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제2장 - 독문귀환(毒門歸還) 1
독로무한
4화. 제2장 - 독문귀환(毒門歸還) 1
몽뇌산은 황자초가 있던 동굴로 들어서다 말고 입을 딱 벌렸다.
없다!
동굴 안을 가득 뒤덮고 있던 그 많은 황자초가 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뽑혀 나가고 없었다.
아니, 몽뇌산이 뽑아 놓은 단 한 포기만이 남아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가 떠나 있었던 시간은 겨우 한 시진 정도.
한 시진 안에 그 많은 황자초를 다 뽑아 갔을 정도라면 독에 관해 상당한 지식이 없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하긴, 독문이나 의문 쪽이 아니라면 황자초의 가치를 알아볼 사람도 없겠지. 도대체 누굴까?
황자초는 극양의 독성을 지녀 쓰임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데……”
몽뇌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한 포기 남은 황자초를 집어 들었다.
“어?”
허리를 펴는 그의 손 안엔 황자초말고도 서찰 하나가 들려 있었다.
빠르게 서찰을 읽어 내리던 그의 얼굴이 묘하게 구겨졌다.
“당문이라…… 과연, 과연! 이름만 있는 줄 알았더니 실력에다 뻔뻔함까지 고루 갖췄는걸.”
몽뇌산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서찰을 보다 말고 시선을 옮겨 황자초를 내려다보았다.
맥이 탁 풀렸다.
“그렇게 공들여 찾아 냈는데 한끼 식사 거리도 안 되는군. 야! 너는 네 동료들이 납치당하는 걸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냐? 아니, 관두자. 너한테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고 나만 이상한 놈 되는 거지.”
몽뇌산은 황자초 잎으로 소리나게 부채질을 했다. 지금의 상황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 길로 뒤쫓아가서 다 내놓으라고 해볼까?”
몽뇌산은 잠시,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결정은 금세 내려졌다.
속이 좀 쓰리긴 했지만 몽뇌산은 미련없이 한 포기의 황자초를 챙겨 동굴을 나왔다.
자칫 생육지가 아예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당문에서 뿌리까지 남김없이 뽑아 갔는지는
의문으로 남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것도 대강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어쨌거나 사부님께 말씀드린다면 상당히 노하실 게 뻔했
“그리고 보나마나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그런 행동은 삼류 독문인이나 하는 거다!’”
사부의 흉내를 내는 듯 눈초리를 매섭게 치뜨며 몽뇌산이 막 곡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느닷없이 곡구를 뒤덮은 덤불을 헤치고 하나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몽뇌산의 눈썹이 위로 삐죽하게 치켜 올라갔다.
“아직도 안 갔습니까?”
환하게 웃음띤 얼굴로, 장봉황이 옷에 검불이 묻지 않게 조심조심 다가왔다.
“은공과 이렇게 그냥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대접이라도 해야겠기에 염치 불구하고
따라왔습니다.”
장봉황의 모습은 예의 그 자체였다.
몽뇌산의 얼굴이 마치 못 먹을 걸 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복잡하게 그러지 맙시다. 피차 갈 길도 바쁜데.”
몽뇌산은 딱 잘라 말하며 도곤을 쓰윽 쳐다보았다.
도곤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바람에 작은 눈이 더 작아 보였다.
그를 향해 애써 선량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도곤의 어깨를 한 번 툭 쳐주고는 지레 놀라 자지러지는
그를 지나치며, 몽뇌산은 황자초 잎 하나를 뜯어먹었다.
뒤를 졸졸 따라붙는 장봉황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그게 뭡니까, 은공? 몸 보신에 쓰이는 영초(靈草)인가요? 아, 오해는
마십시오. 뭐, 제가 하나 달라는 것이 아니라……”
꼬륵! 꼬르르르!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배에서 들려 온 낯설지 않은 소리에 장봉황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몽뇌산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는 장봉황을 보다 말고 불쑥 황자초 잎 하나를 뜯어 주었다.
오래만 씹지 않으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테니 잠시 배고픔이나 달래라는 의미였다.
장봉황은 극구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자초 잎을 받아 들었다. 손 안의 황자초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엔 부끄러움과 신기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아!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는데, 너무 오래 씹지는 말아요. 별로 좋을 것이 없으니까.”
몽뇌산이 맛있게 씹어 먹는 모습을 눈여겨보며 장봉황은 조심스레 잎사귀를 입 안에 넣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조금씩 씹어 보던 장봉황의 입이 어느 순간 바쁘게 오물대기 시작했다.
“잊으면 안 돼요. 너무 오래 씹지 말라는 말! 자, 나는 이만……!”
몽뇌산은 도곤에게 경고의 의미가 담긴 눈빛을 한번 보내고는 곡 밖으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장봉황이 다급히 말리려 했지만 그는 발에 날개라도 달린 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도 산적! 쩝쩝,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은공을 쫓아가서 모셔 오지 않고, 쩝!”
도곤은 미적대며 곡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몽뇌산을 찾으러 간 지 일 다경 만에 터덜터덜 되돌아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은공께선?”
장봉황은 다급하게 물었다. 여전히 황자초 잎을 씹고 있는 채였다.
도곤이 오물대는 그의 입을 슬쩍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
“이런!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고서 도리도 다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냥 보내 드리다니…… 그러고 보니 은공의 존함도 물어 보지 못했구나. 도
산적! 네가 알아서 얼른 은공을 붙잡기만 했어도!”
장봉황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도곤을 노려보며 황자초 잎을 질겅질겅 소리나게 씹어댔다.
그때 도곤이 묘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공자! 아까 그 대협께서 풀을 오래 씹으면 안 된다고 한 것 같은데……”
장봉황은 씹던 동작을 멈춤과 동시에 입을 쩌억 벌리며 길게 하품을 했다. 그 순간, 바로 앞에 도곤이 서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얼른 손을 들어 입부터 가렸다.
“하암…… 아! 이런, 내 정신…… 하고……!”
쿵!
도곤은 바닥에 맥없이 쓰러진 장봉황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본격적으로 독에 대해 익힌 적은 없지만 그 괴이쩍은 자식이 이 허여멀건 애송이에게 준 것은, 오래 씹으면 일종의 수면(睡眠) 효과(效果)가 있는 독초 같았다.
생각할수록 앞날이 암담했다.
어젯밤에 금빛 휘황찬란한 커다란 새가 자신을 물어 가는 꿈을 꾸었는데, 한밑천 크게 휘어잡을
꿈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마 개꿈이었던 모양이다.
도곤은 발로 장봉황의 옆구리를 툭 걷어찼다.
장봉황의 몸은 미동도 없었다.
“이 자식, 이거 완전히 갔군. 멍청한 놈! 이런 놈과 함께 다닐 생각을 하니 앞날이
깜깜하군. 아이고, 내 팔자야! 이 자식을 여기 그냥 버리고 가? 아니야. 그 괴물 같은 놈이 다시 돌아왔다가 이걸 보고 나중에 해약을 안 줄지도 몰라. 깨어나길 기다려? 해가 지고 있으니 먹을 것과 잘 곳도 찾아야 하는데…… 우라질! 이 자식,
이거 부잣집 아들이라 속살이 꽉차 있어 꽤 무거울
텐데…… 오늘 암만해도 등골 빠지겠군.”
도곤은 눈빛을 일그러뜨리며 장봉황의 옆구리를 한 번 더 호되게 걷어찼다.
도곤은 한숨을 푹푹 쉬며 어깨에 장봉황을 들쳐 메고 곡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산중의 햇살이 곡 안에 마지막 빛을 뿌리고 있었다.
장봉황과 헤어진 후 이틀 만에 몽뇌산은 가주부의 정화현(井化縣)을 지나 절강성과 강서성 사이의
경계를 넘고 있었.
강서성에 들어와 처음 발을 디딘 광신부(廣信府)의 한 마을에서 처음 만난 노인에게 남창부로 가는 길을 물은 몽뇌산은 그 길로 옥산현(玉山縣)을 거쳐
광신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남창부를 향해 사백 리 길을 여행하는 동안 어느덧 해가 바뀌어, 몽뇌산은 중원 최고의 명절이랄 수 있는
원단(元旦)을 길바닥에서 보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퍽이나 처량맞은 일이었지만 몽뇌산 자신은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쨌거나 새해의 날은 빠르게 지나가고 몽뇌산의 걸음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원단의 들뜬 기분도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일월(一月) 사일(四日) 정오를 막 넘겼을 무렵, 몽뇌산은 나흘에 걸친 산행 끝에 만나게 된 제법 번화한 마을의 장터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줄곧 그를 괴롭히고 있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너무 멀어. 이럴 리가 없어.”
