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제1장 - 귀로(歸路) 2

조회수 6 15세 이상 이용가 수정 2026.09.19
독로무한
3화. 제1장 - 귀로(歸路) 2


몽뇌산은 황자초의 흔적을 쫓아 벌써 한 식경 넘게 숲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서 좀 전에 지나친 화복귀공자와 청의대한의 일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그때 귀공자의 결벽증(潔癖症) 환자 같은 눈길을 대한 순간, 몽뇌산의 호기심은 팍 꺼지고 말았다.
귀공자의 눈빛에 떨떠름한 기분이 든 것은 둘째 치고라도 앞일이 뻔한 상황에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아서였다.
몽뇌산은 곧 황자초 찾는 일에 열중했다.
숲속에 들어서서 산 아랫자락을 한참 따라 올라갔지만 황자초는 다시 눈에 띄지 않았다.
몽뇌산은 귀찮은 기색 없이 끈기를 가지고 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본래 황자초는 생육조건(生育條件)이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라서 한랭(寒冷)하고 그늘진
곳을 좋아했다. 또한 그늘이 지되, 독초치곤 별나게도 습한
것을 싫어하는지라 여름에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게 황자초였다.
그러니 강남, 그것도 바다를 면하고 있어 겨울에도 그다지 건조한 기후가 아닌 절강성에 황자초가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은 확실히 놀라웠다.
돌아가서 사부님께 말씀드리면 상당히 흥미로워하실 만한 일이었다.
몽뇌산은 잡목들을 헤쳐 가며 한 식경을 헤맨 끝에 나뭇등걸 밑에 숨어 있는 황자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하나가 아니라 세 포기였다. 어느새 수정(受精)을 했는지 한 뼘 길이의 황자초 옆에 아직 한 치도 채 안 되는 어린것들이 누런 잎사귀를 삐죽 올리고 있었다.
황자초는 자가수정(自家受精)을 하는 종류라서 단지 수정을 한 것만으로 근처에 군집지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어쨌거나 위로 갈수록 수가 늘고 있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한 시진 가까이 덤불을 헤치며 산을 오르자 어느새 작은 절곡(絶谷)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절곡의 후면(後面)을 차지하고 있는 절벽으로 다가간 몽뇌산은 그곳의 쩍 갈라진 암벽 사이로 다가갔다.
암벽을 반으로 갈라 휘장을 치듯 벌려 놓은 그 틈새는 제법 커서 사람 하나가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였다.
약간 어두컴컴한 안으로 일 장쯤 들어가자 두세 평 가량 되는 공간을 가득 메우고 누런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황자초였다.
몽뇌산은 황자초 특유의 달착지근한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일종의 동굴이라고 할 수 있는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코로 느껴지는 공기는 써늘한 느낌이 들 정도로 축축함이 없고 청량했다.
몽뇌산의 몸이 누런 황자초들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
“자리를 잘도 잡았는데? 바람이 잘 통하니 습할 이유가 없고, 절벽 틈새로 난 동굴 안에 있으니 더워서 죽을 염려도 없고.”
고개를 끄덕이며 몽뇌산은 봇짐 안에서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조그만 망태기 하나를 꺼냈다.
그것으로 황자초를 채집하기 위한 준비는 끝이었다.
황자초가 비록 맹독(猛毒)을 지녔다 하나 그건 잎사귀 끝에 달린 알맹이에 국한된 얘기였고,
잎 자체는 오히려 그냥 먹을 수도 있었다.
잎을 씹으면 단맛이 나는데, 물론 달다고 해서 무조건 오래 씹으면 나중에 곤란한 일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입맛에 맞다고 아무나 다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몽뇌산은 빙글거리는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왼손으로 황자초 한 포기를 쥐고 오른손 검지로 밑둥을 스윽 그었다.
뿌리만 고스란히 남긴 채 잎들이 매끈히 잘려져 나갔다.
뿌리 끝에도 독이 있긴 하지만 그냥 놔두고 가면 다음해에 또 이 자리에서 황자초를 볼 수 있을 터였다.
