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제4장 - 포하구(包河口) 일전(一戰) 2

조회수 6 15세 이상 이용가 등록 2026.09.19
독로무한
9화. 제4장 - 포하구(包河口) 일전(一戰) 2


“사정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부님!”
벌써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얘기를 한 듯 청년은 말을 마치자마자 탁자에 놓인 찻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체격이 장대한 청년이었건만 어찌 된 일인지 한쪽 팔이 불편한 듯 온통 붕대로 친친 감고 있었다.
“그놈의 독공이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냐?”
이제껏 청년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염소수염의 갈의중년인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유난히 불그스레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청년은 갈의인의 껄끄러운 심사를 눈치채고는 재빨리 혀를 놀렸다.
“대단하다니요? 무공이 안 되니까 독으로 암수를 쓴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설사 그의 독공이 대단하다 한들 감히 사부님의 무위에 비할 바이겠습니까?”
“허험! 하기야 무공이 달리는 자들이 대개 독으로 한몫 보려 하는 법이지.”
갈의인은 붕어 같은 눈을 끔뻑거리며 짐짓 수염을 쓸어 내렸다.
청년의 아부가 퍽이나 만족스러운 듯했지만 몇 가닥 있지도 않은 수염을 거창하게 쓸어 내리는 모습은 어딘지 우스워 보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청년이 다시 애원했다.
“놈의 수단이 어찌나 악독했던지 몸을 추스리는 데만 사흘이나 걸렸습니다. 부디 제자가 당한 수모를 갚아 주십시오. 그놈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집니다. 아버님께서도 사부님만 믿고 계십니다.
사부님께서 나서만 주시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시겠다 하셨습니다.”
마지막 말의 효과는 대단했다.
갈의인이 대뜸 정색을 한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재능이 뛰어나지도 않은 청년을 제자로 삼은 것은 그가 남경부에서 내로라 하는 부호의 자식이기 때문이었다.
부호의 자식을 제자로 삼는 것은 그가 속해 있는 방파, 패진장(覇進莊)에서는 하나의 관례와도 같은 것이었다.
패진장주인 유성비호(流星飛虎) 강추룡(姜追龍)은 독문무기로 유성추를 쓰는 까닭에 별호 하난
거창했지만 무공보다도 장사꾼 기질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패진장이 강서성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문파가 된 이면에는 강추룡의
철저한 실리주의(實利主義)가 있었다.
장주가 되고 나서 강추룡은 끊임없이 거부의 자제들을 제자로 거두는 일을 권장했다.
재능이 있고 없고는 관계치 않았다. 그 덕에 웬만큼 재산이 있다 하는 집안의 자제 상당수가 무기명제자 형식으로 패진장에 입문했고, 그 숫자만큼 패진장의 재산도 눈덩이 불듯 불어 갔다.
‘재산이 늘고부턴 아주 목에 부목을 댄 것처럼 힘을 주고 다니지. 맨날 아랫사람만 잡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갈의인, 강추룡의 사제인 홍안자(紅顔子)는 한 건 올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놈인지 이름도 없는 놈한테 터지고 온 제자가 한심하긴 했으나 적당히 나서서 손봐 주고 나면 그
아버지가 결코 입 싹 씻고 넘어가진 않을 테니 어쨌든 남는 장사였다.
그리고 홍안자가 알기로 강추룡이 남는 장사를 하지 말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호룡! 여기서 잠시 기다리거라. 어쨌거나 잠시 장(莊)을 떠나 있자면 방주께 먼저 아뢰야 할 테니 난 지금 바로 방주를 뵙고 오겠다.”
홍안자는 위엄있게 수염을 쓸어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섰.
따라 일어서는 제자를 손짓으로 만류하고는 곧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문이 닫히자 호룡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한 쪽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는 부르르 떨었다.
“두고 보자, 몽뇌산! 곧 본 공자를 건드린 걸 후회하게 해줄 테다.”