정신없이 오가던 사람들이 번잡스런 장터바닥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간간이 힐끔거리며 지나쳤다.
하나 지금 그런 눈초리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사 년 전 십만대산을 찾아갈 때 길을 잘못 들어 온갖 고생을 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지금 와서 그걸 다시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묻지 않아도 누가 그냥 알아서 지금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해 주면 얼마나 좋아.”
몽뇌산은 머리를 쳐드는 의심을 누르며 나직하게 투덜거렸.
이쯤에서 지나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옳겠지만 왠지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뭐, 자존심 운운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어쨌거나 사나이 체면에 자꾸 묻는 것도 좀 뭣한 것은 사실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몽뇌산은 혼자 고민하는 일을 깨끗이 포기하고 물어 볼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목표물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나이도 그와 비슷해 보이는 게 좀 덜 쑥스러울 듯싶었다.
“이봐! 길 좀 물어도 될까?”
몽뇌산은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며 곁을 지나가던 네 명의 화복청년들에게 말을 건넸다.
“이봐? 그리고 또 뭐? 될까? 허허, 이 자식 봐라? 감히 우리 풍류사룡(風流四龍)에게 반말지거리를 해? 어디 한군데 부러지고 싶어 아주 환장을 했군.”
“이 고장에서 감히 우리에게 하대(下待)를 하는 자가 있다니, 이런 배은망덕한 놈!”
대뜸 날아온 곱지 않은 대꾸에 눈썹을 치켜 올리던 몽뇌산은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배은망덕 소리에 희한한
표정이 되었다.
보는 책이라고는 달랑 사문의 진천독경(振天毒經)과 천독술해(千毒述解)밖에 없는 몽뇌산이었지만 방금 말을 한 사람은 그보다 더 책을
안 읽었든가, 아니면 아예 좀 모자라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의 그 말을 내뱉은 자는 은색 화복을 몸에 꼭 끼게 입은 뚱뚱한 청년이었는데, 상황에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떠나 제깐에는 그래도 문자를
썼다고 의기 양양해 하는 꼴이 정말 가관이었다.
몽뇌산이 유심히 보니 미간이 넓고 눈초리가 약간 아래로 쳐진 것이, 아닌게아니라 좀 멍청하게 보이기도 했다.
“호영(虎英)! 그럴 때는 배은망덕도 좋지만 흉악무도(凶惡無道)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아.”
뚱뚱한 은의청년 옆에 서 있던 자가 한마디 점잖게 덧붙였다.
옥색 화복을 입은 그자도 뒷짐을 진 채 거만 떠는 모습이 결코 은의청년에 못지 않았다.
졸지에 배은망덕에다 흉악무도한 사람이 된 몽뇌산은 시비(是非)를 거는 것이 분명한 그들의 수작에 피식 실소를 지었
“어라? 이 자식이 상황 파악 못 하고 웃어? 야, 저거 웃는 거 맞지? 그지?”
옥색 화복을 입은 자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우리를 비웃다니…… 이, 이런!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호영,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봐!”
“글쎄…… 모자란 놈인가 보다 하고 이해해 줘야 할까?”
고개까지 갸웃거리는 은의청년을 보며 몽뇌산은 아예 할말을 잃었다.
물론 적반하장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해는 무슨……? 멍청하게!”
호영을 면박 주는 옥색화복청년의 수작을 보며 몽뇌산이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하자 이제껏 한걸음
뒤에서 뒷짐지고 서 있던 적색 화복의 청년이 쓰윽 앞으로 나섰다.
보아하니 이자가 풍류, 뭐라는 자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
“가만, 가만! 조용히 좀 해! 아무래도 본 공자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직접 훈계(訓戒)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몽뇌산의 코앞에 주먹을 들이대며 손마디를 꺾는 적의청년을 향해 열화(烈火)와 같은 응원이 쏟아졌다.
“호룡(虎龍)! 쓴맛을 좀 보여 줘. 저런 놈 훈계하는 데는 역시 말보다 주먹이야.”
“그래, 형!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베풀어서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줘.”
아마도 호룡의 동생인 듯 호영이라는 뚱보청년이 끝까지 문자를 쓰며 한마디 거들었다.
정말 어지간히 문자 쓰는 걸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몽뇌산은 이 풍류, 뭐라는 자들과 마주보고 서 있으려니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길 물을 때마다 이런 놈들이 걸린다면 제 명대로 못 살 것 같았다.
풍류사룡의 나머지 인물들이 호룡의 어깨를 두드리며 뒤로 물러나자 몽뇌산은 우선 그들이 더 이상 문자를 남발하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그사이에 몽뇌산 주위에는 사람들이 멀찍이 몸을 피하는 바람에 널따란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자, 어디부터 손봐 줄까?”
호룡이 어깨에 힘을 주며 몽뇌산을 을러댔다.
그가 말없이 인상만 쓰고 있자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호룡의 얼굴이 점차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너, 이 자식! 죽을 줄 알아. 난 지금 분명히 경고했다. 야! 이만하면 누가 봐도
공정해 보이겠지? 좋아! 받아라`─`!”
호룡의 왼발이 바닥을 미끄러져 앞으로 짓쳐 나옴과 동시에 그의 주먹이 몽뇌산의 복부를 겨냥하고
맹렬하게 허공을 갈랐다.
쐐애액`─`!
들리는 파공음(破空音) 하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이, 어디서 제법 무예의 기초를 닦은 것 같았다.
몽뇌산은 주먹이 가까이 다가오길 가만히 기다렸다가 허리를 살짝 비틀며 손바닥으로 호룡의 팔목을 소리나게 찰싹 때렸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그 일수는 뱀이 꼬리로 적의 몸뚱이를 후려갈기는 것을 본뜬 동작이었다.
다른 사람에겐 아무렇게나 때리는 동작으로 비쳐졌겠지만 맞은 당사자에게 이 성 공력을 실은 사왕권의 미타수격(尾打手擊)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상황은 금방 분명해졌다.
“우악`─`!”
호룡은 비명 소리도 요란하게 앞으로 꼬꾸라졌다.
호영을 필두로 해서 풍류사룡의 나머지 두 명이 호룡을 향해 우르르 달려왔다.
“아니, 이 자식이 사람을 쳐?”
옥색화복청년이 허리춤에 찬 보광이 화려한 검을 잡아 가며 도끼눈을 하고 몽뇌산을 노려보았다.
‘적반하장, 적반하장!’
속으로 중얼거리며 몽뇌산은 빨리 해결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팔목을 부여잡은 채 땅바닥을 뒹구는 호룡을 둘러싸고 있는 풍류사룡에게 짐짓 눈을 부릅뜨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섰다.
그가 내디딘 바닥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땅이 한 치 넘게 푹푹 꺼졌다.
멋들어지게 검을 뽑아 어이없이 당한 호룡의 복수를 해주려던 옥색화복청년이 그 광경에 몸을 움찔했다.
몽뇌산을 패배시킨 후 자신에게 쏟아질 사람들의 존경 가득한 눈길을 머릿속에 그리며
잔뜩 상상의 날개를 펴던 그는, 문득 복수보다는 친구의 안위(安危)를 살피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했다.
“호룡! 괜찮아?”
몽뇌산과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세라 얼른 호룡에게 고개를 돌리는 그의 얼굴은 어쩐 일인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몽뇌산은 그자들의 모습이 우스워져 피식 실소를 짓다가 풍류사룡이 당한 일을 고소해 하는 표정이
역력한 행인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자 이내 발길을 돌려 길을 재촉했다.
풍류사룡은 호룡의 상세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지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 몇 발짝 가지 않아 몽뇌산은 다시 몸을 획 돌렸다.
“길! 길을 물어 봐야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던 옥색 화복의 청년은 몽뇌산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자 사색(死色)이 되었다.
막 호룡을 부축하고 일어서려던 풍류사룡의 나머지 인물들도 몽뇌산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자 기겁을 했다.
“이봐! 여기서 남창부(南昌府)까지 얼마나 남았지?”