그가 막 두 번째 황자초를 잡아 갈 때, 어디선가 아련하게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비명은 잠시 잊고 있던 일을 너끈히 되살려 주는 힘이 있었다.
‘그 산적 놈이 기어이 일을……!’
몽뇌산은 황자초를 놔두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저러나 산적을 만난 사람치곤 비명이 묘한데?”
확실히 ‘내 옷’ 어쩌구 하는 비명은 좀 특이한 데가 있었다.
몽뇌산은 귀를 쫑긋거리다 말고 동굴을 빠져 나가 절곡 밖으로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잘려진 황자초 한 포기와 망태기는 그대로 팽개친 채!
* * *
“내 옷! 읍!”
이번의 비명은 아까보다 약했다. 그리고 짧았다.
장봉황은 눈앞에서 자신의 짐을 빼앗은 산적들 중 하나가 펼쳐 보이는 광태(狂態)에 비명이 절로
나왔지만 목에 칼이 디밀어져 있는 상황에선 나온다고 그냥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그가 아끼는, 제일 아끼는 옷을 저렇게……!
장봉황은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연록색 화복을 걸치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고슴도치같이 삐쭉삐쭉 서 있는 데다 턱은 무엇에 얻어맞았는지 커다랗게 움푹 들어간 흉터가 있는 그 사내는, 지금 눈에서 광기(狂氣)에 가까운 분노의 빛을 뿜어 내고 있는 중이었다.
사내가 자신을 휙 노려보자 장봉황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장봉황은 되도록 사내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내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그의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빼앗은 짐에서 똑같은 옷이 나오자마자 얼른 주워 입긴 했는데 영 몸에 맞지를 않았다.
맞기는커녕 꼭 끼다 못해서 앞섶을 여미려고 팔을 움직이자 어깨 솔기가 그대로 터져 버렸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옷은 장봉황의 체격에 꼭 맞춘 옷이었다.
육 척에서 한 치 모자라는 훤칠한 키에, 눈 씻고 찾아봐도 군살 하나 없는 미끈한 몸매는 평소 장봉황의 은근한 자랑거리였다.
그는 육 척이 넘는 키에 어깨가 우람하다 못해 거대하고 뱃살이 디룩디룩한 산적사내의 몸에 너덜너덜하게 걸쳐져 있는 자신의 연록색 화복을 가슴 아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자의 이름이 혈살마(血殺魔) 낭산(狼山)이랬던가?
“크아아아`─`!”
자신을 노려보던 낭산이 갑자기 괴성(怪聲)을 지르자 장봉황은 머릿속이 울려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작은 공지 여기저기에 자신을 빙 둘러싼 형세로 서 있던
다른 사내들이 그 모습에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장봉황은 자신의 목에 대감도를 대고 있던 사내마저 낄낄거리며 어깨를 흔들어대자 어떻게 해서든 목을
칼로부터 멀리 두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동안 거기에 신경을 쓰다 말고 이상한 예감에 눈을 슬며시 뜨니 자신의 바로 코앞에 씩씩거리며 서 있는
낭산의 모습이 보였다.
산적들의 웃음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장봉황은 간이 다 콩알만해졌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 내어 입을 열었다.
“옷값 물어 내란 말은 안 할 테니 내 짐을 돌려 주십시오. 짐만 돌려 주면 관부(官部)에 고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계속 여기서 일을 할 수……”
장봉황은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얼른 입을 닫았다. 그러나 산적들의 눈초리는 이미
심상치 않게 바뀐 후였
특히 낭산의 분노는 극에 달한 듯싶었다.
그가 장봉황의 멱살을 움켜잡자 이제껏 칼을 들이대고 있던 사내는 히죽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어이, 낭산! 부잣집 애송이에게 극락 구경 좀 시켜 주라구.”
“가만히 있었으면 다시 엄마 젖 먹으러 갈 수도 있었을 것을, 왜 낭산의 성질을 건드려서 화를 자초하나 그래?”
