 검이 높이 솟아올랐다.
칙칙한 회색 하늘 아래서도 병기는 예리해 보였다. 일견하기에도 훈련이 잘된 무사들 같았다.
검을 들고 도열(堵列)한 적의무사들 사이로 육두마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섰다.
‘영친왕부(玲親王府)’란 현판이 걸린 대문 안으로 보이는 널찍한 마당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느릿하게
다가오는 마차를 서둘러서 맞이했다.
호리호리하고 키가 훤칠한, 나이가 지긋한 반백의 갈의노인과 허리에 검을 비껴 찬 은의무장은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왕야! 이제 돌아오십니까?”
두 사람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했다.
“그래, 내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겠지?”
마차에서 내려선 금의화복인이 위엄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그의 일신에서는 존귀한 기품이 은은히 엿보였다.
딱 벌어진 어깨와 꼿꼿한 허리로 봐서는 결코 나이를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한 풍채를 지닌 사람이었다.
이 금의인이야말로 남경(南京)에 자리한 영친왕부, 달리 남경왕부로도 불리는 곳의 주인인 영친왕(玲親王) 본인이었다.
영친왕은 당금 황제인 만력제의 매제이며, 선황인 융경제(隆慶帝)의 사위였다.
선황의 삼녀인 혜란공주(慧蘭公主)를 아내로 맞아들여 부마도위가 된 그가 왕으로 칭해지는
것은, 과거 만력 삼십년(三十年)에 황위를 노리는 역모(逆謀)가
있었을 때, 역적(逆敵)들을 일시에 물리친 공로로 일(一) 대(代)에 한해 왕의 칭호(稱號)를 하사받았기 때문이었다.
영친왕이 막 갈의노인을 거느리고 내원으로 통하는 중문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외원 한쪽에서 정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는 백의유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시 걸음을 멈춰 선 영친왕은 이내 다시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왕부의 총관을 맡고 있는 갈의노인, 허장대(許長大)에게 말을 건넸다.
“허 총관! 방금 나간 사람은 누구인가? 뒷모습이 눈에 익던데……”
“예! 남경부의 관리인 호당연(胡棠演)이라는 사람입니다. 왜, 지난번 원단하례식
때 남경부주와 함께 인사를 왔었지요.”
영친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 총관이 상세히 아뢰었다.
“아, 그래! 기억이 나는군. 얼굴이 하얗고 몸이 호리호리했었지? 얌전하고 온순한 사람 같던데.”
영친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들 순한 사람이라고 그러지요.”
“그래, 왕부에는 무슨 일로 온 겐가?”
영친왕은 별다른 관심 없이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전학사(田學士)님을 찾아왔다 하더군요. 아마 그사이 몇 차례 술자리를 같이했던 모양입니다.”
“전학사를? 그래, 뭐라고 했는가?”
영친왕의 눈동자에 희미한 관심의 빛이 담겼다.
“갑자기 일이 생겨 고향 집에 내려가셨다고 얘기했습니다. 술 생각이 나서 왔는데
허탕을 쳤다며 실망이 대단하더군요.”
“겉보기엔 허약하게 생긴 친구가 술을 꽤나 즐기는가 보군. 술 친구를 잃어 정말 안타까웠겠는걸?”
영친왕의 말투는 다시 흥미를 잃어 가고 있었다.
“예, 말도 없이 내려간 게 어지간히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고향이 어디며, 집에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건지 아는 바가 있냐고 묻더군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대답하는 허 총관의 말을 듣는 순간, 영친왕의 발걸음이 뚝 멈춰졌다.
“방금 전학사의 행방을 캐물었다고 했는가?”
영친왕의 눈동자가 쏘는 듯 날카로운 빛을 뿌렸다. 그의 안색이 먹장구름 깔린 하늘만큼 어둡게 변했다.
“캐물었다기보다…… 혹여 마음에 걸리시는 일이라도……?”
말꼬리를 흐리면서 허 총관은 영친왕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행여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했을까 봐 주름진 노안에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지금 당장 정 대장을 불러오게. 그리고 곡대선생(曲大先生)도. 속히!”
영친왕은 침중(沈重)한 음성으로 허 총관에게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예!”
허 총관은 눈치 빠르게 더는 묻지 않고 얼른 허리를 굽혔
“어서!”
영친왕의 무거운 음성이 돌아서는 허 총관의 등을 떠밀었다.