옥색화복청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 여기가 바로 남창부가 시작되는 정량현(良縣)인데요……?”
순간, 심각하던 몽뇌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얼마 안 남았군. 좋았어!”
씨익 웃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몽뇌산은 다시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호영이 호룡을 돌보다 말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인데, 손봐 준다고 해놓고 그냥 보내도 될까?”
“으으…… 네 말이 옳다, 호영! 사부님의 사문에 무공이 높은 분이 많다고 했으니 부탁드려서 나중에 꼭 복수하고 말 테다. 헉헉! 거지 같은 놈의 자식! 내 팔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으드득! 두고 보자!”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호룡이 팔목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이를 갈았다. 그의 팔목은
어느새 푸르죽죽하게 잔뜩 부어 올라 있었다.
“나중에 복수하려면 저 자식 이름이라도 알아 둬야 될 거 아니야?”
턱이 뾰족한 현의청년이 호룡을 부축한 채 격앙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자, 호영! 더 멀리 가기 전에 어서 불러!”
“내가?”
호영의 둥글둥글한 얼굴엔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너! 네가 제일 어리잖아? 장유유서(長幼有序)도 몰라?”
호영은 마지못해 앞으로 나서며 그새 저만치 가 있는 청년을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야`─`! 꼬랑지머리! 형, 안 들리나 봐. 불가항력(不可抗力)이…… 헉!”
모기만한 소리로 딱 한 번 부르고 나서 몸을 돌리려던 호영은 몽뇌산이 걸음을 딱 멈추며 몸을 획 돌리자
기겁을 했.
부들부들 떠는 호영을 보며 몽뇌산은 한 발을 들어올린 채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그들을 혼내 주러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망설였다.
처음엔 혼내 주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막상 한 발을 들고 보니 여기까지 걸어온 게 너무 아까웠다.
‘한 걸음이라도 멀어지는 건 싫어!’
반쯤 떼어 놓은 발을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놓으며 몽뇌산은 큰 소리로 외쳤다.
“뭐야?”
옥색화복청년이 옆구리를 찌르자 호영은 울상을 한 채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존성대명(尊姓大名)이 어떻게 되십니까?”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몽뇌산!”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몽뇌산은 한마디 툭 던지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뚱보청년은 아직 물어 볼 말이 남은 듯했다.
“저어…… 나중에 복수해도 될까요?”
“호영`─`!
“이 팔푼이 자식!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몽뇌산은 뚱보청년의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잡아 끄는 풍류사룡의 인물들을 향해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마음대로!”
* * *
몽뇌산은 사문이 있는 천초산(天草山)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풍류사룡이란 자들 덕에 남창부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발걸음이 가뿐했다.
남창부에 들어섰다면 천초산까지 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지난번 십만대산에 갈 때, 남창부를 벗어나는 데만 보름이 걸려 남창부 지리는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몽뇌산은 쭉 뻗은 관도를 부지런히 걸었다.
그때 뒤에서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그 소리에 길을 걷던 몽뇌산은 깜짝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구름 같은 먼지 더미에 인상을 쓰며 몽뇌산은 바깥쪽으로 정확히 세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말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더불어 먼지도!
몽뇌산은 먼지를 피하기 위해 고개를 모로 돌렸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히이이잉`─`!
쿠궁`─`!
육중한 소리와 함께 지면이 들썩거렸다.
몽뇌산은 기겁을 하고 돌아서며 반사적으로 뒤로 쭈욱 미끄러져 물러났다.
그런 그의 얼굴로 흙먼지가 화악 밀려들었다.
몽뇌산은 손을 쭈욱 펴서 앞으로 밀어 냈다. 무형의 경기에 휘말린 먼지들이 빗자루에 쓸려 가듯 물러났다.
“엣취`─`!”
먼지 저편에서 들려 온 기침 소리에 몽뇌산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관도 위엔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말 한 마리와 그 옆에서 난감한 얼굴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본래 녹색이었던 그의 옷은 방금 얼결에 뒤집어쓴 흙먼지에 모호한 색을 띠고 있었다.
“괜찮으시……?”
“말 좀 묻겠네. 봉암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혹시 아는가?”
몽뇌산의 말허리를 자른 녹의중년인의 음성은 초조함에 휩싸여 있었다.
몽뇌산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눈매로 보아 그는 그렇게 무정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도 지쳐 쓰러진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듯싶었다.
“도보로 반나절이면 족합니다.”
“그럼 이 길로 곧장 가면 천초산에 닿을 수 있나?”
“천초산이요?”
몽뇌산은 묘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녹의중년인의 얼굴에 순간 흠칫하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초조함이 감돌던 눈동자에서 표정이 사라지며 반쯤 드러난 주먹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몽뇌산은 녹의중년인의 심중에 살의가 싹트고 있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왜, 뭐가 이상한가?”
되묻는 녹의중년인의 음성엔 희미한 긴장이 배어 있었다.
“아니요, 실은 제가 거기 살거든요. 거긴 사냥꾼들을 제외하고는 찾는 사람이 드문 곳인데……”
“젊은이, 자네도 사냥꾼인가?”
몽뇌산은 자신의 전신을 찬찬히 훑어보는 중년인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약초를 수집하는 게 일이긴 하지만 사냥도 안 하는 건 아니니까요.”
몽뇌산의 담담한 얼굴을 중년인의 시선이 비수처럼 쓸고 지나갔다.
그의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지는 걸 보며 몽뇌산은 그의 살의가 가라앉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곳까지 가는 길을 좀 가르쳐 주겠나?”
“알려 드릴 순 있지만 제가 길을 설명하는 게 서툴러서……”
“괜찮네.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네.”
몽뇌산은 중년인의 말없는 재촉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초산 가는 길은, 그러니까 우선 이 길로 쭉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왼쪽으로 가십시오.
오른쪽으로 가도 봉암현이 나오지만 그쪽은 길양현(吉陽縣)이 있는 쪽과 가까운지라 천초산하고는 많이 멀어지게 되죠. 아무튼
왼쪽 길로 두 시진 가량 가다 보면 고준산(高峻山)이 나오는데 그걸 넘고 나면 봉암현과 맞닿은 창령현(蒼嶺縣)의 경계가 시작됩니다. 그 창령현의 외곽을 끼고 북상하면 봉암현에 이르게 됩니다. 봉암현에서……”
“봉암현에 들어가고 나면 천초산을 찾는 건 쉽겠지. 친절히 가르쳐 주어서 고맙네. 그럼, 시간이 촉박하여 이만!”
녹의중년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상당한 수준의 경공이었다.
몽뇌산도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말을 한쪽으로 옮겨 놓고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한 열댓 걸음이나 옮겼을까? 어느 순간 그의 몸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아! 한 가지 빼먹고 말 안 해줬다. 고준산은 온통 절벽이라 곧장 질러서 넘기는 힘들고 뱃길을 따라 둘러서
가야 하는데…… 설마 고준산을 그냥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생전 남에게 길을 가르쳐 줘봤어야 그것도
안 빼먹고 잘하지. 그러나저러나 좀 미안한데?”
고개를 흔들다 말고 몽뇌산은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의 신형이 점점 멀어져 갔다.
천초산을 향해서……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몽뇌산은 기암절벽(奇岩絶壁)들이 삐죽삐죽 솟은 고준산의 웅자를 눈앞에 대하고 서 있었다.
그의 발길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꺾였다.
몽뇌산이 고준산 밑에 자리한 정량현의 외곽을 싸고 도는 한수(汗水)에 다다른 것은 그로부터 한 식경 후였다.
느긋하게 나루터를 향해 가던 그의 눈이 갑자기 생기를 띠었다.
갑작스레 앞을 가로막은 세 명의 황의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을 향해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초리를 치켜 올리는 몽뇌산에게 선두에 서
있던 황의중년인이 말을 건넸다. 등에 진 커다란 짐으로 보아 먼 길을 다녀오는 장사꾼쯤
되는 것 같았다.
다만 사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그의 각진 얼굴과 딱 벌어진 어깨가 장사꾼답지 않게 강인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소형제, 물을 것이 있네. 이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올라가면 창령현에 닿게 되는 게 맞는가?”
몽뇌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창령현에서 외곽을 따라 북상하면 봉암현이 나오는 것도 맞는가?”
다시 한 번 끄덕끄덕!