장봉황은 제각기 한마디씩 해대는 산적들 중 아까 산 아래에서 만났던 사내, 독심호리(毒心狐狸)
도곤(途昆)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얘기를 들어 보니 저자가 산채에서 벌이를 하러 나온 이
산적 무리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장봉황의 생각은 거의 틀리지 않은 것이어서, 도곤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산적들 여섯 명의
대장이자 군사(軍士)이자 먹이를 물어 오는 유인조(誘引組)였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까 얘기를 나눈 정을 봐서라도 어떻게 이럴 수가……! 에, 엑!”
장봉황은 말하다 말고 낭산의 손에 의해 멱살이 잡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러게 속은 놈이 멍청한 거지…… 정? 산적하고 나그네 사이에 뭔 놈의 정? 별 미친 소리 다 듣겠네.”
도곤의 작은 눈동자엔 경멸과 비웃음이 가득했다.
장봉황은 숨이 막혀 시뻘겋게 변한 얼굴을 하고 눈을 있는 대로 부릅떴다.
“이`─ 나아`─ 픈 노`─ 마! 처`─ 언`─ 버를`─ 켁!”
목이 더 세게 졸리자 장봉황은 발버둥을 쳤다.
“나안데 안 마는 오슬 가지고 다니어스니 너언 주거도 싸아`─`!”
장봉황은 낭산이 턱의 상처 때문인지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며 자신을 흔들어대자 완전히 죽을 맛이었다.
낭산의 말인즉, 자신에게 안 맞는 옷을 가지고 다닌 것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
같은데, 그 옷이 하필 낭산의 마음에 들 게 뭐란 말인가!
“말하는 걸 보아하니 둘이 잘 어울리는데? 우하하하!”
장봉황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박장대소(拍掌大笑)하는 도곤을 최대한 노려보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머릿속이 찡하더니 세상이 핑 돌기 시작했다.
자꾸만 몸에서 힘이 빠졌다.
“잘 어울린다는데 왜 더 말을 안 하지?”
도곤이 능글맞게 말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장봉황은 이미 숨이 막혀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도곤에게 날아왔다.
“부러우면 너도 저렇게 만들어 주랴?”
몽뇌산은 솔직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옷이 아무리 소중하다지만 저 철없는 귀공자의 경우엔 도가 지나친 듯싶었다.
다 죽게 된 마당에 옷 타령이 웬 말인가!
장내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주욱 지켜보던 몽뇌산은 평생 가도 보기 힘들 진풍경을 봤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성큼 나섰다.
전면에 나서기도 전에 던져 낸 그의 말에 금방 반응이 왔다.
“어떤 새끼가……? 엇!”
그래도 두 번째 본다고 제법 낯이 익은지 청의대한, 도곤이 험악하게 내뱉다 말고
뜻밖이라는 얼굴로 아는 체를 했다.
몽뇌산은 도곤이 눈썹을 위로 삐죽 세우고 작은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뜨는 걸 보며 명랑하게 말을 건넸다.
“나, 기억하지? 하긴, 하루 사이에 두 번이나 보게 되니 이쯤 되면 인연도 보통
인연이라 할 수 없지. 그런데 아까 물은 말엔 어째 대답이 없네?”
몽뇌산은 빙글거리며 도곤의 화를 슬슬 부채질했다.
안 그래도 작은 눈이 점점 더 가늘어지는 게 퍽이나 재미있었다.
도곤은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놈이 귀신처럼 나타나 말을 툭툭 던져대자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그의 나이 삼십오 세, 산적 생활 이십이 년에 정말 처음 보는 해괴한 놈이었다.
저놈이 뭘 믿고 저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미친 놈! 별 놈이 다 죽겠다고 용을 쓰네. 제길, 그러나저러나 일이 귀찮게 됐잖아?”
도곤은 주위에 둘러선 동료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무기를 움켜쥐고 맹수처럼 흉포한 기세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산적들을 향해 몽뇌산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가만, 가만! 일단은 이쪽하고 먼저 해결을 봐야 하니까 우선은 거기 그냥들 있어.”
도곤의 얼굴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몽뇌산이 도곤의 뻐기는 듯한 얼굴을 살피며 웃음을 참느라 갖은 애를 쓰는 동안, 그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동료들을 재촉했다.
“놈을 잡아라! 우리 일을 봤으니 관부 애들과 시끄러운 일 생기지 않게 처리를 해야겠다.