별원(別園)으로 통하는 문을 향해 냅다 달려가는 허 총관의 희끗희끗한 머리로부터 얼굴을 돌린 영친왕은
흐릿한 하늘에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맞추었다.
하나둘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당탕!
팔각 무늬가 제법 운치있게 들어간 침실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리다가 결국은 소리도 요란하게 부서졌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눈동자를 파고드는 광경에 영친왕의 친위대인 금호대 대장 정위천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안 그래도 축축한 겨울비를 맞으며 호당연이란 자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감이 좋지 않아 은근히
긴장하고 있던 터였다.
정위천은 하는 역할 면에선 황제와 자금성을 호위하며 봉록(俸祿)을 받아먹는 황궁무사들과 동류라 할
수 있지만 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위천은 단순한 호위무사 이전에 한 사람의 무인이었다.
그는 그럴싸한 무복을 입고 연무장에서 연습이나 하고 가끔씩 비무(比武)나 해보는 그런 어설픈 무인이 아니라,
진짜 무사였다.
그의 모든 능력은 무수한 실전(實戰) 끝에 얻어진 것들이었고 그 과정을 통해서 그는 동물적인 생존의 본능을 터득했.
그런 만큼 그의 예감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영친왕이 그를 신임하는 이유도 바로 그의 이러한 점을 깊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십 줄에 들어선 총관이란 자가 그가 데리고 온 수하들의 기세에 눌려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호당연의
침실로 그들을 안내하자 정위천은 내원의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맡은 죽음의 냄새를 피부로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영친왕의 친위대인 금호대 대원들이 문을 부수기도 전에 정위천은 이미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
그의 본능이 가리킨 것은 정확했다.
침실 한복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호당연의 시체가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정위천은 이런 일이 생길 줄 미리 알았다는 듯 스스로 목을 맨 호당연을 착잡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임무를 다하지 못한 데서 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시체를 끌어내려라.”
속마음이야 어떻건 간에 겉으로 드러난 그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수하 두 명이 달려들어 대들보에 묶인 비단끈을 풀어 내고 호당연의 시체를 끌어내렸다.
혀를 빼물고 죽은 호당연의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지 않았지만 정위천은 무덤덤한 얼굴로 시신을 뚫어지게 살폈다.
“관을 준비해라. 그의 시체를 왕부로 가져 간다.”
은의를 날렵하게 차려입은 수하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질문도 없었고 토를 다는 수하도 없었다.
수하들 몇 명이 관을 준비하러 뛰어나가고 난 뒤 방안을 조사하던 수하 하나가 다가왔다.
정위천이 평소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수하 중 하나로, 집법위(執法衛)의 총위사(總衛士)를 맡고 있는 진상화(陳霜花)였다.
진상화!
남자 이름에 ‘화(花)’라는 글자를 쓴다?
아들 녀석의 이름에 꽃 화 자를 넣어 보라!
어디 가서 자기 소개를 할라치면 최소한 한 번쯤은 얼굴을 붉힐 만한 이름 하나가
만들어질 것이고 아들은 살아 가는 동안 평생 부모를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진상화는 이십육 년을 살아 오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진상화는 여자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상화의 이름에 ‘화’자가 들어간다는 사실보다 진상화가 자신의 긴 직함(職銜)을 말할 때 더 놀랐
남경왕부 영친왕 직속 금호대 집법위 총위사 진상화!
첫째는 여자가 왕부의 무사, 그것도 공주나 왕후가 아닌 왕의 직속호위무사라는 데서 오는
놀람이고, 둘째는 그녀가 여자의 몸으로 금호대의 중추세력인 호존위(護尊委),
집법위(執法委), 별정위(別廷委) 중 한 곳의 수반(首班)인 총위사 자리까지 올랐다는 사실에 대한 놀람이었다.
정위천이 그녀를 차기 금호대장 자리에 추천할 생각까지 하고 있는 걸 안다면 아마 남경성 전체가 까무러치리라.
진상화는 여인치곤 키가 훤칠하니 컸고 눈빛이 정위천만큼이나 냉정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단정한
편에 속한 얼굴은 자로 일일이 재서 깎아 놓은 조각을 보는 듯
지극히 딱딱했다.
생전 부드러운 표정이라고는 떠올려 본 적도 없을 듯한 얼
정위천이나 다른 금호대 대원들이 입은 것과 똑같은 은의에 금빛 호랑이 한 마리가 가슴팍에 수놓여진 복장을
한 채로 진상화는 정위천
앞에 절도(節度)있는 자세로 시립하며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입니다. 쓰러져 있는 탁자 아래에서 찾아 냈습니다.”