“맞다는군요, 숙부님! 봉암현 경내에 들어서기만 하면 천초산을 찾는 것은 쉬울
것 같습니다. 자, 가시죠. 가자꾸나! 소형제, 알려 주어 고맙네.”
오른쪽에 서 있던 작달막한 칠십대 황의노인과 왼쪽에 한걸음 뒤처져 서 있던 이십대 중반의 여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나서 황의중년인은 몽뇌산에게 사의(謝意)를 표했다.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으며 몽뇌산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
‘세간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천초산을 찾는 사람이 갑자기 늘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몽뇌산은 깊은 눈길로 황의중년인의 일행을 살폈다.
키에 비해 팔이 꽤 길어 보이는 황의노인은 눈빛이 매의 그것처럼 날카로웠고, 늘씬하니 키가 큰 여인은 상당히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차가웠다.
무심한 나머지 허무해 보이는 눈동자가 그랬고,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얗고 오똑한 콧날 또한 그랬다. 그리고 한 일 자로 꼭 다문 입술도 그녀의 냉정한 성정(性情)을 말해 주고 있었다.
여인의 등에도 중년인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봇짐이 지워져 있었다.
몽뇌산의 시선을 느꼈을 법도 한데 여인은 미동(微動)도 없었다. 심지어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나루터에 대어져 있는 제법 커다란 배에 올라타는 그들의 뒤를 따라 몽뇌산도 천천히 배에 올랐다.
한 시진에 한 번씩만 배를 띄우는지라 배 위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몽뇌산도 적당한 곳에 앉아 뱃전에 등을 기댔다.
그 자린 공교롭게도 황의여인의 맞은편이었다.
그녀는 몸을 비스듬히 돌려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다란 속눈썹에 가려져 눈빛조차도
읽어 낼 수가 없었
정말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기질을 지닌 여인이었다.
젊은 여인을 빤히 바라본다는 게 어쩐지 객쩍게 여겨진 몽뇌산은 고개를 뱃머리 쪽으로 돌렸다.
그때, 뱃머리 쪽에 앉아 있던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금의화복을 번듯하게 차려입은 그는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생긴 것은 제법 준수했으나
미간이 좁고 눈가에 방탕한 기운이 배어 있는 게 어쩐지 호감이 가지 않는 자였다.
몽뇌산은 사내가 거만하게 뒷짐을 진 채 강렬한 눈빛으로 황의여인을 주시하며 다가가는 모습을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바닥에 놓인 짐들을 피하느라 몽뇌산 쪽으로 돌아서 지나가던 사내의 몸이 무언가에 걸린 듯 갑자기 휘청했다.
짐꾸러미들이 층층이 쌓인 바닥에 사정없이 나동그라지기 직전, 금의청년은 몸을 순식간에 뒤집으며 돛대 아래로 늘어진 밧줄을 손 안으로 끌어들였다.
상당한 경지에 이른 접인공(接引功)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처박히는 꼴을 면한 청년이 눈가를 희미하게 붉힌 채 고개를 발딱 치켜 들었다.
청년의 음침한 눈동자가 몽뇌산의 얼굴에 화살처럼 꽂혔
‘눈치챘나?’
속으로 뇌까리며 몽뇌산은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
예상대로 금의청년의 눈가엔 살기(殺氣)가 가득 차 오르고 있었다.
“네놈이 감히 본 공자의 발을 걸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너 같은 잡배들을 그냥
지나친다면 이 상관옥영(上官玉英)의 체면이 무엇이 되겠느냐?”
몽뇌산은 체면 운운하며 거창하게 나오는 금의청년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오늘 본 공자의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 팔 하나로 끝내겠다.”
‘다’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상관옥영이란 금의청년의 신형은 이미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먹이를 물려는 매의 발톱처럼 오므려진 그의 손가락이 몽뇌산의 팔을
낚아채 왔
쑤아악`─`!
대기를 찢어 내는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경기(勁氣)가 밀어닥쳤다.
여기저기서 경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달리 피할 곳도 없는 배 위에 몸을 맡기고 있던 사람들은 난데없이 시작된 싸움에 저마다 최대한 몸을
움츠리며 피하기에 바빴다.
진작에 공력을 모으고 있던 몽뇌산은 상관옥영의 손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손가락 끝에서 서리같이 하얀 기운이 실낱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공력도 공력이려니와 조공(爪功)의 조예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그러나 몽뇌산은 그의 조공 실력보다도 자신의 팔을 통째로 뜯어 내려는 악독한 심보에 더 세차게 혀를 내둘렀다.
“겁나네, 정말!”
태연히 내뱉었지만 몽뇌산은 내심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찌익!
소매를 찢어 내며 그의 오른팔을 움켜쥔 상관옥영의 손이 강철처럼 근육을 조여 왔다.
하얗게 웃는 얼굴로 점점 공력을 돋우는 상관옥영을 보자 몽뇌산은 더 이상 여유를 부릴 틈이 없음을 느꼈다.
‘뭐, 이런 자식이……!’
팔이 금방이라도 뽑혀 나갈 것만 같은 순간, 몽뇌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진기를 팔로 도인(導引)했다.
사사사삭!
몽뇌산의 팔이 단단하게 조여진 상관옥영의 손 안에서 교묘하게 비틀어졌다.
뱀이 나뭇등걸을 타고 오르는 형상이었다.
삽시간에 상관옥영의 팔뚝을 거슬러 올라간 몽뇌산의 손이 마침내 상관옥영의 상완(上腕)을 덥석 움켜쥐었다.
동시에 그의 발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상관옥영과 자리바꿈을 했다.
놀라는 상관옥영을 향해 악동처럼 웃어 보이며 몽뇌산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물 좀 먹게 될 거다!”
전음을 듣고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상관옥영의 팔뚝에 푸른 지인(指印)을 새겨 줌과 동시에 몽뇌산은 팔을 슬쩍 위로 들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상관옥영의 몸이 붕 떠올랐다.
처음의 음유(陰柔)하고 매섭던 기세와 달리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몸이 배를 벗어나기 직전이었다.
찌이익!
허공을 저어대던 상관옥영의 손이 뭔가를 붙잡은 것도 잠시. 그의 몸은 요란하게 물 튀는 소리를 내며 강물로 떨어졌
상관옥영이 몽뇌산에게 달려들고 다시 물에 빠지기까지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 덕에 누구 한 사람도 상관옥영이 제대로 대항조차 못 한 이유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물방울만 남긴 채 강물 속으로 사라진 상관옥영은 좀처럼 다시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잠시 웅성거렸지만 방금 일어난 일이 무림인들의 일이라는 것을 알자 누구도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배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책임이 있는 늙은 사공만이 마지못해서인 듯한 얼굴을 하고는 물속을 몇 번 헤집었지만, 걸리는 것이라고는 수초들밖에 없었다.
사공은 머뭇거렸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얼마 안 있어 배는 다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광아! 물에 빠지지 않게 짐을 잘 챙겨라!”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상관옥영이 물에 빠지기
직전, 몽뇌산을 한번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황의노인이 눈꺼풀을 반쯤 들어올린 채 중얼거렸다.
“예, 숙부님! 조심하겠습니다.”
상관옥영에 의해 한쪽이 찢겨 나간 봇짐을 안으며 황의중년인이 굳은 얼굴로 구멍난 곳을 가렸다.
그를 마음대로 다루는 몽뇌산의 무공내력을 살피느라 미처 짐을 간수하지 못한 것이 화근(禍根)이었다.
딱딱한 얼굴로 짐을 꽁꽁 여며 옆구리에 끼는 황의중년인의 모습을, 몽뇌산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괴이쩍은 얼굴로 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황의! 그렇군!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오직 당문만이 저런 차림을 하는 것을! 황자초를
보고서야 그 생각을 해내다니, 나도 참!’
몽뇌산은 황의인들의 옷차림을 눈여겨보며 혀를 찼다.
입 안이 썼다.
절강성에서 그가 발견한 황자초를 가져 갔던 당문 사람들을 여기서 또 보게 되다니…… 기이한 인연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천초산으로 간다는 것 또한 우연치곤 묘했.
몇 번이나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모습을, 이제껏 강물에만 시선을 주고 있던 황의여인이
짤막한 이채(異彩)를 담고 잠시 주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출발할 때보다 한 사람이 줄어든 채, 배는 쉼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저 강물만이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4화. 제2장 - 독문귀환(毒門歸還) 1
몽뇌산은 황자초가 있던 동굴로 들어서다 말고 입을 딱 벌렸다.