홍안자는 장주 처소에 발을 들여놓으며 우선 강추룡의 표정부터 살폈다.
강추룡이 돈이라면 무조건 좋아 달려드는 성미긴 했지만 패진장의 재산이 웬만한 부호 못지않게 쌓이고
나자 액수가 적은 일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도 대가가 시시한 일을 아뢰다가 삼당주 중 한 명이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홍안자로서는 백번 조심하고 싶은 게 당연했다.
홍안자는 호피를 깔아 놓은 거대한 태사의에 팍 퍼져 있는 강추룡의 안색을 살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방주! 쉬고 계신데 방해하여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아뢸 일이 있습니다.”
강추룡은 두꺼비 같은 눈을 내리감고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까딱했다.
홍안자는 화려한 금포에 휘감긴 그의 굵직한 팔다리와 자신의 팔다리를 슬쩍 비교하며 내심 불평을 쏟아 냈다.
‘저는 기름지게 먹어 피둥피둥하면서 지랄맞은 성격 때문에 하나 있는 사제는 이렇게 피를 말려대니…… 나쁜 놈!’
“뭐 하냐?”
“네?”
홍안자는 행여라도 그가 자신의 생각을 읽었나 싶어 간이 다 쫄아 붙는 것 같았다.
놀라서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목덜미까지 빨개진 그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며 강추룡은 끌탕을 쳤다.
“쯧쯧쯔…… 누가 홍안자 아니랠까 봐…… 아뢸 게 있다며?”
“아! 예, 제가 거둔 제자 중 호룡이란 아이가 독을 쓰는 몽뇌산이란 자에게 당해서 복수를 해달라고 지금 본 장에 와 있습니다. 왜, 기억하시죠? 그 아이 아버지가
남경부에서 알아주는 부호 아닙니까? 제 생각으론 꽤 짭짤한……”
“야, 사제야!”
홍안자는 자신의 말을 싹뚝 자르며 은근한 음성을 보내는 강추룡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강추룡이 긴장하고 있는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여기서도 충분히 아뢸 수 있는데……”
홍안자는 강추룡의 두꺼비눈이 뱀눈으로 변하는 걸 보며 쭈뼛쭈뼛 태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누구냐?”
“그야…… 패진장의 위대한 장주시며 이 홍안자의 하나밖에 없는 사형이시고……”
“근데?”
심상치 않게 변해 가는 강추룡의 안색을 보며 홍안자는 목을 움츠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홍안자야, 홍안자야! 네 눈에는 내가 무슨 돈에 환장한 깡패, 아니면 해결사, 그도 아니면 청부무사쯤으로 보이는 게냐, 응? 네 덜 떨어진 제자 놈 복수하러 내가 칼이라도 들고 나서야 된다는 거냐, 뭐냐? 아니면 내가 그런 하잘것없는 놈들 앞에서 유성추 들고 춤이라도 추랴?”
말하면서 분노가 가중되었는지 홍안자를 노려보는 강추룡의 눈가에는 살기마저 흘렀다.
“복수는 제가 하러 갈 건데……”
“어이구! 꼴값을 떨어라! 나가서 아예 해결사 단체를 하나 차리지 그러냐? 나가, 나가! 그렇게 할 일이 없거들랑
촐싹대지 말고 가서
유성추나 닦어! 저녁때 검사해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윤기만 안 흘러 봐라, 그냥! 안 나가!”
홍안자는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나는 강추룡의 모습에 기겁을 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갑니다. 가요, 사형!”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밖으로 튀어나가는 그를 보며 강추룡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나잇살이나 먹은 놈이…… 쯧쯧! 저놈 땜에 내가 아주 살이 말라!”
태사의에 주저앉다 말고 강추룡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도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신형은 이내 내실로 사라졌다.
“장주! 언짢은 일이 있으십니까? 어째 안색이 편치 않으십니다.”
강추룡은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물으며 새털처럼 가볍게 안겨 오는 일곱 번째 첩을
보자 입이 벌어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홍안자 때문에 상했던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개고 있었다.