흐흐……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애송이!”
애송이 소리에 몽뇌산이 살짝 인상을 쓰는 순간,
“죽어라!”
“흐흐…… 네놈의 운수(運輸)를 탓해라! 이놈!”
괴소(怪笑)를 흘리며 산적들이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몽뇌산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아아! 생각을 바꿨어. 본래는 거짓말 잘하는 네 턱을 저 덩치 큰 놈같이 만들어 주는 걸로 끝내려고 했는데……”
몽뇌산은 도곤의 반응을 떠보느라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생각대로 도곤이 당장 손을 들어 산적들을 멈춰 세웠다.
‘생각보다 그렇게 악한 자는 아닌 것 같군.’
몽뇌산은 좀 다른 방식으로 도곤을 혼내기로 했다.
그의 심중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도곤은 거만하게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가늘어진 그의 눈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그랬는데?”
“그것보다는 저기 있는 친구의 여행 시중을 들게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몽뇌산의 턱이 낭산의 손에 인형처럼 매달려 있는 장봉황을 가리켰다.
“여행 시중? 날? 이 독심호리님을 하인으로 부리겠다구? 푸하하!”
그가 무슨 재미난 농담이라도 들은 듯이 웃음을 터뜨리자 다른 산적들도 덩달아 왁자지껄한 웃음을 터뜨렸다.
몽뇌산의 입가에도 빙글거리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거지 놈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을까?”
도곤의 웃음이 갑자기 싹 걷혔다. 독랄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산적 놈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은데?”
몽뇌산의 표정은 태평하기만 했다.
“흐흐흐! 그래, 숨겨 둔 한 수가 있다, 이거지?”
도곤이 느물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지금부터 보면 알겠지. 할말 다했으면 이제 덤벼 봐!”
도곤을 향해 몽뇌산은 손가락을 까딱거리고는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그 순간, 도곤은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눈동자가 극도로 가늘어졌다.
“이 새끼가? 죽어라`─`!”
그는 만만히 볼 수 없는 매끄러운 동작으로 낭아도를 뽑아 들고 몸을 날렸다.
이제껏 느긋하게 서 있던 몽뇌산은 예리한 기세를 동반한 채 날아오는 그의 낭아도를 오른쪽으로 슬쩍 피하며 왼쪽 옆구리 아래로 지나가는
도곤의 어깻죽지를 낚아채 땅바닥에 되게 메다꽂았다.
독기를 발출하지 않았을 뿐이지 거기엔 삼 성의 공력이 실려 있었다. 게다가 그 한 수는 사문의 사왕권(蛇王拳)을 응용한 것이었다.
손을 털어 낸 뒤 팔짱을 끼고 선 몽뇌산의 눈이 뭘 보았는지 동그래졌다.
몽뇌산은 충격이 가볍지 않았을 텐데 금방 발딱 일어나는 도곤의 모습을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산적치곤 제법인데?”
“빠드득! 이제 보니 정말 한 수 있는 놈이었구나. 형제들! 저놈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
낭산! 그놈을 내려놓고 저놈에게 주먹 맛을 보여 줘라`─`!”
도곤의 명령을 받고 산적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특히 장봉황을 무슨 종이인형 다루듯 바닥에 팽개친 낭산이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오는 기세는 등골이 다 서늘해질 정도였다.
“크아아아`─`!”
몽뇌산은 처음 들이닥친 자들의 공격을 사문의 독문신법인 환운주(煥雲走)로 피해 냄과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허리를 후려쳐 오는 낭산의 주먹을 손등으로 빠르게 내갈겼다.
이번에도 역시 사왕권이었다.
뱀 머리 모양을 한 몽뇌산의 손과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낭산의 주먹이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켰다.
퍼엉`─`!
우드득!
“우아아악! 으으`─`!”
이리저리 뒤엉킨 사람들 사이로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
사왕권의 위력은 과연 놀라웠다.
비명의 한가운데에 으스러진 주먹을 감싸 쥔 낭산의 모습이 보였다.
몽뇌산은 사왕권 제이수인 파암사영(破巖蛇影)과 충돌한 기세를 못 이기고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린 낭산의
신음을 한 귀로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나는 산적들의 머리 위를 훌쩍 타넘었다.