없다!
동굴 안을 가득 뒤덮고 있던 그 많은 황자초가 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뽑혀 나가고 없었다.
아니, 몽뇌산이 뽑아 놓은 단 한 포기만이 남아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가 떠나 있었던 시간은 겨우 한 시진 정도.
한 시진 안에 그 많은 황자초를 다 뽑아 갔을 정도라면 독에 관해 상당한 지식이 없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하긴, 독문이나 의문 쪽이 아니라면 황자초의 가치를 알아볼 사람도 없겠지. 도대체 누굴까?
황자초는 극양의 독성을 지녀 쓰임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데……”
몽뇌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한 포기 남은 황자초를 집어 들었다.
“어?”
허리를 펴는 그의 손 안엔 황자초말고도 서찰 하나가 들려 있었다.
빠르게 서찰을 읽어 내리던 그의 얼굴이 묘하게 구겨졌다.
“당문이라…… 과연, 과연! 이름만 있는 줄 알았더니 실력에다 뻔뻔함까지 고루 갖췄는걸.”
몽뇌산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서찰을 보다 말고 시선을 옮겨 황자초를 내려다보았다.
맥이 탁 풀렸다.
“그렇게 공들여 찾아 냈는데 한끼 식사 거리도 안 되는군. 야! 너는 네 동료들이 납치당하는 걸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냐? 아니, 관두자. 너한테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고 나만 이상한 놈 되는 거지.”
몽뇌산은 황자초 잎으로 소리나게 부채질을 했다. 지금의 상황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 길로 뒤쫓아가서 다 내놓으라고 해볼까?”
몽뇌산은 잠시,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결정은 금세 내려졌다.
속이 좀 쓰리긴 했지만 몽뇌산은 미련없이 한 포기의 황자초를 챙겨 동굴을 나왔다.
자칫 생육지가 아예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당문에서 뿌리까지 남김없이 뽑아 갔는지는
의문으로 남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것도 대강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어쨌거나 사부님께 말씀드린다면 상당히 노하실 게 뻔했
“그리고 보나마나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그런 행동은 삼류 독문인이나 하는 거다!’”
사부의 흉내를 내는 듯 눈초리를 매섭게 치뜨며 몽뇌산이 막 곡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느닷없이 곡구를 뒤덮은 덤불을 헤치고 하나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몽뇌산의 눈썹이 위로 삐죽하게 치켜 올라갔다.
“아직도 안 갔습니까?”
환하게 웃음띤 얼굴로, 장봉황이 옷에 검불이 묻지 않게 조심조심 다가왔다.
“은공과 이렇게 그냥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대접이라도 해야겠기에 염치 불구하고
따라왔습니다.”
장봉황의 모습은 예의 그 자체였다.
몽뇌산의 얼굴이 마치 못 먹을 걸 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복잡하게 그러지 맙시다. 피차 갈 길도 바쁜데.”
몽뇌산은 딱 잘라 말하며 도곤을 쓰윽 쳐다보았다.
도곤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바람에 작은 눈이 더 작아 보였다.
그를 향해 애써 선량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도곤의 어깨를 한 번 툭 쳐주고는 지레 놀라 자지러지는
그를 지나치며, 몽뇌산은 황자초 잎 하나를 뜯어먹었다.
뒤를 졸졸 따라붙는 장봉황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그게 뭡니까, 은공? 몸 보신에 쓰이는 영초(靈草)인가요? 아, 오해는
마십시오. 뭐, 제가 하나 달라는 것이 아니라……”
꼬륵! 꼬르르르!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배에서 들려 온 낯설지 않은 소리에 장봉황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몽뇌산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는 장봉황을 보다 말고 불쑥 황자초 잎 하나를 뜯어 주었다.
오래만 씹지 않으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테니 잠시 배고픔이나 달래라는 의미였다.
장봉황은 극구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자초 잎을 받아 들었다. 손 안의 황자초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엔 부끄러움과 신기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아!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는데, 너무 오래 씹지는 말아요. 별로 좋을 것이 없으니까.”
몽뇌산이 맛있게 씹어 먹는 모습을 눈여겨보며 장봉황은 조심스레 잎사귀를 입 안에 넣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조금씩 씹어 보던 장봉황의 입이 어느 순간 바쁘게 오물대기 시작했다.
“잊으면 안 돼요. 너무 오래 씹지 말라는 말! 자, 나는 이만……!”
몽뇌산은 도곤에게 경고의 의미가 담긴 눈빛을 한번 보내고는 곡 밖으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장봉황이 다급히 말리려 했지만 그는 발에 날개라도 달린 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도 산적! 쩝쩝,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은공을 쫓아가서 모셔 오지 않고, 쩝!”
도곤은 미적대며 곡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몽뇌산을 찾으러 간 지 일 다경 만에 터덜터덜 되돌아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은공께선?”
장봉황은 다급하게 물었다. 여전히 황자초 잎을 씹고 있는 채였다.
도곤이 오물대는 그의 입을 슬쩍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
“이런!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고서 도리도 다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냥 보내 드리다니…… 그러고 보니 은공의 존함도 물어 보지 못했구나. 도
산적! 네가 알아서 얼른 은공을 붙잡기만 했어도!”
장봉황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도곤을 노려보며 황자초 잎을 질겅질겅 소리나게 씹어댔다.
그때 도곤이 묘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공자! 아까 그 대협께서 풀을 오래 씹으면 안 된다고 한 것 같은데……”
장봉황은 씹던 동작을 멈춤과 동시에 입을 쩌억 벌리며 길게 하품을 했다. 그 순간, 바로 앞에 도곤이 서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얼른 손을 들어 입부터 가렸다.
“하암…… 아! 이런, 내 정신…… 하고……!”
쿵!
도곤은 바닥에 맥없이 쓰러진 장봉황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본격적으로 독에 대해 익힌 적은 없지만 그 괴이쩍은 자식이 이 허여멀건 애송이에게 준 것은, 오래 씹으면 일종의 수면(睡眠) 효과(效果)가 있는 독초 같았다.
생각할수록 앞날이 암담했다.
어젯밤에 금빛 휘황찬란한 커다란 새가 자신을 물어 가는 꿈을 꾸었는데, 한밑천 크게 휘어잡을
꿈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마 개꿈이었던 모양이다.
도곤은 발로 장봉황의 옆구리를 툭 걷어찼다.
장봉황의 몸은 미동도 없었다.
“이 자식, 이거 완전히 갔군. 멍청한 놈! 이런 놈과 함께 다닐 생각을 하니 앞날이
깜깜하군. 아이고, 내 팔자야! 이 자식을 여기 그냥 버리고 가? 아니야. 그 괴물 같은 놈이 다시 돌아왔다가 이걸 보고 나중에 해약을 안 줄지도 몰라. 깨어나길 기다려? 해가 지고 있으니 먹을 것과 잘 곳도 찾아야 하는데…… 우라질! 이 자식,
이거 부잣집 아들이라 속살이 꽉차 있어 꽤 무거울
텐데…… 오늘 암만해도 등골 빠지겠군.”
도곤은 눈빛을 일그러뜨리며 장봉황의 옆구리를 한 번 더 호되게 걷어찼다.
도곤은 한숨을 푹푹 쉬며 어깨에 장봉황을 들쳐 메고 곡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산중의 햇살이 곡 안에 마지막 빛을 뿌리고 있었다.
장봉황과 헤어진 후 이틀 만에 몽뇌산은 가주부의 정화현(井化縣)을 지나 절강성과 강서성 사이의
경계를 넘고 있었.
강서성에 들어와 처음 발을 디딘 광신부(廣信府)의 한 마을에서 처음 만난 노인에게 남창부로 가는 길을 물은 몽뇌산은 그 길로 옥산현(玉山縣)을 거쳐
광신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남창부를 향해 사백 리 길을 여행하는 동안 어느덧 해가 바뀌어, 몽뇌산은 중원 최고의 명절이랄 수 있는
원단(元旦)을 길바닥에서 보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퍽이나 처량맞은 일이었지만 몽뇌산 자신은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쨌거나 새해의 날은 빠르게 지나가고 몽뇌산의 걸음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원단의 들뜬 기분도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일월(一月) 사일(四日) 정오를 막 넘겼을 무렵, 몽뇌산은 나흘에 걸친 산행 끝에 만나게 된 제법 번화한 마을의 장터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줄곧 그를 괴롭히고 있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너무 멀어. 이럴 리가 없어.”