“홍안자 놈 때문에 잠깐 기분이 안 좋았는데, 수선(水仙)이 너를 보니 다 풀렸다.”
연신 희죽거리는 그의 모습은 홍안자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뼈가 없는 듯 흐물거리는 그를 보며 분홍 나의 차림의 여인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렸다.
야한 옷차림과는 달리 수선화를 연상시키는 여인의 자태는 청초하고 가냘퍼서 천박함이 없었다.
“자, 자, 서서 이러지 말고 침상으로 가자꾸나.”
여인의 몸을 번쩍 안아 들며 강추룡은 성큼성큼 침상 쪽으로 향했다.
“장주, 장주! 잠깐만! 아직 대낮이옵니다. 아직 장내의 일을 보실 시간이온데,
여기서 이러시다 행여 장주의 위명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여인은 조리있게 말하며 강추룡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초롱한 눈망울엔 진정으로 간하는 빛이 어려 있었다.
강추룡은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여인을 내려놓았다.
수하들이 봤으면 기겁할 만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겐 무자비할 정도로 독재적인 그가 얼마 전 일곱 번째 첩으로 들인 이 수선이란 여인에게만은 꼼짝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강추룡은 수선의 청순하고 우아한 모습에 푹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수선이 하는 말,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예뻐 보였다.
여인을 내려놓고 멀거니 서 있는 강추룡의 손을 수선이 살며시 잡아 끌었다.
“여기 앉으십시오. 차를 내오겠습니다.”
수선은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차를 들여왔다.
강추룡은 수선이 내온 차를 짐짓 기품있게 마셨다.
“장주! 아까 그 얘기나 해주십시오. 홍안자 나으리께서 또 무슨 잘못을 하셨습니까?”
강추룡은 입 안이 떫은 얼굴로 찻잔을 탕, 하고 내려놓았다.
“그 빙충맞은 놈! 제 사형을 뭘로 보고……!”
“이처럼 노하시는 걸 보니 홍안자 나으리께서 장주께 뭔가 큰 실수를 하신 게로군요?”
수선은 걱정이 담긴 눈으로 강추룡을 올려다보았다.
“괘씸한! 내 유성추가 그깟 돈 몇 푼에 움직일 것으로 보였단 말인가? 제놈이 나를 완전히 황금충에 바지저고리로 보지 않은 바에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글쎄 그놈이 꼭 저같이 덜 떨어진 제자 놈 복수를 해달라고 하지 않겠어? 뭐, 몽뇌산이라는
독을 쓰는 자에게 당했다나? 그러면서 복수만 해주면 그놈 아비가 은혜를 그냥 넘기지는 않을 거라더군. 물론 나도 그자가 남경부에서 알아주는 부호란 건 알지만 돈 몇 푼으로 감히 이 강추룡을 희롱해?”
침까지 튀겨 가며 흥분하는 바람에 강추룡은 애첩의 눈빛이 묘하게 빛나는 걸 보지 못했다.
당시의 화가 되살아나는 듯 길길이 뛰는 그의 손을 다독이며 수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주! 소첩이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 일은 그리만 생각하실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홍안자
어른이 누굽니까? 장주의 사제 분이 아니십니까? 그분의 제자라면 곧
장주의 사질이 됩니다. 누가 장주의 사질을
욕보였다는 것은 바로 장주를 욕보인 것과 같습니다. 장주의 대명(大名)을 더럽히려는 생각이 없었다면 어찌 장주의 사질을 건드렸겠습니까?
이는 명백히 장주에 대한 도전입니다.”
수선은 결연하게 말을 맺었다.
강추룡은 한마디로 감동하고 말았다.
“수선아! 너야말로 진짜 나의 충신이로구나. 사실 홍안자의 얘길 듣고 잠시 분노하긴 했지만 이 강추룡의
위명을 모르는 철없는 자의 소행이라
여기고 그냥 참아 넘기려 했는데……”
“그런 일은 참아선 아니 됩니다. 장주의 어지신 마음은 알고 있으나 한번 그러시면 하찮은 자들까지
장주를 업신여길 것입니다. 장주! 일벌백계(一罰百戒)하신다는 마음으로 직접 출정하십시오.”