그의 신형이 쏜살같이 수림 속으로 사라져 갔다.
몽뇌산이 다시 나타난 것은 정말 눈 깜짝할 새였다.
그러나 그사이 산적들은 죄다 사라지고 없었다. 심지어 바닥을 뒹굴던 낭산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쫓자고 마음먹으면야 못 할 것도 없겠지만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미 주동자를
잡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졸개들을 놓아 줄 이유는 충분했다.
“아이고`─`!”
몽뇌산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도곤이 비명을 지르자 인상을 썼다.
도곤이 장내에서 사라진 걸 눈치챈 것은 낭산과 주먹을 마주칠 때였다. 그래서 낭산을
물리치자마자 몽뇌산은 부리나케 숲으로 달려들어가 혼자서만 슬며시 도망치던
도곤을 잡아왔던 것이다.
“생긴 건 그런대로 봐줄 만한데 하는 짓은 왜 그 모양이야?”
몽뇌산은 혼자서만 살겠다고 도망친 도곤의 행동을 대놓고 비꼬았다.
잠시 얼굴을 붉히던 도곤이 은근히 목에 힘을 주며 타협하자는 눈빛을 보내 왔다.
“우리 독산채(獨山寨)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을 텐데?”
“독산채? 산적소굴 이름치곤 되게 거창하네.”
몽뇌산은 피식 웃으며 흙바닥에 박혀 있는 어른 머리통만한 바위에 발을 척 올려놓았다. 바위에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며 점점 높이가 낮아졌다.
잠시 후 바위는 바닥을 뚫고 완전히 내려앉아 그 자리엔 구덩이가 하나 생겼다.
도곤의 낯빛이 확 달라졌다.
“너…… 가 아니고 소협! 아니, 대협! 소인에게는 딸린 처자와 노모가 계십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선처를……!”
순식간에 돌변한 도곤의 태도에 몽뇌산의 표정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대단한 연기야! 그런데 기억력은 형편없는데? 내가 아까 무슨 벌을 준다고 했지?”
“대협! 소인이야 지은 죄가 있으니 그런 벌을 받아도 할말이 없지만 저분 공자께서 달가워하실지……?”
몽뇌산은 도곤의 시선을 따라 장봉황이 쓰러져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이 교활하게 빛난다 싶은 순간, 꼭 쥐고 있던 도곤의 왼쪽 주먹이 쫘악 펼쳐지며 무언가가
몽뇌산에게 뿌려졌다.
흙먼지 같은 희뿌연 가루가 얼굴로 확 덮쳐 들었다.
“으하하! 네놈은 속았다, 멍청한 놈!”
어느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선 도곤이 득의 양양하게 웃었다.
“갈혼분(蝎魂粉)? 아이고, 무섭기도 해라!”
몽뇌산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오히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도곤의 샐쭉한 눈매가 한껏 부릅떠진 것을 보자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었다.
희뿌연 가루, 갈혼분이 모조리 몽뇌산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광경에 도곤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다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헛! 이, 이…… 받아라!”
도곤이 품에서 꺼낸 가죽주머니를 허공에서 세차게 털어 냈다.
‘이젠 네놈도 끝……’
그러나 도곤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독혼사(毒魂砂)로도 안 되지, 아마.”
몽뇌산은 허공을 뒤덮으며 분분히 쏟아져 내리는 고운 남빛 모래를 소맷자락으로 가볍게
쳐냈다. 그것들이 흙바닥에 점점이 박히며 푸른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이 보였다.
“이 악귀 같은 놈`─`!”
도곤은 악을 쓰며 품안에 있던 독을 있는 대로 꺼내다 뿌렸다.
“청오독(靑毒), 남사독분(藍蛇毒粉)! 많이도 갖고 다니네.”
입으로 연방 도곤의 비윗장을 뒤집어 놓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독을 하나하나 다 처리하고 난 다음, 몽뇌산은 넋을 놓고 서 있는 도곤에게 스윽 다가가 간단하게 마혈을 점했다.