정위천은 손에 받아 쥔 것을 눈 높이로 들어올렸다.
묘한 글자가 정위천의 눈 속을 파고 들어왔다.
“재미있는 물건이로군.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은데…… 방안에서 찾아 낸 물건들은 왕부로 가져 가야 하니
모두 한곳에 모아 그대가 간수하게, 진 총위사!”
“명을 받들겠습니다, 정 대장님!”
흑지를 다시 건네 받은 진상화가 깍듯이 복명하는 자세를 취한 후 돌아섰다.
“철수(撤收)한다!”
방안을 울리는 정위천의 목소리와 함께 금호대는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 * *
호가장(胡家莊)에서 벌써 십 년째 일해 오고 있는 장원의 문지기 할아범 노대는 낡아서 다 해져 가는 우산을
받쳐 든 채 늙어서 잔뜩 굽은 몸을 느릿느릿 이끌고 장원의
뒤편 구석진 곳에 마련된 측간 쪽으로 걸어갔다.
늙으면 측간도 자주 가고 싶어지는 것일까?
자주 하는 일이라 서두를 것도 없는지 노대의 주름진 노안(老眼)은 측간에 볼일을 보러 가는 것치곤 너무나 한가했다.
남들 같으면 우중(雨中)에 오래 있기 싫어서라도 후딱 달려갔다 올 텐데 노대는
겨울비 속에서도 유람 나온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언제 그칠지 모르게 빗줄기는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고, 거의 발을 땅에 끌다시피
해서 걷는 걸음걸이 때문에 그가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 작은 시내가 만들어졌다.
비쩍 마른 몸에 한걸음 내딛는 것도 힘에 겨운 듯, 노대는 보는 사람이 지겨울 정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바닥에 고인 물이 튀어올라 바지에
그려진 얼룩무늬의 수를 늘려 갔다.
측간 앞에 이르자 배설의 욕구가 싹 가신 듯 문고리를 바로 코앞에 두고 노대는 엉뚱하게도 측간의
뒤편으로 돌아갔
밋밋하게 지어 놓은 측간의 뒤편엔 쓸모없는 가재도구를 쌓아 놓은 작은 공터가 있었고 그 둘레로 군데군데
잎이 무성한 소나무가 높다랗게 서 있었다.
노대는 한때는 산해진미(山海珍味)를 가득 올리고 행세깨나 했을 법한 큼직한 낡은 탁자 아래로 가서
쭈그리고 앉았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속에서 쓸쓸하고 궁상맞은 풍경을 연출하던 그의 모습이 한 순간에 일변했다.
언제 그랬냐 싶게 어깨는 반듯하게 좍 펴져 있었고, 쪼그리고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줄기는 젊은이 못지않게 곧았다.
흐릿하던 눈빛도 무감정이란 껍질을 한 꺼풀 뒤집어쓴 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노대는 문득 우산을 내려놓고 하늘로 손을 길게 뻗쳤다.
잠시 후 푸드득 소리와 함께 빗속을 뚫고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쭈글쭈글한 손등에 젖은 날개를 접었다.
노대는 발목에 작은 통을 매달고 얌전히 앉아 있는 비둘기의 머리를 한 번 가볍게 쓰다듬었다.
통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종이쪽지를 빠르게 훑어본 그는 이내 다시 종이를 넣고 통을 매달았다.
“호당연이 제법 많은 걸 알아 냈군. 이제 영주(領主)께 보고하는 일만 남은 셈인가?”
빗소리에 가려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노대는 비둘기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더니 서천(西天)으로 힘차게 날려보냈다.
훈련을 꽤 호되게 받았는지 우중임에도 비둘기의 날아가는 속도는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윽고 비둘기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노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바로
설수록 그의 어깨는 점점 굽어 갔고 허리도 구부정하게 앞으로 기울어졌다.
바닥에 뒹구는 우산을 힘겨운 손길로 집어 들며 노대는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비 오는 각도에 맞춰 우산을 조정하며 노대는 내원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하늘이 눈물까지 흘려 주고 있으니 북망산천으로 가는 길이 쓸쓸하진 않겠군. 남경부 놈들이
허둥대는 꼴을 못 보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이젠 나도 슬슬 철수를 해볼까……”
그의 마지막 말은 공기 중에 떠돌기도 전에 빗속에 묻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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