강추룡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오냐! 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자들을 단단히 혼내주고 오마.”
강추룡은 기세 등등하게 대청으로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여인은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 * *
“강추룡은?”
어둠 속에서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낮에 홍안자를 닦달해서 수하들을 이끌고 바로 떠났습니다.”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조용히 답했다. 어딘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있던 여인의 말이 끝나자 침상 가에 서 있던 백포복면인이 독백인 양 중얼거렸다.
“죽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어지간히 서둘렀군.”
“죽다니요? 몽뇌산이란 자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여인의 물음은 의아함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렇진 않지만 강추룡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백포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
“그럼…… 본 림에서 손을 쓰는 겁니까?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는지……”
“왜? 그새 정이 들었나, 십이호(十二號)?”
순간, 여인의 몸이 놀라 굳어들었다.
“아닙니다. 다만 대단치도 않은 인물을 본 림에서 직접 나서서 처리한다는 게 이상해서……”
“강추룡이 우리가 암중으로 유도하는 대로 몽뇌산이란 자의 행적을 쫓아가 그와 맞닥뜨리게 되면 그걸로 그자의 역할은 끝나는 셈이지. 우린 강추룡을 몽뇌산이란 자와 양패구사한 걸로 처리할 생각이다. 그래야 저쪽에서 옥합이 탈취당한 걸 알아도 우리와 연관 짓지 못할 게 아닌가? 무엇보다도 이건 당문인에 대한 건이 생각대로 되지 않은 데
진노하신 임주께서 친히 내리신
명령이다. 만약 이번 일이 실패한다면 그대도 나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백포인이 냉혹하게 잘라 말하자 여인의 몸이 미미하게 진동했다.
“하긴 그 일이 실패한 덕에 몽뇌산이란 자의 행적을 알게 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그렇게 손해본 일도 아닌 셈이지.”
“저로서는 당문인들을 왜 끝까지 처리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특급살수 몇
명만 더 내보냈더라면 충분히 그들을 해치울 수 있었을 텐데……”
“어리석은 소리! 아직은 당문을 경동(輕動)시킬 때가 아니다. 게다가 애초부터 우리의 목적은
그들의 발길을 될 수 있는 대로 지체시키는 것이었지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인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빛났다. 상부에서 하는 일은 그녀와 같은 하급자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유를 알려 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들은 그 동안 구한 독초들을 지니고 반드시
당문에 도착해야 하고, 그 까닭은 나도 모른다. 그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라.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가지다가는 목숨을 온전히 보존치 못하는 수가 있으니. 그리고 십이호! 내일쯤 패진장에서 철수하라. 이번에
기지를 발휘해서 일을 수월하게
만들었으니 임주께서 상을 내리실 것이다. 그럼 일이 끝난 후 총단에서 보자!”
백포인은 감정이 일체 배제된 어조로 빠르게 내뱉고는 그 자리에서 유령처럼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한참 후에야 여인은 겨우 몸을 일으켰
바람이라도 스치고 지나간 듯 반쯤 열린 창문을 닫으며 여인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몽뇌산도 강추룡도 이젠 죽음을 피할 수 없겠군. 임주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으니, 본
림에서 특급살수들이 대거 나올 것 아닌가? 일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창문을 닫고 돌아서는 여인의 청초한 얼굴 위로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 * *
손유경 일행과 헤어진 몽뇌산은 다음날 뱃길로 파양호(播陽湖)를 건너 북으로 구강부(九江府), 동으로 완주부(州府)와 맞닿아 있는 남강부(南康府) 땅을 밟고 있었다.
남강부까지 오는 데 꼬박 이틀이 걸린 셈이었다.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한 덕에 끝없이 펼쳐진 파양호의 시리도록 푸른 물결이 금방 뒤로 멀어져 갔다.