“헉, 허억헉! 네, 네놈은 어째서 중독되지, 아니, 대협은 왜 중독되지 않으십니까?”
그때서야 제정신을 찾은 도곤은 신기함과 두려움이 반반씩 뒤섞인 얼굴로 몽뇌산을 올려다보았다.
“살다 보면 나 같은 사람도 하나쯤 만나게 되는 법이지. 자, 아까 얘기로 돌아가자고!”
“허억, 헉헉! 대협!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러니까, 그게 저분 공자께서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도곤은 가쁜 숨을 들이쉬며 몽뇌산에게 통사정을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것은 완전히 쉬어 버린 목소리였다.
“켁켁! 힘만 세가지고서, 이런 무식한……!”
누구의 것인지 뻔했다.
목소리의 임자는 끊임없이 콜록대면서도 몽뇌산과 도곤의 대화에 너끈히 끼여들고 있었다.
“콜록콜록! 이 나쁜 놈! 내가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구? 흥! 은공, 저자를 꼭 제 시중꾼으로 쓰게 해주십시오.”
몽뇌산은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치를 떠는 장봉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장봉황은 벌건 얼굴을 한 채 이쪽으로 다가오면서도 연신 옷자락에 묻은 흙먼지를 세심하게 털어 내고 있었다.
몽뇌산의 눈동자에 흥미가 가득 담겼다.
‘뭘 저렇게 털고 있지?’
몽뇌산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도곤은 자신을 보며 부들부들 떠는 장봉황에게 용서를 빌기에 바빴다.
“공자! 아까 술을 나누어 마신 정을 봐서라도 부디 용서를……”
“정이라구? 산적과 피해자 사이에 무슨 놈의 정?”
먼지를 털다 말고 장봉황이 도끼눈을 하고 도곤을 째려보았다.
“공자! 저 같은 놈을 데리고 다니면 공자께서도 불편한 점이 많으실 텐데요? 그러니……”
은근한 협박이 담긴 도곤의 미소 섞인 말은 장봉황의 코웃음 소리에 간단히 잘렸다.
“흥, 불편? 내가 불편하면 넌 편할 줄 알고? 볼일 볼 시간도 없을 거다, 흥!”
도곤과 몽뇌산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보아하니 장봉황은 도곤의 말이 협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도곤이 자신을 ‘뭐 저런 멍청한 놈이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봉황은 우아하게 몽뇌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은공! 인사가 늦었지만 목숨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무 염치없는 일이
되겠지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저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조치를 좀 취해 주십시오.”
정중한 장봉황의 부탁에 도곤은 안색이 대변해서 소리쳤
“무, 무슨 말을? 대협! 설마 제게 금제(禁制) 같은 걸 베풀지는 않으시겠죠? 저는 정말 그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습니다. 흐흐흑!”
눈물을 뚝뚝 흘리는 도곤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로웠다.
“물…… 론, 그건 회한(悔恨)의 눈물이겠지? 근데 왜 나는 별로 감동이 안 될까? 어쨌거나 이쪽 말도 일리가 있으니 그냥 간단한 독을 하나 베풀면 될 것 같군. 좀 전에 보니 독을 꽤 좋아하는 것 같던데.”
“독이라구요? 아이고, 대협! 살려 주십시오.”
도곤이 질겁을 하며 자지러졌다.
“그 일은 이미 결정났으니 거기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러나저러나 이름이 뭐지?”
“도곤입니다, 대협!”
몽뇌산은 냉큼 튀어나오는 도곤의 깍듯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장봉황을 돌아다보았다.
“댁은 이름이 뭡니까?”
장봉황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예? 아, 예…… 소생은 항주에서 온 장봉황입니다.”
몽뇌산은 점잖게 이름을 소개하는 장봉황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자기 이름도 작명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은 아니었지만 이 부잣집 귀공자의 이름도
상당히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긴 그 이름이 장봉황의 조부가 꿈에서 한 쌍의 봉황을 보고 지은 이름이란 걸 알 턱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잠시. 몽뇌산은 품에서 검은 단환(丹丸)을 꺼내,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물만 찔찔 짜는
도곤에게 디밀었다.