정신없이 오가던 사람들이 번잡스런 장터바닥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간간이 힐끔거리며 지나쳤다.
하나 지금 그런 눈초리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사 년 전 십만대산을 찾아갈 때 길을 잘못 들어 온갖 고생을 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지금 와서 그걸 다시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묻지 않아도 누가 그냥 알아서 지금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해 주면 얼마나 좋아.”
몽뇌산은 머리를 쳐드는 의심을 누르며 나직하게 투덜거렸.
이쯤에서 지나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옳겠지만 왠지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뭐, 자존심 운운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어쨌거나 사나이 체면에 자꾸 묻는 것도 좀 뭣한 것은 사실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몽뇌산은 혼자 고민하는 일을 깨끗이 포기하고 물어 볼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목표물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나이도 그와 비슷해 보이는 게 좀 덜 쑥스러울 듯싶었다.
“이봐! 길 좀 물어도 될까?”
몽뇌산은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며 곁을 지나가던 네 명의 화복청년들에게 말을 건넸다.
“이봐? 그리고 또 뭐? 될까? 허허, 이 자식 봐라? 감히 우리 풍류사룡(風流四龍)에게 반말지거리를 해? 어디 한군데 부러지고 싶어 아주 환장을 했군.”
“이 고장에서 감히 우리에게 하대(下待)를 하는 자가 있다니, 이런 배은망덕한 놈!”
대뜸 날아온 곱지 않은 대꾸에 눈썹을 치켜 올리던 몽뇌산은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배은망덕 소리에 희한한
표정이 되었다.
보는 책이라고는 달랑 사문의 진천독경(振天毒經)과 천독술해(千毒述解)밖에 없는 몽뇌산이었지만 방금 말을 한 사람은 그보다 더 책을
안 읽었든가, 아니면 아예 좀 모자라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의 그 말을 내뱉은 자는 은색 화복을 몸에 꼭 끼게 입은 뚱뚱한 청년이었는데, 상황에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떠나 제깐에는 그래도 문자를
썼다고 의기 양양해 하는 꼴이 정말 가관이었다.
몽뇌산이 유심히 보니 미간이 넓고 눈초리가 약간 아래로 쳐진 것이, 아닌게아니라 좀 멍청하게 보이기도 했다.
“호영(虎英)! 그럴 때는 배은망덕도 좋지만 흉악무도(凶惡無道)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아.”
뚱뚱한 은의청년 옆에 서 있던 자가 한마디 점잖게 덧붙였다.
옥색 화복을 입은 그자도 뒷짐을 진 채 거만 떠는 모습이 결코 은의청년에 못지 않았다.
졸지에 배은망덕에다 흉악무도한 사람이 된 몽뇌산은 시비(是非)를 거는 것이 분명한 그들의 수작에 피식 실소를 지었
“어라? 이 자식이 상황 파악 못 하고 웃어? 야, 저거 웃는 거 맞지? 그지?”
옥색 화복을 입은 자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우리를 비웃다니…… 이, 이런!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호영,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봐!”
“글쎄…… 모자란 놈인가 보다 하고 이해해 줘야 할까?”
고개까지 갸웃거리는 은의청년을 보며 몽뇌산은 아예 할말을 잃었다.
물론 적반하장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해는 무슨……? 멍청하게!”
호영을 면박 주는 옥색화복청년의 수작을 보며 몽뇌산이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하자 이제껏 한걸음
뒤에서 뒷짐지고 서 있던 적색 화복의 청년이 쓰윽 앞으로 나섰다.
보아하니 이자가 풍류, 뭐라는 자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
“가만, 가만! 조용히 좀 해! 아무래도 본 공자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직접 훈계(訓戒)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몽뇌산의 코앞에 주먹을 들이대며 손마디를 꺾는 적의청년을 향해 열화(烈火)와 같은 응원이 쏟아졌다.
“호룡(虎龍)! 쓴맛을 좀 보여 줘. 저런 놈 훈계하는 데는 역시 말보다 주먹이야.”
“그래, 형!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베풀어서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줘.”
아마도 호룡의 동생인 듯 호영이라는 뚱보청년이 끝까지 문자를 쓰며 한마디 거들었다.
정말 어지간히 문자 쓰는 걸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몽뇌산은 이 풍류, 뭐라는 자들과 마주보고 서 있으려니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길 물을 때마다 이런 놈들이 걸린다면 제 명대로 못 살 것 같았다.
풍류사룡의 나머지 인물들이 호룡의 어깨를 두드리며 뒤로 물러나자 몽뇌산은 우선 그들이 더 이상 문자를 남발하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그사이에 몽뇌산 주위에는 사람들이 멀찍이 몸을 피하는 바람에 널따란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자, 어디부터 손봐 줄까?”
호룡이 어깨에 힘을 주며 몽뇌산을 을러댔다.
그가 말없이 인상만 쓰고 있자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호룡의 얼굴이 점차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너, 이 자식! 죽을 줄 알아. 난 지금 분명히 경고했다. 야! 이만하면 누가 봐도
공정해 보이겠지? 좋아! 받아라`─`!”
호룡의 왼발이 바닥을 미끄러져 앞으로 짓쳐 나옴과 동시에 그의 주먹이 몽뇌산의 복부를 겨냥하고
맹렬하게 허공을 갈랐다.
쐐애액`─`!
들리는 파공음(破空音) 하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이, 어디서 제법 무예의 기초를 닦은 것 같았다.
몽뇌산은 주먹이 가까이 다가오길 가만히 기다렸다가 허리를 살짝 비틀며 손바닥으로 호룡의 팔목을 소리나게 찰싹 때렸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그 일수는 뱀이 꼬리로 적의 몸뚱이를 후려갈기는 것을 본뜬 동작이었다.
다른 사람에겐 아무렇게나 때리는 동작으로 비쳐졌겠지만 맞은 당사자에게 이 성 공력을 실은 사왕권의 미타수격(尾打手擊)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상황은 금방 분명해졌다.
“우악`─`!”
호룡은 비명 소리도 요란하게 앞으로 꼬꾸라졌다.
호영을 필두로 해서 풍류사룡의 나머지 두 명이 호룡을 향해 우르르 달려왔다.
“아니, 이 자식이 사람을 쳐?”
옥색화복청년이 허리춤에 찬 보광이 화려한 검을 잡아 가며 도끼눈을 하고 몽뇌산을 노려보았다.
‘적반하장, 적반하장!’
속으로 중얼거리며 몽뇌산은 빨리 해결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팔목을 부여잡은 채 땅바닥을 뒹구는 호룡을 둘러싸고 있는 풍류사룡에게 짐짓 눈을 부릅뜨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섰다.
그가 내디딘 바닥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땅이 한 치 넘게 푹푹 꺼졌다.
멋들어지게 검을 뽑아 어이없이 당한 호룡의 복수를 해주려던 옥색화복청년이 그 광경에 몸을 움찔했다.
몽뇌산을 패배시킨 후 자신에게 쏟아질 사람들의 존경 가득한 눈길을 머릿속에 그리며
잔뜩 상상의 날개를 펴던 그는, 문득 복수보다는 친구의 안위(安危)를 살피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했다.
“호룡! 괜찮아?”
몽뇌산과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세라 얼른 호룡에게 고개를 돌리는 그의 얼굴은 어쩐 일인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몽뇌산은 그자들의 모습이 우스워져 피식 실소를 짓다가 풍류사룡이 당한 일을 고소해 하는 표정이
역력한 행인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자 이내 발길을 돌려 길을 재촉했다.
풍류사룡은 호룡의 상세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지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 몇 발짝 가지 않아 몽뇌산은 다시 몸을 획 돌렸다.
“길! 길을 물어 봐야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던 옥색 화복의 청년은 몽뇌산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자 사색(死色)이 되었다.
막 호룡을 부축하고 일어서려던 풍류사룡의 나머지 인물들도 몽뇌산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자 기겁을 했다.
“이봐! 여기서 남창부(南昌府)까지 얼마나 남았지?”