나루터가 있는 곳부터 남강부의 성자현(星子縣)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몽뇌산은 일부러 번화한 현의
중심부를 가로지르지 않고 외곽 쪽으로 둘러서 가는 길을 택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문 관도를 따라 두 시진쯤 걸었을까?
눈앞에 갈림길이 나왔다.
그가 선택의 기로(岐路)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하늘에서 떨어진 듯 느닷없이 나타난 백마 한 필이
그의 옆에 와서 급정거를 했다.
앞발을 하늘 높이 치켜 올리며 속력을 줄이는 말도 말이거니와 고삐를 낚아채며 능수능란(能手能爛)하게
말을 세우는 기수(騎手)의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봐! 호북성(湖北省)까지 가장 빨리 가는 길이 어느것이지?”
말 위에서 날아온 목소리는 젊은 여자의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보는 이의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말과 행동은 오만하고 무례했다.
몽뇌산은 불쾌한 마음에 일부러 쌀쌀맞게 고개만 흔들었
순간, 마상의 백의여인에게서 표독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안 가르쳐 주겠다는 거냐? 감히 너 따위 천한 자가 본 낭자의 질문에 답하기를 거절하다니……”
“오해 마. 안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모른다는 얘기니까.”
몽뇌산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대뜸 반말로 응수했다.
순간, 세상에서 제일 황당한 일을 당한 듯 여인의 눈썹이 위로 뾰족하게 치솟았다.
어이가 없는지 파르르 떨면서 한동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던 여인이 막
앙칼진 고함을 내지르려는 찰나, 몽뇌산이 갑작스럽게 몸을 휙 돌렸다.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문 여인의 눈길이 몽뇌산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들이 지나온 길 저편에서 지금 막 사십대쯤으로 보이는 행인 두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몽뇌산은 그들이 가까이 오길 기다려 쪼르르 다가가 길을 막고 섰다.
몽뇌산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여인도 말을 움직여 몽뇌산 옆에 나란히 섰다.
‘혁 가가를 쫓아가는 일이 급하지만 않았다면 너는 절대 무사하지 못하였으리라. 감히 모용세가의
금지옥엽인 이 모용도도(募容滔滔)를 무시하다니!’
여인은 자신이 모용세가 사람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늘상 자신을 공주처럼 떠받드는 사람들만 겪어 온 탓에 누구든 자신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만 알고 있으니, 몽뇌산의 뻣뻣한 태도가 분한 게 당연했다.
모용도도는 성질을 겨우 누르고 우선 급한 문제부터 해결을 보기로 했다.
“호북성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어느것이죠?”
“호북성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어느것인가요?”
난데없이 갈길이 막혀 버린 두 행인은 모용도도와 몽뇌산의 입에서 똑같은
질문이 튀어나오자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눈앞의 두 남녀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기는 모용도도와 몽뇌산도 마찬가지였다.
“흥!”
“나 참!”
모용도도의 매몰찬 콧소리와 몽뇌산의 어이없어하는 음성이 서로 엇갈렸다.
두 행인의 표정은 더욱더 이상해졌다.
갈의(褐衣)를 입은 염소수염의 사내와 남의(藍衣)를 입은 매부리코 사내가 서로를 쳐다보며 얼른 가르쳐
주고 떠나자는 신호를 주고받았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두 남녀 사이에 끼여 있다가 봉변이라도 당할까 두려웠던지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어
길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그야 오른쪽 길……!”
“물론 왼쪽이지!”
대답이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제는 장내에 있는 네 사람 모두 당황하기 시작했다.
몽뇌산과 모용도도는 갈의인과 남의인에게 둘 중에 어느것이 맞는지 분명히 하라는 눈빛을 따갑게 보냈다.
“이 보게! 자네도 참, 기억력 하고는! 왜, 사오 년 전에 우리가 무창성(武昌城)에 볼일이 있어 이 길을 지날 때 분명 오른쪽 길로 가지 않았나?”