엄지손톱만한 그 단환은 시장바닥에서 파는 엉터리 약장수의 만병통치약처럼 퍽이나 볼품없어 보였다.
“도 산적! 내가 주는 이 약은 별거 아니지만 두 달 내로 해약을 먹지 않으면 간혹 가다 즐겁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 무슨 얘긴지 알아들었겠지? 두 달이야, 두 달!”
몽뇌산은 짐짓 스산한 얼굴로 엄포를 놓았다.
“아! 그리고 이 독은 본 문의 비전독(秘傳毒)이라서 다른 곳엔 해약이 없다는 것도
미리 밝혀 두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시중도 안 들고 은근 슬쩍
도망쳤다가 나중에 해독시켜 달랄 생각도 버려. 저 사람에게 증표를 하나 주어서 일이 다 끝난 후에 자네에게 주라고 할 테니까! 무슨 증표냐구? 간단해. 그냥 말 한마디야! 물건으로 줬다가는 자네가 저
사람을 죽이고 가져 갈 수도 있으니까.”
장봉황이 옆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곤을 노려보았다.
“질문있나? 없으면, 아`─ 해.”
몽뇌산은 도곤이 죽을상을 하며 마지못해 벌린 입에다 단환을 쏙 밀어
넣었다.
독약을 받아 먹은 도곤의 표정이 완전한 체념으로 바뀌었다.
힘없이 고개 숙인 도곤의 뒤통수를 빤히 내려다보던 몽뇌산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매달렸다.
겉으론 이미 포기한 듯하지만 속으론 이 위기를 벗어날 궁리를 하느라 김이 나도록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게 안 봐도 훤했다.
훗날 자신이 복용한 것이 단순한 설사약이란 걸 알면 도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게다가 그가 준 사인환(瀉引丸)은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특이하게도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 약이었다.
독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의원에게 보인다 해도 별로 들을 얘기가 없을 터였다.
몽뇌산은 도곤이 처량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미소를 싹 거뒀다.
“저어…… 해약을 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으음! 좋은 질문이야. 강서성 천초산으로 오면 돼. 자, 도 산적! 주인 잘 모시도록.”
몽뇌산은 그 말을 끝으로 미련없이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런데 가다 말고 그의 몸이 핑그르르 돌더니 장봉황 곁으로 바짝 다가서서 장봉황의 귀를 잡아당기며
뭔가를 속닥거렸다.
순간, 뉘우치는 빛으로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곤의 귀가 쫑긋 섰다. 눈을 굴리며 잔뜩 고개를 빼던 그는 몽뇌산이 이내 돌아서자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도곤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봉황의 얼굴과 휘적휘적 걸어가는 몽뇌산의 등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 대협`─`!”
초조한 마음에 일단 몽뇌산을 불러 세우긴 했는데 막상 할말이 없었다.
“왜?”
“저…… 그게, 아! 마혈은 풀어 주고 가셔야죠?”
한동안 머뭇거리던 도곤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아! 그렇지. 미안, 미안!”
슬쩍 손을 놀려 마혈을 풀어 주고 나서 몽뇌산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빠르게 걸어갔다.
“저, 은공! 산을 내려가서 술이라도 한잔 대접할 수 있게 같이 가시지요?”
좀 전의 어리둥절함에서 겨우 벗어난 장봉황이 뒤에서 다급하게 불렀으나 몽뇌산은 손만 한번 흔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멀어져 갔다.
“도 산적! 빨리 일어나서 따라오지 않고 뭘 하는 게냐?”
철저하게 하인 취급을 하기로 마음먹은 듯한 장봉황의 태도에, 도곤은 얼굴을 처참하게 구겼다.
마음 같아서는 한칼에 끝을 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놈의 목숨이 귀해서가 아니었다. 증표로 몽뇌산이 장봉황에게 일러준 그 말을 알기 전에는 무조건 자신의
목숨을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도곤은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빨리 안 와`─`!”
벌써 저만치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 장봉황의 고함에 도곤은 번쩍 고개를 들며 표정을 싹 바꾸었다.
“갑니다, 가요!”
장봉황의 뒤를 따라 헐레벌떡 뛰어가는 도곤의 모습도 이내 산중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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