옥색화복청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 여기가 바로 남창부가 시작되는 정량현(良縣)인데요……?”
순간, 심각하던 몽뇌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얼마 안 남았군. 좋았어!”
씨익 웃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몽뇌산은 다시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호영이 호룡을 돌보다 말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인데, 손봐 준다고 해놓고 그냥 보내도 될까?”
“으으…… 네 말이 옳다, 호영! 사부님의 사문에 무공이 높은 분이 많다고 했으니 부탁드려서 나중에 꼭 복수하고 말 테다. 헉헉! 거지 같은 놈의 자식! 내 팔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으드득! 두고 보자!”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호룡이 팔목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이를 갈았다. 그의 팔목은
어느새 푸르죽죽하게 잔뜩 부어 올라 있었다.
“나중에 복수하려면 저 자식 이름이라도 알아 둬야 될 거 아니야?”
턱이 뾰족한 현의청년이 호룡을 부축한 채 격앙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자, 호영! 더 멀리 가기 전에 어서 불러!”
“내가?”
호영의 둥글둥글한 얼굴엔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너! 네가 제일 어리잖아? 장유유서(長幼有序)도 몰라?”
호영은 마지못해 앞으로 나서며 그새 저만치 가 있는 청년을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야`─`! 꼬랑지머리! 형, 안 들리나 봐. 불가항력(不可抗力)이…… 헉!”
모기만한 소리로 딱 한 번 부르고 나서 몸을 돌리려던 호영은 몽뇌산이 걸음을 딱 멈추며 몸을 획 돌리자
기겁을 했.
부들부들 떠는 호영을 보며 몽뇌산은 한 발을 들어올린 채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그들을 혼내 주러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망설였다.
처음엔 혼내 주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막상 한 발을 들고 보니 여기까지 걸어온 게 너무 아까웠다.
‘한 걸음이라도 멀어지는 건 싫어!’
반쯤 떼어 놓은 발을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놓으며 몽뇌산은 큰 소리로 외쳤다.
“뭐야?”
옥색화복청년이 옆구리를 찌르자 호영은 울상을 한 채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존성대명(尊姓大名)이 어떻게 되십니까?”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몽뇌산!”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몽뇌산은 한마디 툭 던지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뚱보청년은 아직 물어 볼 말이 남은 듯했다.
“저어…… 나중에 복수해도 될까요?”
“호영`─`!
“이 팔푼이 자식!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몽뇌산은 뚱보청년의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잡아 끄는 풍류사룡의 인물들을 향해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마음대로!”
* * *
몽뇌산은 사문이 있는 천초산(天草山)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풍류사룡이란 자들 덕에 남창부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발걸음이 가뿐했다.
남창부에 들어섰다면 천초산까지 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지난번 십만대산에 갈 때, 남창부를 벗어나는 데만 보름이 걸려 남창부 지리는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몽뇌산은 쭉 뻗은 관도를 부지런히 걸었다.
그때 뒤에서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그 소리에 길을 걷던 몽뇌산은 깜짝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구름 같은 먼지 더미에 인상을 쓰며 몽뇌산은 바깥쪽으로 정확히 세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말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더불어 먼지도!
몽뇌산은 먼지를 피하기 위해 고개를 모로 돌렸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히이이잉`─`!
쿠궁`─`!
육중한 소리와 함께 지면이 들썩거렸다.
몽뇌산은 기겁을 하고 돌아서며 반사적으로 뒤로 쭈욱 미끄러져 물러났다.
그런 그의 얼굴로 흙먼지가 화악 밀려들었다.
몽뇌산은 손을 쭈욱 펴서 앞으로 밀어 냈다. 무형의 경기에 휘말린 먼지들이 빗자루에 쓸려 가듯 물러났다.
“엣취`─`!”
먼지 저편에서 들려 온 기침 소리에 몽뇌산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관도 위엔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말 한 마리와 그 옆에서 난감한 얼굴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본래 녹색이었던 그의 옷은 방금 얼결에 뒤집어쓴 흙먼지에 모호한 색을 띠고 있었다.
“괜찮으시……?”
“말 좀 묻겠네. 봉암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혹시 아는가?”
몽뇌산의 말허리를 자른 녹의중년인의 음성은 초조함에 휩싸여 있었다.
몽뇌산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눈매로 보아 그는 그렇게 무정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도 지쳐 쓰러진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듯싶었다.
“도보로 반나절이면 족합니다.”
“그럼 이 길로 곧장 가면 천초산에 닿을 수 있나?”
“천초산이요?”
몽뇌산은 묘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녹의중년인의 얼굴에 순간 흠칫하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초조함이 감돌던 눈동자에서 표정이 사라지며 반쯤 드러난 주먹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몽뇌산은 녹의중년인의 심중에 살의가 싹트고 있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왜, 뭐가 이상한가?”
되묻는 녹의중년인의 음성엔 희미한 긴장이 배어 있었다.
“아니요, 실은 제가 거기 살거든요. 거긴 사냥꾼들을 제외하고는 찾는 사람이 드문 곳인데……”
“젊은이, 자네도 사냥꾼인가?”
몽뇌산은 자신의 전신을 찬찬히 훑어보는 중년인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약초를 수집하는 게 일이긴 하지만 사냥도 안 하는 건 아니니까요.”
몽뇌산의 담담한 얼굴을 중년인의 시선이 비수처럼 쓸고 지나갔다.
그의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지는 걸 보며 몽뇌산은 그의 살의가 가라앉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곳까지 가는 길을 좀 가르쳐 주겠나?”
“알려 드릴 순 있지만 제가 길을 설명하는 게 서툴러서……”
“괜찮네.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네.”
몽뇌산은 중년인의 말없는 재촉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초산 가는 길은, 그러니까 우선 이 길로 쭉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왼쪽으로 가십시오.
오른쪽으로 가도 봉암현이 나오지만 그쪽은 길양현(吉陽縣)이 있는 쪽과 가까운지라 천초산하고는 많이 멀어지게 되죠. 아무튼
왼쪽 길로 두 시진 가량 가다 보면 고준산(高峻山)이 나오는데 그걸 넘고 나면 봉암현과 맞닿은 창령현(蒼嶺縣)의 경계가 시작됩니다. 그 창령현의 외곽을 끼고 북상하면 봉암현에 이르게 됩니다. 봉암현에서……”
“봉암현에 들어가고 나면 천초산을 찾는 건 쉽겠지. 친절히 가르쳐 주어서 고맙네. 그럼, 시간이 촉박하여 이만!”
녹의중년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상당한 수준의 경공이었다.
몽뇌산도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말을 한쪽으로 옮겨 놓고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한 열댓 걸음이나 옮겼을까? 어느 순간 그의 몸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아! 한 가지 빼먹고 말 안 해줬다. 고준산은 온통 절벽이라 곧장 질러서 넘기는 힘들고 뱃길을 따라 둘러서
가야 하는데…… 설마 고준산을 그냥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생전 남에게 길을 가르쳐 줘봤어야 그것도
안 빼먹고 잘하지. 그러나저러나 좀 미안한데?”
고개를 흔들다 말고 몽뇌산은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의 신형이 점점 멀어져 갔다.
천초산을 향해서……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몽뇌산은 기암절벽(奇岩絶壁)들이 삐죽삐죽 솟은 고준산의 웅자를 눈앞에 대하고 서 있었다.
그의 발길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꺾였다.
몽뇌산이 고준산 밑에 자리한 정량현의 외곽을 싸고 도는 한수(汗水)에 다다른 것은 그로부터 한 식경 후였다.
느긋하게 나루터를 향해 가던 그의 눈이 갑자기 생기를 띠었다.
갑작스레 앞을 가로막은 세 명의 황의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을 향해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초리를 치켜 올리는 몽뇌산에게 선두에 서
있던 황의중년인이 말을 건넸다. 등에 진 커다란 짐으로 보아 먼 길을 다녀오는 장사꾼쯤
되는 것 같았다.
다만 사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그의 각진 얼굴과 딱 벌어진 어깨가 장사꾼답지 않게 강인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소형제, 물을 것이 있네. 이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올라가면 창령현에 닿게 되는 게 맞는가?”
몽뇌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창령현에서 외곽을 따라 북상하면 봉암현이 나오는 것도 맞는가?”
다시 한 번 끄덕끄덕!