갈의인이 먼저 남의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나섰다.
남의인은 매부리코를 찡긋거리며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 그때 우리는 왼쪽 길로 갔었다네. 왼쪽 길로 쭈욱 가다 보면 나루터가 하나
나오지 않나? 그 강 이름이 아마 단수(端水)였지? 뱃길을 따라
올라가서 호북성에 들어섰던 거 기억 안 나나? 왜, 자네가 내 성(姓)하고
똑같이 생각하면 잊을 염려가 없겠다고 농담까지 하지 않았나?”
갈의인은 머리만으로는 모자라 손까지 내저었다.
“아니야, 자네 뭔가 착각하고 있구만. 그때 나는 우리 마누라 성씨하고 같다고 그랬었네. 틀림없어, 오른쪽이야.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한걸!
자네도 이제 나이가 들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모양이군?”
“실없는 소리! 우리 마을에서 기억력 하면 날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걸 모르나? 그때 우리가 무창의 위가장(韋家莊)으로 포목대금을 받으러 가지 않았었나?”
남의인이 끄집어 낸 과거의 기억에 갈의인은 전혀 동조(同調)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니지! 그때 우린 맹가장(孟家莊)에 뒤바뀐 옷감을 바로 찾아 주러 가는 길이었네. 내 기억이 틀리다면 손에 장을 지짐세.”
흥분이 되는 듯 갈의인의 이마에 서서히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어대는 남의인은 코끝에 잔뜩 주름을 잡은 채 열을 올렸다.
“그럼 장을 지져야겠군. 내 기억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네 마누라 등에 있는 점의 개수까지 외울
정도인데, 그래,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을 리 있겠나?”
“뭣이? 아니, 자네가 내 마누라의 등에 점이 있는 건 어찌 안단 말인가? 자네, 자네…… 이제 보니……!”
갈의인의 염소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시뻘게진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쥔 채 친구를 노려보던 갈의인은 곧 인내의 한계에 부딪혔는지 대뜸
남의인의 멱살부터 틀어쥐었다.
남의인이 당황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지만 이미 갈의인의 화를 누그러뜨리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내, 내 말을 들어 보게. 그건 그냥 말이 그렇다는 얘기……”
“흥! 말이 그래? 어림없는 수작 마라, 좌가(左家)야! 어서 바른 대로 대지 못해?”
갈의인은 있는 대로 흥분해서 침까지 튀겨 가며 남의인을 몰아붙였다.
“글쎄, 오해라니까!”
남의인이 답답하다는 듯이 펄쩍 뛰었지만 어이없는 눈길로 황당하게 그들을 쳐다보고 있던 몽뇌산과 모용도도마저도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해? 오해 좋아하시네. 좌가, 네 이놈! 자기 마누라가 못생겼다고 친구
마누라를 넘봐? 이런 시러베아들 같은 놈!”
“뭐가 어째? 시러베아들? 오냐! 지금 해보자는 거지? 그래, 내 마누라 못생긴 데 네가 뭐 보태 준 거 있냐? 있어?”
남의인이 분을 참지 못하고 같이 멱살을 휘어잡아 갈의인을 배〔腹〕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길 한가운데서 뒤엉켜 치고 받고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정작 할말을 잃은 것은 몽뇌산과 모용도도였다.
둘의 눈에 담긴 빛은 기막힘 그 자체였다.
몽뇌산과 모용도도는 흙바닥을 뒹굴며 애들처럼 싸움질에 정신이 없는 갈의인과 남의인에게서 몸을 돌려
다시 갈림길 앞에 섰다.
골똘히 생각을 거듭하던 모용도도가 냉큼 왼쪽 길로 들어서자 몽뇌산은 망설임없이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막 말을 출발시키려던 모용도도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말 옆구리를 걷어차며
비호처럼 달려나갔다.
몽뇌산도 망설임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뒷모습이 점으로 화한 뒤에도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싸움은 고랫적 얘기까지 들먹이며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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