“맞다는군요, 숙부님! 봉암현 경내에 들어서기만 하면 천초산을 찾는 것은 쉬울
것 같습니다. 자, 가시죠. 가자꾸나! 소형제, 알려 주어 고맙네.”
오른쪽에 서 있던 작달막한 칠십대 황의노인과 왼쪽에 한걸음 뒤처져 서 있던 이십대 중반의 여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나서 황의중년인은 몽뇌산에게 사의(謝意)를 표했다.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으며 몽뇌산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
‘세간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천초산을 찾는 사람이 갑자기 늘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몽뇌산은 깊은 눈길로 황의중년인의 일행을 살폈다.
키에 비해 팔이 꽤 길어 보이는 황의노인은 눈빛이 매의 그것처럼 날카로웠고, 늘씬하니 키가 큰 여인은 상당히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차가웠다.
무심한 나머지 허무해 보이는 눈동자가 그랬고,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얗고 오똑한 콧날 또한 그랬다. 그리고 한 일 자로 꼭 다문 입술도 그녀의 냉정한 성정(性情)을 말해 주고 있었다.
여인의 등에도 중년인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봇짐이 지워져 있었다.
몽뇌산의 시선을 느꼈을 법도 한데 여인은 미동(微動)도 없었다. 심지어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나루터에 대어져 있는 제법 커다란 배에 올라타는 그들의 뒤를 따라 몽뇌산도 천천히 배에 올랐다.
한 시진에 한 번씩만 배를 띄우는지라 배 위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몽뇌산도 적당한 곳에 앉아 뱃전에 등을 기댔다.
그 자린 공교롭게도 황의여인의 맞은편이었다.
그녀는 몸을 비스듬히 돌려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다란 속눈썹에 가려져 눈빛조차도
읽어 낼 수가 없었
정말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기질을 지닌 여인이었다.
젊은 여인을 빤히 바라본다는 게 어쩐지 객쩍게 여겨진 몽뇌산은 고개를 뱃머리 쪽으로 돌렸다.
그때, 뱃머리 쪽에 앉아 있던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금의화복을 번듯하게 차려입은 그는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생긴 것은 제법 준수했으나
미간이 좁고 눈가에 방탕한 기운이 배어 있는 게 어쩐지 호감이 가지 않는 자였다.
몽뇌산은 사내가 거만하게 뒷짐을 진 채 강렬한 눈빛으로 황의여인을 주시하며 다가가는 모습을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바닥에 놓인 짐들을 피하느라 몽뇌산 쪽으로 돌아서 지나가던 사내의 몸이 무언가에 걸린 듯 갑자기 휘청했다.
짐꾸러미들이 층층이 쌓인 바닥에 사정없이 나동그라지기 직전, 금의청년은 몸을 순식간에 뒤집으며 돛대 아래로 늘어진 밧줄을 손 안으로 끌어들였다.
상당한 경지에 이른 접인공(接引功)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처박히는 꼴을 면한 청년이 눈가를 희미하게 붉힌 채 고개를 발딱 치켜 들었다.
청년의 음침한 눈동자가 몽뇌산의 얼굴에 화살처럼 꽂혔
‘눈치챘나?’
속으로 뇌까리며 몽뇌산은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
예상대로 금의청년의 눈가엔 살기(殺氣)가 가득 차 오르고 있었다.
“네놈이 감히 본 공자의 발을 걸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너 같은 잡배들을 그냥
지나친다면 이 상관옥영(上官玉英)의 체면이 무엇이 되겠느냐?”
몽뇌산은 체면 운운하며 거창하게 나오는 금의청년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오늘 본 공자의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 팔 하나로 끝내겠다.”
‘다’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상관옥영이란 금의청년의 신형은 이미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먹이를 물려는 매의 발톱처럼 오므려진 그의 손가락이 몽뇌산의 팔을
낚아채 왔
쑤아악`─`!
대기를 찢어 내는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경기(勁氣)가 밀어닥쳤다.
여기저기서 경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달리 피할 곳도 없는 배 위에 몸을 맡기고 있던 사람들은 난데없이 시작된 싸움에 저마다 최대한 몸을
움츠리며 피하기에 바빴다.
진작에 공력을 모으고 있던 몽뇌산은 상관옥영의 손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손가락 끝에서 서리같이 하얀 기운이 실낱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공력도 공력이려니와 조공(爪功)의 조예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그러나 몽뇌산은 그의 조공 실력보다도 자신의 팔을 통째로 뜯어 내려는 악독한 심보에 더 세차게 혀를 내둘렀다.
“겁나네, 정말!”
태연히 내뱉었지만 몽뇌산은 내심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찌익!
소매를 찢어 내며 그의 오른팔을 움켜쥔 상관옥영의 손이 강철처럼 근육을 조여 왔다.
하얗게 웃는 얼굴로 점점 공력을 돋우는 상관옥영을 보자 몽뇌산은 더 이상 여유를 부릴 틈이 없음을 느꼈다.
‘뭐, 이런 자식이……!’
팔이 금방이라도 뽑혀 나갈 것만 같은 순간, 몽뇌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진기를 팔로 도인(導引)했다.
사사사삭!
몽뇌산의 팔이 단단하게 조여진 상관옥영의 손 안에서 교묘하게 비틀어졌다.
뱀이 나뭇등걸을 타고 오르는 형상이었다.
삽시간에 상관옥영의 팔뚝을 거슬러 올라간 몽뇌산의 손이 마침내 상관옥영의 상완(上腕)을 덥석 움켜쥐었다.
동시에 그의 발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상관옥영과 자리바꿈을 했다.
놀라는 상관옥영을 향해 악동처럼 웃어 보이며 몽뇌산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물 좀 먹게 될 거다!”
전음을 듣고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상관옥영의 팔뚝에 푸른 지인(指印)을 새겨 줌과 동시에 몽뇌산은 팔을 슬쩍 위로 들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상관옥영의 몸이 붕 떠올랐다.
처음의 음유(陰柔)하고 매섭던 기세와 달리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몸이 배를 벗어나기 직전이었다.
찌이익!
허공을 저어대던 상관옥영의 손이 뭔가를 붙잡은 것도 잠시. 그의 몸은 요란하게 물 튀는 소리를 내며 강물로 떨어졌
상관옥영이 몽뇌산에게 달려들고 다시 물에 빠지기까지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 덕에 누구 한 사람도 상관옥영이 제대로 대항조차 못 한 이유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물방울만 남긴 채 강물 속으로 사라진 상관옥영은 좀처럼 다시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잠시 웅성거렸지만 방금 일어난 일이 무림인들의 일이라는 것을 알자 누구도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배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책임이 있는 늙은 사공만이 마지못해서인 듯한 얼굴을 하고는 물속을 몇 번 헤집었지만, 걸리는 것이라고는 수초들밖에 없었다.
사공은 머뭇거렸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얼마 안 있어 배는 다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광아! 물에 빠지지 않게 짐을 잘 챙겨라!”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상관옥영이 물에 빠지기
직전, 몽뇌산을 한번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황의노인이 눈꺼풀을 반쯤 들어올린 채 중얼거렸다.
“예, 숙부님! 조심하겠습니다.”
상관옥영에 의해 한쪽이 찢겨 나간 봇짐을 안으며 황의중년인이 굳은 얼굴로 구멍난 곳을 가렸다.
그를 마음대로 다루는 몽뇌산의 무공내력을 살피느라 미처 짐을 간수하지 못한 것이 화근(禍根)이었다.
딱딱한 얼굴로 짐을 꽁꽁 여며 옆구리에 끼는 황의중년인의 모습을, 몽뇌산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괴이쩍은 얼굴로 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황의! 그렇군!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오직 당문만이 저런 차림을 하는 것을! 황자초를
보고서야 그 생각을 해내다니, 나도 참!’
몽뇌산은 황의인들의 옷차림을 눈여겨보며 혀를 찼다.
입 안이 썼다.
절강성에서 그가 발견한 황자초를 가져 갔던 당문 사람들을 여기서 또 보게 되다니…… 기이한 인연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천초산으로 간다는 것 또한 우연치곤 묘했.
몇 번이나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모습을, 이제껏 강물에만 시선을 주고 있던 황의여인이
짤막한 이채(異彩)를 담고 잠시 주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출발할 때보다 한 사람이 줄어든 채, 배는 쉼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저 강물만이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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